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부춘정 개요
○ 소재지: 장흥군 부산면 부춘길79 (부춘리 365번지)
○ 문화재 지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67호, 광주․전남 8정자
○ 연혁
문희개(1550~1610)의 부친 문위천(1529~1593)이 1560년 7개 마을 여울물이 깎아진 절벽을 감도는 위치에 정자를 짓고 정자이름을 청영정(淸潁亭)이라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부춘정으로 정자 이름을 바꿨으며, 정자 앞산에 문희개가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날마다 임금님이 계산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는 망군대비가 있다.
정자아래 강변바위에는 용호(龍湖)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김길통(1408~1473) 전라도관찰사가 이곳 춘정마을을 자주 찾아와 산수풍경을 즐겼기 때문에 후손 김기성(1801~1869)은 김기헌, 김기형, 김기석 등 문중의 어른들과 상의하고 1838년 남평문씨춘정공파 집안에서 매입하여 청풍김씨 소유가 되었다.
부춘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했고 중앙에 온돌방을 들이고 사방을 둘러 마루를 앉혔으며 대청을 두고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기둥은 방 주위로만 각주를 썼고, 나머지는 원주를 사용했다.
내부에는 부춘정, 제일강산, 백세청풍, 풍영루라는 현판이 있으며, 부춘사 창건지(識), 부춘정 기(記)을 비롯한 33개 편액이 걸려있다.
부춘정 관련유적
○ 부춘사(富春祠)
1838년에 제실의 옛날 지붕을 수리하고 청풍김씨 중시조 김대유를 중앙에 배치하고, 월산군 김길통은 소위(昭位)인 좌측애, 예조참판 김순명은 목위(穆位)인 우측에 배열하고 봄과 가을에 향사(鄕祀)했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당하여 1899년 위폐를 복설하고 매년 음력 9월 6일 후손들이 청풍김씨 중시조와 선조 8현을 배향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부춘원(富春院) 건물(강당, 동재, 서재, 사당, 제실, 제기 창고, 사당으로 가는 문과 담장)은 원래 남평문씨 소유였는데, 1838년에 청풍김씨 문중에서 구입하고 중수해서 ‘부춘사’라는 현판을 걸었고 강당은 1840년 사당 아래에 중건했다.
○ 망군대비(望君臺碑)
부춘정 앞산에「통훈대부 고창현감 문희개 망군대비」가 자리 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 고창현감 문희개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날마다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절을 했던 곳에 비석을 세웠으나 마모되어 비문을 식별할 수 없어 다시 세웠다.
필자가 부산면장으로 재직할 때 부춘정 앞에 다음과 같은 홍보판을 설치했다.
○ 망군대(望君臺)
문희개(文希凱 1550~1610)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청영정(淸穎亭)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숙부(叔父) 풍암공(楓菴公) 문위세(文緯世 1534~1600)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참획한 전공으로 고창현감이 되었다.
문희개가 정유재란 이후 낙향하여 임금님을 생각하면서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였다는 ‘망군대’의 사실을 알고 임금이 비석문 글씨를 내려 보내 후손 문상질(文尙質)이 비석을 세웠으나 풍화작용으로 비문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어 그 옆에 1975년 문재성(文在晟)이 글을 지어 비석을 다시 세웠다.
2018. 12.
부산면장
부춘정은 본래 청영정이였다.
청영정은 1560년에 문위천이 장흥군 부산면 춘정마을 강변절벽에 건립했다.
문위천은 중국 요나라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러준다는 말을 들은 허유가 영천강에서 귀를 싣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이 청렴하게 살았다는 교훈적인 도교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그의 탐욕없는 삶의 태도로 삼고자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중국 영천강의 강 이름 영(潁)자를 넣어 청영정(淸潁亭)이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암 문위세는 큰형 문위천과 중형 문위지와 함께 그 당시 ‘청영정(현재 부춘정)’에 모여 그 당시 시국에 대해 언급하고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자료출처: 풍암 문위세 유고집 3권 (1759년, 1819년 간행)
왜『부춘정』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1560년에 창정된 ‘청영정’이 언젠가 ‘부춘정’으로 정자 이름이 바꿔졌을까? ‘부춘’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나라 때 엄자릉과 관련이 있다.
엄자릉이 중국 부춘산 칠리탄에 숨어살면서 밭 갈고 낚시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낚시하던 곳을 사람들은 엄릉뢰(嚴陵瀨)라 불렀다.
중국 후한 시대에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초야에서 공부하던 시절, 동문수학했던 친구 엄광(嚴光)을 찾아갔다.
엄광은 황제를 대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황제가 내린 높은 벼슬도 마다한 채 낚시로 평생을 보낸 곳이 중국 절강성 부양현 부춘향에 있는 부춘산 앞으로 흐르는 동강(桐江)이다.
어쩌면 이곳 장흥군 부산면 부춘리 춘정마을 전경이 중국 부춘산과 같다고 하여 많은 시인과 묵객이 찾아와 언젠가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국은 잉어가 물에서 노는 형국이라 한다.
부춘정 암각문
○ ‘부춘동(富春洞)’글자는 정자 아래 암반 지면에 음각되어 있는데
‘부춘’이란 지명은 본래 중국 한나라 때 엄자릉과 관련된 지명이다.
○ 정자 아래 암반에 ‘부춘고탄 청풍세가(富春古灘 淸風世家)좌측에 작은 글씨로 송석 송기로(松石 宋綺老)’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엄자릉의 중국 부춘산 칠리탄에 염두를 두고 ‘송석’이란 호를 가진 장흥부사 송기로(1830~1898)가 새긴 글이다.
○ 부춘정 앞 강변에는 ‘용호(龍湖)’라고 새겨진 바위에 ‘칠리평탄(七里平灘) 일사청풍(一絲淸風)’ 이라는 글씨를 새겨 ‘7개 마을 펑퍼짐한 여울에 한 가닥 맑은 바람’ 이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 용호(龍湖)라는 암각문 좌측 하단에 작은 글씨로 ‘동강(桐江)’이라 새겨져 있다. 중국 부춘산 아래 칠리탄이 있으며 칠리탄을 동강이라 부른다.
○ 용호(龍湖) 암각문 우측에 큰 글씨로 새겨진 ‘동강처사 김공지려(桐江處士 金公之慮)’는 청풍김씨 후손들이 김기성의 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기성은 스스로 ‘동강처사’라 했다.
○ 조선말기 문인 송병선(1836~1905)이 1898년 3월에 찾아와 춘정마을에서 10일간 머무르면서 친필로 부춘정자 앞 바위에 ‘삼공불환 차강산(三公不換 此江山)’ 이라 7자를 새겼다.
참고로 ‘삼공불환 차강산’은 송나라 시인 대복고(戴復古)가 엄자릉의 마음을 읊은 낚시 이야기(조대釣臺)라는 다음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세상사 무심하여 낚싯대 하나면 그만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인들 이 강산과 바꾸랴
평생 황제인 유문숙(광무제) 그대를 잘못 알아서
헛된 이름만 세간에 가득하게 하였네
○ ‘삼공불환 차강산’이라 새겨진 바위 좌측에 ‘고금~(古今~)’이란 두 글자만 보일 뿐이며, 그 아래 두 줄의 글자는 알아볼 수 없도록 지금도 시멘트로 콘크리트 되어 덮여져 있다.
송병순(1839~1912)이 형님 송병선과 함께 부춘정을 방문했을 때 ‘옛날에는 엄처사(엄자릉)가 있었는데, 지금은 김처사(김기성)가 있네.’ 라는 의미로 ‘고유 엄처사 금유 김처사(古有嚴處士 今有金處士)라 새긴 글자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