■장흥의 옛터산책(3)- 서남해 교통의 중심고을이었던 ‘장흥(長興)’이…
■장흥의 옛터산책(3)- 서남해 교통의 중심고을이었던 ‘장흥(長興)’이…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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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양기수
본지 논설위원. 시인. 향토사학자.
저서로 「문림고을 장흥」
「장흥의 민속」 「보림사」 등
장흥 역사·문화·민속에 대한
책 10여권을 펴냈다.

장흥읍 시가지. 장흥동문쪽에서 1905년에 촬영됐다. 가운데 장흥관아가 있다. 멀리 장원봉이 보인다.
장흥읍 시가지. 장흥동문쪽에서 1905년에 촬영됐다.
가운데 장흥관아가 있다. 멀리 장원봉이 보인다.

오늘날의 시대는 의식주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하는 시대라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즐기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삶을 원하는 시대이다
이제 다시 장흥이 서남해 중심고을로 주민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옛날 장흥은 서남해의 행정과 국가방위를 위한 중심고을로서 오랫동안 영위해오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남해의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빠른 정보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일조를 해왔다. 그 첫 번째가 문자를 해독하여 스스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터득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삶을 위한 문물의 유통이었다. 구시대 우리는 왕조정치로 인한 중앙집권체재 하에서 통치자의 명령이나 공문의 전달은 일반 서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전자통신기기가 없고 자동차가 개발되기 전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식을 전해야 했다. 또한 사람이 직접 물건을 전달하거나 교환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우리의 교통수단은 말을 이용하거나 우마차(牛馬車)를 그리고 배를 이용하는 것 외에는 모두가 걸어 다녀야 했다.

때문에 통치자는 통치수단의 하나로 중앙과 지방간의 공공 업무의 신속한 수행을 위한 기구로 역참(驛站) 제도를 두었다. 역참은 중앙의 명령사항을 지방으로 신속히 전달하기도 하였지만 변방의 긴급한 사항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외적으로부터 방호를 위한 변방의 군사 정보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봉수(烽燧)제도도 있었다.
봉수(烽燧)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 이용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알리던 통신제도로 중앙통치자가 있던 궁중까지 전달되는 직봉(直烽)과 지방 수령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간봉(間烽)이 있었다.

장흥에는 직봉인 천관산 봉수와 간봉인 억불산 봉수와 수인산 봉수가 있었다. 이 봉수는 대체로 남해안의 침략군을 대비한 것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통신방법이었다. 이는 신식우편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 국가의 군사적 정보통신의 기능을 목적으로 설치되어 1895년경에 폐지되었으나 지금도 천관산과 억불산 수인산 정상부위에 당시의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고 장흥읍 평화리 내평마을은 정화소(丁火所)라는 이름으로 억불산의 봉수를 관리하던 주민이 거주했다 전한다.

역참의 운영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 나가는 기능뿐 아니라,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역참제도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부터 보이나 역참제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전국적으로 정비 조직된 것은 고려에 들어온 뒤였다.

당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의 역참을 보면 약간의 위치적인 변화는 있으나 오수도(獒樹道), 경양도(景陽道), 청암도(靑巖道), 벽사도(碧沙道)가 운영되었다.
오수도(獒樹驛道)의 관할범위는 남원-운봉, 남원-구례-순천-광양-하동방면, 순천-전라좌수영, 남원-곡성-낙안(樂安)방면으로 이어지는 전남지역의 동부로 이어지는 역로이고, 경양도(景陽道)의 관할범위는 광주―옥과(玉果)―곡성 방면에 이어지는 역로와 광주―동복(同福), 광주―능주(綾州)에 이어지는 전남의 중심지역의 역로이다.

1910년 경 장흥-수문간 도로개설작업 광경. 일제는 체포한 항일의병들을국도 1,2호선 공사(新作路 공사)에 투입했다.-현 장흥읍 월평마을 미륵등 개설작업
1910년 경 장흥-수문간 도로개설작업 광경.
일제는 체포한 항일의병들을국도 1,2호선 공사(新作路 공사)에 투입했다.
-현 장흥읍 월평마을 미륵등 개설작업

청암도(靑巖道)의 관할범위를 보면 장성-나주-영암에 이어지는 역로(驛路)와 무장-영광-함평-무안(務安)방면, 광주-남평-전라우병영(全羅右兵營) 방면에 이어지는 역로로서 전남의 서부였다.
장흥은 벽사도(碧沙道)로서 그 관할 범위는 고흥-보성-장흥-강진-해남-진도에 이어지는 역로이다.
장흥에 역참이 처음 들어선 것은 고려시대로 995년(성종 14) 지금의 장흥읍 관덕리247번지 일대에 역참 관아를 설치하여 벽산역(碧山驛)이라 이름하고 관리자로 처음엔 역승(驛丞; 종9품)을 두었으나 조선 성종 때 벽사역(碧沙驛)으로 이름을 바꾸고 1535년(중종 30) 관리자의 벼슬을 역승(驛丞)에서 찰방(察訪; 종6품)으로 승격 임명하였다. 장흥의 벽사역 찰방은 전남 남해안 해안부 지역을 널리 관장하였다.

벽사역 외에 보성의 가신(可申)·파청(波靑), 흥양의 양강(楊江, 또는 陽江), 낙안의 낙승(洛升, 또는 落升), 강진의 진원(鎭原)·통로(通路), 해남의 녹산(綠山)·별진(別珍)·남리(南利) 등 9개 역(驛)의 역승(驛丞)을 관리 관장케 하였다. 이를 벽사도(碧沙道)라 총칭하여 10개 고을의 정보와 통신 등의 업무를 보아 온 것이다.

벽사역이 설치된 꼭 900년이 되던 1895년(고종 32)에 역참제는 사라지게 됐지만, 그 흔적으로 당시의 관아터를 비롯한 마방터 등이 남아 있고, 벽사역을 관리했던 찰방들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 16기가 장흥읍 원도리 마을 앞에서 상리마을 도로변에 산재해 있어 지난 1975년도에 장흥교도소가 들어서면서 이를 교도소 부지에 한데모아 관리하여 오고 있다. 당시 벽사역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주민이 장흥읍 원도리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장흥부사로 부임한자가 부정 패악관리인 경우 이를 규탄하는 암행어사 출두시 이들이 동원됐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마을의 민담으로 전해오는가 하면, 동학혁명당시 고부민란을 수습하려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벽사역의 역졸을 동원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역참제도의 영향일까?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 일제는 1906년 통감부에 치도국(治道局)을 두어 도로를 개설하였다. 이른바 신작로(新作路)라 하는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서둘러 도로개설사업을 하게 됨은 주민편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대륙진출, 군사활동 지원, 경제수탈 등의 목적을 위해 시작되었다.
일제는 1907년 제1차로 군산∼전주, 목포∼광주, 진남포∼평양, 대구∼경주간 이었고, 다음해인 1908년도에 공주∼소정리, 수원∼이천, 마산∼진주, 해주∼용포간이었다. 이렇게 계획하여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는 군산과 전주간의 도로이다. 이는 호남의 곡물을 수탈해 군산항까지 마차로 수송해 일본까지 보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개통식에서 친일 총리였던 이완용(李完用)이 첫 테이프를 끊었었다.

이어 신작로 개설을 위해 서울의 성곽을 헐고 성안으로 도로를 연결시켰다. 이로써 1911년 왕실과 총독부에서 자동차를 도입해 자동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15년부터는 지방과 연결하는 신작로가 개통 되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일본인이 사는 곳이나, 군사적 경제적인 목적에 필요한 곳을 중점적으로 만들었지 실제 주민 편익을 위해 만들지는 않았었다.
장흥은 기후가 온화하고 산물이 풍부한데다 문화적으로 타 지역보다 앞선 고장으로 일본인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한 관계로 타 지역에 비해 신작로 개설이 일찍 시작되었다. 당시 신작로가 가장 먼저 개설된 곳은 장흥-수문간으로 파악되어지고 이어 개설된 곳이 목포-부산 간으로 국도2호선으로 명명된 곳이다.

당시 도로개설은 초창기에는 의병활동자로서 경미한 혐의를 가진 자들이 수형인으로서 강제동원 되어 개설에 참여하였다 전한다.
이렇게 개설된 신작로. 도로의 관리는 조선시대의 역참을 관리하듯 1921년 3월부터 “토목관구사무소(土木管區事務所)”라 하여 구역별 도로를 관리하는 사무소를 도청산하에 두었었다.
전리남도 도청산하에 둔 토목관구사무소는 4개소로 광주토목관구사무소, 순천토목관구사무소, 영산포토목관구사무소, 장흥토목관구사무소를 두었다. 이 역시 광주토목관구는 광주에 사무소를 두고 화순 담양 장성 곡성 나주남평지역으로 호남의 북부를, 순천토목관구는 순천 구례 광양 여수 고흥 보성벌교로 전남지역의 동부를 관장하였으며, 영산포 토목관구는 영산포를 비롯해 전남의 서부지역인 영암 함평 영광 무안을 담당하였다.

장흥의 토목관구사무소는 전남 남부해안 지역의 중심부인 장흥읍 건산리 715-5번지( 지금의 농협장흥군지부자리)에 사무소를 두고 벌교읍을 제외한 보성군과 강진 해남 완도 진도군을 관리하여 왔었다.

당시의 토목관구사무소는 도로개설시 도로구조물 설치 사업비 외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았고 일반주민 편익을 위한 국가적인 사업이라 하여 주민들의 노력 동원이 많았다 전한다. 토목관구사무소는 해방과 동시에 그 기능이 유명무실해졌고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도로의 관리는 완전히 주민들의 몫이었다. 한국동란으로 인한 피해복구와 비포장으로 인하여 매년 반복되는 풍수해로 유실된 도로의 복구는 우리 주민들이 울력을 통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 당시 주민들은 도로 유지관리를 위하여 마을별로 도로의 구간을 정하여 년 2회 이상, 도로에 팥자갈을 깔기도 하고 측구정리도 하였으며 도로변 풀베기 작업까지도 시행하는데 각 가구당 1명이 의무적으로 참가하여야 했었다.

이후 1966년 4월 토목관구사업소가 기존 위치에 재발족 되어 도로유지와 업무를 수행하다가 1972년 3월 전라남도건설사업소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고,1982년 3월 전라남도 건설사업소와 중기사업소의 업무를 통합하여 ‘전라남도도로관리사업소’로 명칭을 바뀌고 기존 4개소(영산포, 광주, 장흥, 순천)에 위치하던 사무소를 통합하여 나주시 봉황면에 사무소를 두어 오늘에 이르면서 도로법에 의한 지방도로를 관리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정부산하의 종합 건설업체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이를 유지 관리토록 1969년 2월 한국도로공사를 설립하여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2018년 5월 23일 (수요일) 11
새로 쓰는 長興 人∙文∙地誌 1975년까지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를 개통한 고속도로를 관리한다.
그리고 전국도로의 주요 노선의 건설은 1967~76년의 10년 동안 집중되었고 1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도로노선의 신설과 확장사업이 재개되는 과정을 밟자 국토교통부산하에 있던 지방건설국을 ‘지방국토관리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 부산, 대전, 익산에 사무소를 두어 국도와 국가하천을 유지관리 하도록 하고 있다.
현재 장흥지역의 국도의 유지관리는 익산국토관리청 소속의 순천국토관리소 산하의 보성출장소에서 관장하고 있다.

세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1세기를 거슬러보면 무엇보다도 의식주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장흥은 지역개발이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전혀 진전이 없는 듯 해 안타깝기만 하다. 다행이 지방자치제의 시행으로 지역개발의 시발을 위한 사업으로 노력항을 개발해 장흥과 제주 성산포간의 연락선을 띄워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보여 서서히 지역개발과 경제에 보탬이 되어지는가 했더니만 지자체의 안전 경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투자를 끊어 버리고, 전국 가무악대전의 개최로 장흥이 서편제의 본고장이고 예(禮)와 악(樂)을 중시하는 선비의 고을이었음을 곳곳에 알려 왔건만 이마져 중단해버려 아쉬운 마음은 16년 동안 장흥의 가무악 대회에서 입상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입상자들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내일을 위한 꿈을 키우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대부라도 받아 포장마차라도 준비해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가난하니 있는 양식만으로 생활하자는 정책을 편다면 앞날에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가난 할수록 노력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어른신들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여겨지는 요즘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의식주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하는 시대라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즐기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삶을 원하는 시대이다. 장흥은 어느 고장보다도 지난 한 세기동안 1차 산업을 중심으로 꾸려왔기에 청정한데다 기후가 온화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현대인들이 거주를 원하는 곳이지만 이를 즐기고 자신의 꿈을 펼쳐 갈 수 있는 문화적인 시설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제 다시 장흥이 서남해 중심고을로 주민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朝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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