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면 상발리 - 자래섬 바지락과 석화가 맛 좋은 상발(上鉢)마을
■용산면 상발리 - 자래섬 바지락과 석화가 맛 좋은 상발(上鉢)마을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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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1995년)만 해도 19세 이하 청소년들이 33명이고
20세 이상 60세 미만 청장년들이 60여명이나 된다.
지금은 청소년이 고작해야 초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고등학생 2명이 있을 따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상발마을, 멀리 자라섬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상발마을, 멀리 자라섬이 보인다

글-문충선/ 사진 마동욱

마을사진을 수십 년 카메라에 담아온 마동욱 선배와 상발마을회관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우리는 마을회관 벽에 걸려있는 오래된 단체사진을 보기도 하고, 액자 속 75년도 우수새마을 특별지원금(각각 50만원, 100만원) 상장에 적힌 “대통령 박정희” 이름도 구경했다. 마을사람들 얼굴 사진이 박힌 용산면 전화번호부 책자를 뒤적이던 마 선배가 누군가와 통화하더니 마을회관으로 나오시란다.

미리 약속한 이장과 마을어르신을 기다리며 용산면지(蓉山面誌, 1995년) 마을사 편 상발마을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바지락과 굴이 특산물이다. 그때(1995년)만 해도 19세 이하 청소년들이 33명이고 20세 이상 60세 미만 청장년들이 60여명이나 된다. 지금은 청소년이 고작해야 초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고등 학생 2명이 있을 따름이다.
마을 형국의 이름과 유래를 보니 “마을 안산은 87m이나 뒤에 노승봉(老僧峯 339m, 옛적에는 老德峯)이 솟아있고 능선으로 용산과 관산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예부터 구전으로 노승 밑에 명당이 있다.

하여 중바랑을 마을 터라하고 발산(鉢山)이라 불렀다. 용산면의 유일한 무인도 ‘자라섬’이 동쪽 1km 지점에 있다”고 적혀있다. 중바랑은 스님이 탁발(托鉢) 다니며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고 바리때 鉢은 절에서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말하는데, 아마도 이둘을 아우르는 의미로 鉢山이라 마을이름을 지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또한 용산면지 마을 지명에서 상발리는 “본래 장흥군 남하면의 지역으로서 발리산(군 산천) 위쪽 바깥이 되므로 상발리산, 상발 또는 외발산, 외발리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자리,

남포리, 산정리를 병합하여 상발리라 해서 남(용산)면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다.
마을 지명을 더 보니 재미있고 생각해봄직한 이야기들도 적혀 있다. ‘떡칠래 배미’-논, 상발 앞에 있는 논, 어느 부잣집의 떡을 쳐주고 얻었다 한다. ‘물묵은 고랑’-골, 쇠정골 위에 있는 골짜기, 좋은 샘물이 났으므로 나무꾼들이 이곳에서 물을 먹었다 한다.‘베틀굴’-노승산에 있는 천연 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베를 짰다하여 베짠 굴이라 한다. ‘자라섬’-자래섬, 상발 동남쪽에 있는 섬,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

그리고 마을의 중요사건으로는 동학농민혁명 때 이야기가 구전되어 적혀있다. “1894년 말경에 동학농민군 6명이 이곳을 통과하자 조 씨의 밀고로 관군이 출동하여 마을 앞 동산(촉산)에서 사살되었다 하나 후손들이 이거하고 희생자 성명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마도 갑오년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후 피신하던 농민군들이 붙잡혀 처형당한 이야기일 것이다. 당시 3만의 농민군이 결집하여 일본군과 싸운 석대들 전투였기에 장흥의 어느 마을이던 동학이야기가 없겠는가.

한편 구비전승 되고 있는 자라섬 이야기도 있다.

“옛날 삼신할머니가 치마에 흙을 담아 노두를 놓고 고흥을 건너가려다 치마에 구멍이 뚫려 흙이 쏟아진 것이 섬이 되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회관으로 나오신 김옥희(81) 할머니를 만났다. 첫눈에도 여느 시골 할머니들과는 달리 도시물(?)을 먹은 티가 난다. 손톱에는 붉은색 매니큐어를 곱게 발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여든 넘으신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인생사도 파란만장하다.

김옥희 할머니는 돌도 안 지난 갓난애기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처음 대판(오사카)에서 살다 미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규슈로 피난 가살았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닌 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부모와 함께 고향 상발마을로 돌아왔다.

“해방되고 아홉 살 돼서 마을로 돌아왔는데 너무 촌시러웠어요. 사람들이 촌시럽게 살더라고...그때는 젊은 사람도 많고 몇 백 명이 살았어요.” 호기심 많은 유년기를 일본 대도시 오사카에서 살다 돌아온 할머니의 눈에 가난하고 헐벗은 고향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을 것이다.

열다섯 옥희가 마을에서 겪은 한국전쟁을 할머니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나무를 해 때닌까 나무가 없어요. 그라지만은 우리 친정 아부지는 일본서 살다 와나서 나무 할지도 모르고. 애기들 따라 나무 하러 가서 봤어요. 노승봉 뒤에가 굴이 있어요. 그라고 반란군들이 인자 동네 댕기면서 쌀 주라, 고 추장 주라, 늘 와서 이런 데서 갖다 묵고, 반지락국도 갖다 묵고. 그 굴에다 고추장이고 묵고는 던제놓고(던져놓다), 그란께 우리가 그것을 나무 하러 가서 봤어요. 그라고 인민군들이 학교에 주둔하고 있어 학교를 못 댕겼어요. 그 당시 어머니는 생선 장수를 댕겼는디, 마을에 주둔하던 인민군들이 노트를 사다주라고 했어요.“

상발리-김성룔이장
상발리-김성룔이장

할머니가 이야기한 노승봉 굴은 마을지명에 나온 베틀굴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마을사람들이 피난 가베를 짰다는 그 천연 굴. 마을사람들을 대신하여 왜구의 노략질과 싸웠던 노승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노승봉에서는 전란(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숨고 죽어간 것이다.

이제 처녀 옥희가 시집가서 살았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옥희는 스물 둘에 이웃 마을 안양 율산으로 시집갔다. “구월달에 날 받아갖고 섣달 그믐날에 시집 갔어요, 섣달 그믐날 시집가야 살제, 글 안하면 못산대, 설날. 시아제들이 신랑을 장가 보낼라닌까는, 어디가 처녀가 존 놈이 있다고 그랬든가는 무조건 와갖고는, 아 시어머니조차 와갖고는 결혼 날짜를 잡았는디, 결혼 날짜가 없어갖고는 섣닫 그믐에...율산은 부자여, 그집까 부자고 우리는 가난했어요.”

결혼해서 시장은 주로 관산장과 장흥장을 걸어서 다녔다. “남하 돌다리 건너서 포곡 자푸치 넘어서 장흥장에 간디, 질도 사납고 사나운디...큰 고기를 잡어갖고 내가 애기 업고 따라간디, 자푸치를 넘어 간디 다리가 아퍼서...아니 율산서 살띡에 하도 이쁘고 많에서 병아리를 팔러 갔더니 (사람들이) 물어 보도 안 해서 그 뒤로는 장에 가서 뭘 폴들 안 해요. 그란께 여그 관산장엘 갔는디 ‘상발 반지락이요, 사세요.’ 그라믄 ‘상발 사람 아님만은’ 이쁜 여자가 거짓말 한다고 그냥 가고...그라고는 생전 장에 뭘 폴러 안 가요.“

논에 못자리 일을 하고 늦게 온 김성용(47) 이장이 웃으며 끼어든다. ”물건은 맞는디 사람이 아니란 말이여.“할머니는 율산에서 이렇게 시집살이를 하다가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살며 딸 넷을 키워 분가해 놓고 20여 년 전 다시 고향 상발마을에 집을 지어정착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당신 집으로 초대해서 오래된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풋풋한 신랑신부 결혼사진도 있고, 1965년

설날 젊은 여인들이 한복을 입고 찍은 단체사진도 보인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저 여인들 속에 이쁜 옥희 씨도 있을 것이다.
김성용 이장은 장흥문화원 위종만 사무국장과 용산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요즘 보기 드물게 아들을 셋이나 둔 김 이장은 농사지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고향에서 산지 26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아주 젊은 이장으로 7년 이장을 하다가 2년 쉬고 다시 이장을 맡아 마을일을 할 정도로 의욕과 패기가 넘쳐보였다.

김옥희 할머니
김옥희 할머니

 

김 이장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예전에는 상발에 배가 50척 가까이 있었다. 지금은 딱 배 3척 남았다.
우리 집에도 배는 남아 있지만 아버님 작고하시고 혼자 할 수 없어 반지락하고 석화 양식만 하고 있다.

상발 석화는 남포와 달리 크기는 작지만 맛과 향이 좋다. 반지락은 가격이 조금 비싼 대신에 드셔보고 나서 인정을 한다. 예전에는 반지락이 많았는데 양이 점점 줄어간다. 예전에는 참꼬막 자연산이 7-10년 주기로 왔었다. 97년도 어촌계장을 할 때 한 번 딱 왔었다. 동네에서 상당히 재미를 봤다. 그런데 지금 15년 이상 되었는데 전혀 자연산이 없다. 양식을 하는데 투자비가 많아 그 만큼 소득을 못 올리고 있다.

마을 앞 자라섬 주변이 다 양식장이다.“마을이장의 고충을 물었다. 기자도 장흥읍 송산마을에서 2년 이장을 한 경험이 있는 터라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르신들 모시고 모든 정보 오픈하고 해야 될 일 설명 드리면 다 동의해 주신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동의를 얻어 일을 해 나간다. 하지만 타지에서 귀촌하신 분들과는 의견이나 생각 차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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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발리 마을 사람들

 

우리는 수십 년 수백 년 선대부터 마을을 지키고 살아오면서, 하다못해 길을 내더라도 내가 이용하고 주민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양보해서 길을 넓힌다. 그분들이 어느 날 자기 땅이라고 사갖고 들어오다 보닌까 그런 부분에 마찰이 많이 생긴다.”

지금 귀농, 귀촌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마을마다 원주민과 귀농인의 이러한 미묘한 갈등이 형성되고 있다. 귀농인의 이야기도 들어보아야겠지만 삶의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일 것이다. 바깥에서 누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지라 조정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을이장의 에너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용 이장 같은 민주적인 리더쉽과 소통능력이라면 능히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야기를 나누며 상발마을에 다시 자연산 참꼬막이 밀려와 주민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고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와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이장이 숙원사업으로 이야기한 마을저수지 둑을 높이는 일이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어 농업용수 걱정 없는 상발마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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