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역사상 4회 봉문(封門) 당한 장흥
사설 - 역사상 4회 봉문(封門) 당한 장흥
  • 김선욱
  • 승인 2023.01.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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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 ‘길게 흥할 복지(福地)’의 토대 굳힌다

장흥군의 역사는 전남에서 나주 다음 가는 금빛 찬연한 역사였다. 13세기 초 장흥군이 부사고을이 되어(순천시, 당시 순주군은 14세기에 목사(牧使) 고을이 되었다가 곧이어 부사고을이 되었다) 대한제국까지 8세기 가까이 전남에서는 나주에 이어 제2의 중심고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금빛 찬란한 장흥 역사의 이면에는 4회나 봉문(封門)을 당했던 뼈아픈 역사가 있었다.

장보고 와해 후 장흥 봉문 당해

선종 보림사로 다시 일어서다

장흥군의 최초 봉문은 통일신라 때 천관산 세력이 장보고의 예하세력으로 편입되며 장보고의 해상왕국과 유대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경주로 쳐들어 가 왕을 살해하는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해상왕국을 건설하려던 장보고의 꿈은 846년 당대 왕과 귀족들의 반감에 힘입은 염장에게 살해되고 이후 신라조정은 몇 년에 걸친 청해진 정비 작업 끝에 851년 청해진을 와해시켰다. 당시 청해진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천관산 세력, 즉 장흥군도 청해진 본진 세력과 함께 조정의 척결대상이었다. 청해진의 잔존 세력은 그때 김제 땅 벽골로 이주되어 바다를 틀어막고 저수지를 만드는 간척 노역에 투입됐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759년, 장흥군의 내륙 깊숙한 곳에 신라 왕실과 귀족사회의 도움으로 선종의 종찰인 보림사가 창건된다. 당시 신라조정은 장보고와 결탁하여 척결대상이었던 천관산 세력과 장흥을 구심점으로 한 호남 서남부의 호적들을 끝까지 외면, 무시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선택한 회유책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굳이 경주로부터 최변방이나 다름없고 옛 백제 관할의 땅이었던 장흥 가지산에 선종의 종찰로서 보림사를 창건한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보고 와해로 봉문을 당했던 장흥은 이로써 소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후 고려조 이르러 수많은 인물들이 중앙(조정)에 출사하며 부사고을로 단단한 입지도 다지면서 고려 때 변방의 시골 지역으로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잘 나갔던 성세(成勢)의 고을이 될 수 있었다.

고려 때 기적 같은 인물군 배출

고려 때도 장흥은 개경으로부터 최남단이요 최변방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호남지역은 고려태종의 ‘훈요십조’로 인해 쉽게 인물을 배출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흥의 대표적인 토성이던 장흥임씨의 경우, 왕비 공예태후로 인해 단번에 권문세가로 급부상했고, 공예태후를 전후로 하여 임의(任懿)‧임원후(任元厚)‧임원숙(任元淑)‧임유(任濡)‧임경숙(任景肅)‧임경겸(任景謙)‧임효순(任孝順)‧임경순(任景恂)‧임익(任翊) 등등, 지금 같으면 국무총리급 인사 3명, 장관급 인사 1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기적 같은 역사가 빚어졌다.

장흥마씨도 정종 때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마희원(馬希援), 충선왕 때 평장사를 역임한 마수손(馬壽孫) 등에 이어 이성계 역성혁명을 도와 후에 전라도병마도절도사를 지낸 마천목(馬天牧) 같은 여러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또 하나의 토성이던 장흥위씨도 예종 때 문하시중까지 오른 대문신이던 위계정(魏繼廷)과 고려조 이전까지 모든 승려 중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등극한 원감국사 위원개(魏元凱,圓鑑國師) 등이 배출되었다.

고려 때 이아 같은 인물배출은 지방에서는 어느 지역과도 비교가 안 되는, 실로 대단한 성가(聲價)였다.

조선조, 고려 때 성세로 배척 받아

그러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탄생한 조선조에 이르러, 장흥은 과거 왕조의 동조세력이었다는 이유로 또 다시 봉문을 당하게 되어 장흥인물이 조정에 진출하는 일이 막히게 된다.

이때 장흥 사람들은 어찌했을까. 고향에 은둔하며 초야에 묻히거나 선비로서 학문을 강학(講學)‧궁구(窮究)하고, 군자도(君子道)‧선비도를 수양하며 어두운 세월을 이겨냈다. 이것이 훗날 사림(士林)‧유림(儒林)의 성가를 드높이는 바탕이 되었고, 특히 당시 출세길(조정에 관리로 출사하는 일)에서 벗어나 시문학(詩文學)의 길을 걷는, 이른바 문림(文林) 고을과 의향(義鄕)의 입지로서 바탕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던 1392년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1500년대 초에야 비로소 장흥에 문림(文林)고을로서 토대가 되는 두 인물이 출현한다. 장흥 역사상 최초로 학맥을 일구며 한시인(漢詩人)으로 명성을 떨친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 502~1584)과 기행가사의 효시인 ‘관서별곡’으로 장흥의 가사문학을 부흥시킨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 1522~1556)의 출현이 그것이었다.

장흥, 문림‧의향으로 전통이 세워지다

천방으로부터 시작된 한시문학은 이후 정경달(丁景達,1542~1602)을 비롯하여 위덕의(魏德毅, 1540~1613), 이민기(李敏琦, 1646-1704) 등의 한시 문인들로 이어지며 지방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유문집 250여 권을 남기는 한시문학의 부흥기가 이루어졌다.

또 백광홍으로부터 시작된 장흥의 가사문학은 ‘천풍가(天風歌)’의 노명선(盧明善, 1647∼1715), ‘금당별곡(金塘別曲)’의 위세직(魏世稷, 1655∼1721)’, 임계탄의 0000, ‘자회가(自悔歌)의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초당곡(草堂曲)’‘인일가(人日歌)’의 이상계(李商啓, 1758∼1822), ‘장한가(長恨歌)’의 이중전(李中銓, 1825∼1893) 등이 출현하며 가히 호남제일의 장흥가단을 이루면서 문림고을의 문학 부흥기를 이루었다.

이처럼 조선조 장흥지역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한 가사문단으로서, 가사문학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한시문학의 부흥까지 이루며 명실상부 문림고을로 입지할 수 있었다.

의향으로서 향맥의 전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두드러졌다.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받았던 이순신은 사전의 전투준비가 철두철미했고, 특히 민의(民意) 읽기에 투철했다. 그런 그가 삼도수군통제사 취임과 전쟁 출전의 결의 선포식 등 기포 장소를 물색하며 15일간 잠행할 때, 그는 이미 호남에서는 제1의 의향이요 선비정신이 투철했던 장흥부를 생각했었다고 여겨진다.

임진란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웠던 종사관 정경달의 출신지 장흥에 대해 이순신은 너무 잘 알았다. 특히 임란 때 문위세(文緯世)가 네 아들 원개(元凱)‧원개(英凱)‧형개(亨凱)‧홍개(弘凱)와 사위 백민수(白民秀)‧조카 문희개(文希凱)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국구전선에 나섰던 것이며, 의병장 위방(魏魴)이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한산도 해전에서 전사했던 일, 자신의 막하에서 조전장으로 옥포, 적진포, 율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던 위대기·신용호·변홍달 등의 장흥 출신 의사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은 장흥부를 호남에서 제일가는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요, 의로운 고장임을 알았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장흥부의 큰 지원과 협조가 있을 것으로 이해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 장흥부에서 이순신의 막하로 수많은 의인들이 모여들어 이순신의 기적 같은 명량해전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었다. 장흥출신의 마하수(馬河秀)‧마성룡(馬成龍)‧마위룡(馬爲龍)‧백진남(白振南)‧정명열(丁鳴說)‧문영개(文英凱) 등을 비롯한 장흥의 선비들은 물론 상민들까지 의병으로 적극적인 참전했던 고을이 장흥이었다. 안양면 동촌 출신의 초계 변씨 변홍주‧변국형‧변국간‧변국경 등도 전선 10여 척과 노를 젓는 사람 300여 명을 데리고 통제사의 군영에 합류, 명량대첩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1597년 9월 16일, 세계 최고의 해전으로 기록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쳤으며 회령포는 이처럼 정유재란 때의 중요한 역할로 ‘의향 장흥’으로서 더욱 굳건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장흥의 의향정신은 조선조 말, ‘세상을 평등세상으로 바꾼다’는 동학정신의 발현으로 다시 출현했으니, 장흥에서의 동학 최후의 격전이었다.

이때 일본군 300여 명이 관군과 함께 장흥동학군과 싸우고, 동학군 색출을 빌미로 장흥에 계속 상주하였는데, 이는 청일전쟁으로 청국도 이기며 동방의 패권국가로 군림했던 ‘천하의 대일본국’과 맞서 싸웠던 장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동학 장흥’은 동학농민전쟁 이후까지도 일본을 긴장시켜, 일본군이 계속 장흥에 상주했던 것이다

더구나 관군 96인의 순절은 조선 관군과 조정을 긴장시키며 장흥을 곱게 볼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이른바 괘씸죄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정의 불편한 심사가 동학란 10여년 후에 단행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즉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시 장흥부관활이었던 완도 서북부 지역 7개 섬을 신설된 완도군으로 편입시켜 장흥군의 세(勢)를 크게 약화시키며 쪼그라들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1914년의 제2차 행정구역에서는 여전히 장흥에 대한 긴장을 놓지 못했던 일본제국이 앞장서서, 장흥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하여 웅치면‧회천면‧조천면 3개 면을 보성군에 편입시켜, 장흥군의 세(勢)는 1895년에 이어 또 다시 1914년에 군세의 약화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호남에서 나주시 다음으로 컸던 장흥군이 그때부터는 강진군보다는 조금 크고, 보성군보다는 더 작은 군이 되고만 것이다. 또 이것은 결국 장흥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으로부터 3번째 봉문을 당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대한반도의 국토 균형발전 차원에서라면, 역사적으로 8세기 동안 부사고을이라는 큰 고을로 입지해온 부사고을 장흥은 시가 되고도 남았다.(경남의 경우, 남해안 연안의 9개 시군이 몰려있는데, 호남의 경우 목포시에서 순천‧여수‧광양시 등 3개에 불과하다)

현대 산업화 시대 진입 …

산업화가 불러 온 4회째 봉문

장흥의 4회째 봉문은 산업화라는 괴물이 불러온 결과였다. 이 4회째의 봉문은 3회째 대한제국과 일제의 의해 당한 봉문패를 덧씌운 것이나 다름없어 장흥군을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본격적으로 추진된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전국이 산업화 물결에 휩싸였다. 특히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는 특별한 지역의 공업단지 등 산업화단지 조성을 비롯해 주로 물류 이동이 쉬운 도시권역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전라남도의 경우, 장흥은 3권의 도시권역(광주‧나주시, 목포시, 광양‧여수‧순천시)로부터 가장 원거리에 위치하는 지장학적인 요인으로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지방자치 시작과 더불어 민선 1기가 시작되었을 때 장흥군의 군정 구호가 ‘아껴놓은 땅’이 되었을까. 도시권역으로부터 가장 먼 위치라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전라남도와 정부 당국도 장흥은 그 대단한 열풍이던 산업화 물결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호남 서남부권 9개시군의 용수해결이라는 미명으로 추진된 국책사업이었던 탐진댐 건설이 추진되었을 때 장흥군이 적극적으로 댐 건설을 반대하지 못하고 암묵적으로 수용한 것은 장흥댐 건설 사업에 따른 대안사업이라는 수혜 때문이었다. 즉 피해를 입게 되는 장흥의 수혜사업이었는데 처음에는 전라남도도 적극 수용했지만 결국 지지부진하다가 중도에 대안사업으로서 사업들이 자동 폐지되고 말았건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장흥-광주간 4차로 개설’, ‘보성-장흥-목포간 철도 개설’ ‘대규모 이주단지 조성’ ‘3만평 규모의 선사문화 유적공원’ 같은 굵직한 현안들이 있었지만 이마저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던 장흥이었다.(장흥-광주 4차로 개설은 2차로 개설로, 목포-보성간 철도는 2001년에야 추진됐고, ‘3만평 규모의 선사문화 유적공원’은 3천평으로 축소해 추진되고 말았으며, 대규모 이주단지 조성은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새 기운들이 분출된다

통일기운·모성의 기운도 더해지면

그런 가운데서도 장흥은 그동안 문학고을로서, 통학의학 메카로서 입지를 다져왔고, 물 축제 개최와 편백 숲 우드랜드 치유의 숲 조성 등으로 ‘문학고을‧건강고을‧생태고을’의 이미지를 키워 나올 수 있었다.

그중 문학고을의 이미지는 과거 찬란했던 역사와 전통의 맥을 이어 온 장흥인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이요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장흥의 생태고을‧건강고을 이미지는 향후 전개될 생태문명권에서 장흥군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소중한 비전의 자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민선 8기 들어 장흥군이 정남진 전망대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통일의 시작점이 되는 장흥’으로서 비전과 ‘어머니 테마공원 완공’을 새로운 비전으로 내세우며 적극 추진하고 있다. ‘통일의 시작점으로 장흥’의 이미지 구축은 장흥에 ‘통일의 기운’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향후 ‘통일 한국’ 등 대한민국 전체의 비전에서도 장흥군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게 될 것이다.

또 ‘어머니 테마공원 조성’의 추진으로 빚어질 장흥의 ‘모성(母性)의 기운’은 지금 당장부터 한국이 맞이하고 있는 인구절벽으로 인한 위기에 대처하는 새로운 비전으로서 귀한 가치가 되면서 인구위기에 놓인 한국을 구원하는 비전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봉문 되다시피 소외돼 온 장흥 땅에도 희망의 비전이 창출되어 왔다. 이는 봉문 당했어도 결코 굴하지 않은 장흥인의 도전정신이고 과거 수차례 봉문을 당했어도 굴하지 않고 그 봉문을 이겨냈던 전통이 있어 이 봉문도 얼마든지 이겨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한국 문학고을’로서 입지, 통합의학 메카 토대를 구축해 온 ‘건강 장수고을’로서 입지, 우드랜드의 치유의 숲 등 장흥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극대화한 ‘생태고을’로서 입지가 그렇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고 분출되는 ‘문학·건강장수·생태문명의 기운’에 더해 이제는 ‘통일의 기운’이 더해지고 또 ‘모성의 기운’까지 더해지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장흥의 빛나는 밝은 비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대가 요구하는 가장 적절한 가치로서 건강한 비전이요, 틀림없이 장흥의 미래에 가장 절실한 ‘지속 가능한 장흥 비전’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장흥이 봉문을 당해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던 장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다양하고 건강한 기운들로 이해 장흥은 실로 말 그대로 길게 흥하는 땅인 복지(福地)의 장흥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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