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 새소리에 침묵으로 답하며
장흥한담 - 새소리에 침묵으로 답하며
  • 장흥투데이
  • 승인 2023.02.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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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 수필가

투우사와 싸우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며 쉬는 곳을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한다. 자신만의 피난처 또는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사는 케렌시아에서 쉬고 있는 소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케렌시아는 투우장 어디에도 정해진 공간은 없다. 소는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간섭받지 않을 장소를 찾는다. 피범벅이 된 소가 어디론가 달려갈 때 투우사는 지나가도록 통과시킨다. 잠시 숨을 고르는 곳으로 달려가는 소도 투우사를 공격하지 않고 간섭이 없는 편안한 케렌시아로 간다.

그렇다면 일상에 지친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그곳은 고요와 침묵이 공존하는 숲이다. 숲은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정신건강을 회복시킨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면역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또한 숲은 인지적 회복과 허기진 정서를 충전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높인다. 이것이 내가 숲을 찾는 이유다.

2월 숲은 고요함이 있어서 좋다.

겨울을 보듬고 있는 숲에서 어린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좋다. 숲에서는 언어를 내려놓고 귀 기울어야 한다. 2월 숲은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물이 맺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이 숲이 깨어나는 숭엄한 시간이다. 숲길을 걸으며 벌거벗은 나무를 바라본다. 가느다란 햇살이 헐벗은 나무를 비집고 들어와 다독이고 있다. 저 자리가 봄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꽃이 피고 지는 생명의 자리다. 그동안 이곳에서 만나본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삶이란, 소소했고 좌절을 이겨내는 모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2월의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투영된 풍경은 아닐까?

호젓한 2월 숲을 본능적으로 자주 찾는다.

혼자 가는 휴식처이다. 숲 속 어느 곳에 덩그러니 놓여 마삭줄에 휘감긴 이끼 낀 바위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엄전한 곳이다. 이 자리는 맑은 바람이 슬그머니 다가와 주고, 실핏줄 같은 햇살이 무심히 안아주곤 할 때 나는 안온安穩 함을 느낀다. 그곳에서 눈을 감으면 숲이 전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숲의 고요와 침묵에 들숨과 날숨을 맞추면, 벌거벗은 나뭇가지 끝에 몰려든 삶의 흔적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는 하늘에 대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고, 펑펑 눈물을 쏟을 수 있는 단순한 행동이 허락되는 곳이다. 이 자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에 비움의 시간도 함께한다. 위태로우면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어린 나뭇가지의 지혜로움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고, 차가운 삶에 온기를 채우는 나의 케렌시아이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옆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오동나무를 안아보거나 등을 기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귀를 대고 나무의 숨넘어가는 소리를 듣곤 했다. 주변은 벌레 먹은 낙엽이 흥건히 쌓였고, 살기 위해 많은 가지를 떨군 삭정이만 나뒹굴던 자리로 햇살이 오랫동안 머물곤 하더니 어느 날부터 주변이 심상치 않다. 유약하기만 하던 오동나무가 듬직해 보이기 시작했다. 고단했을 나무가 봄이 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힘들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위로받지 못해서 죽는다고 한다.” 시름시름 앓던 나무가 햇살의 위로를 받고, 저문 해를 향해 가지를 뒤틀고 있는 모습에서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라고 노래한 이생진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상처 없는 나무가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고, 상처 없는 사람에게서는 곰삭은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상처가 꼭 아픔만은 아닌 것 같다.

2월 숲은 해깝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눈 쌓인 겨울 숲이 황홀하다. 나는 휘청이는 대숲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좋아한다. 푸른 대나무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흰 눈의 모습에서 겨울의 장엄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사그락거리며 댓잎 비벼대는 소리는 얼룩진 마음을 씻겨주는 소리이고, 환희의 심포니로 새봄의 서곡이다. 오래전,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새벽, 뒤켵 대밭에서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꼭 어젯밤에 들었던 것처럼 생생한 소리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귓전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자연의 소리이고 기품 있는 기억의 풍경이다.

고통의 고비를 견뎌낸 2월 꽃들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분주하다.

2월 꽃은 혹독한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겨우내 꽃눈을 붙들고 당당히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느 계절에 핀 꽃보다 더 화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한다는 간절한 자존감이 아닐까. 나는 2월 꽃이 고단한 이야기를 토할 때 여백의 숲으로 들어가 상처가 많은 아픈 나무를 안아 볼 것이다. 비록 헐벗어 숨죽이고 있지만, 언제든지 찾아가 잠시 숨을 고르며 위안을 얻는 나만의 성소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숲길에서 걸음을 멈추고 벌레 먹은 낙엽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때 먼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침묵으로 답하며, 구멍 뚫린 낙엽에서 마음 꽃 하나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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