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아, 예양강①
신년기획 / 아, 예양강①
  • 김선욱
  • 승인 2023.03.0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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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양강(汭陽江), 정녕 잊혀져 버릴 것인가(상)

강수의/전 장흥문화원장

• 이 글은 강수의 전 장흥문화원정이 쓴 글로, 강수의 선생의 유고집『향토학 백년 현장에서』(pp 196-208)에 실린 글이다. 예양강에 대한 선생의 애정이 잘 드러난 글이다. 2회에 거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 팔경, 예강어화[汭江漁火]

장흥댐이 한창 공사를 하던 무렵, 나는 몇 가지 제안을 관계 기관에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신문에도 썼고 각종 문화지를 통해서도 그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탐진댐이라는 명칭 대신 장흥댐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 탐진강은 장흥 유치, 영암, 강진 작천과 병영 등에서 발원한 여러 줄기가 합해진 강이름이며, 댐이 들어설 지역의 강이름은 “예양강(汭陽江)” 또는 “수령천(遂寧川)”이라 했다는 기록이 지금부터 530년 전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1481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예양강은 잊혀져 가고 있다. 아니다. 잊어버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장흥 팔경 가운데 하나로 “예양강의 고기잡이 불빛[汭江漁火]”이 있다. 팔경이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 경관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다. 이미 장흥사람들에게는 예양강과 그곳의 고기잡이는 생활 현장이자 문화경관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기잡이는 분명 예양강의 명물 특산인 은어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얼마 전 열렸던 ‘탐진강 은어축제’, 그 중심 공간은 우리 장흥이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 물론 그 행사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수백억이 들어가는 탐진강 자연형하천정비사업, 지금 꼭 해야 하는가 짚어 볼 일이다. 또한 정비사업이 마무리되기 전에 예양강의 원래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
현대의 사회개발은 전통의 단절을 낳는다. 장흥 팔경중 “예강어화”는 강이름도 잊혀졌고 인위적 개발에 채이고, “사자귀운”은 아파트 등 현대건축물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정비사업이 끝나기 전에 예양강의 이름 찾기 사업을 시작하자. 강명 개정운동을 벌여 보자.

 

“장흥의 찬가”는 예양강, “장흥군민의 노래”는 탐진강

또 하나 있다. 장흥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로 “장흥군민의 노래”와 “장흥의 찬가”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하나는 “예양강”, 하나는 “탐진강“으로 표기하고 있어 혼란스럽다.

o 장흥의 찬가(2절) : 보림사의 종소리가 녹차 밭에 맴을 돌면 예양강 그대가슴에 물새같은 배 띄우네

o 장흥군민의 노래(2절) : 탐진강 산을 스쳐 들을 누비니 강산도 아름답고 인심도 곱네

장흥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어떡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어 다시 붓을 들었다. 또 삼비산 꼴이 되어버린 다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엄연한 이름이 있음에도 늑장부리다 다른 지역에 덜미를 잡혀 버린, 그리고 나서야 떠들어 대는, 그것도 반짝 떠들다 마는.... 삼비산... 그러나 이제는 이래서는 안 된다.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다. 근거 있는, 역사문화를 담고 있는, 우리 장흥인의 생활 속에, 정신 속에 깊이 스며있는 문화자원을 찾아서 이어 가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탐진댐자연형하천정화사업”은 명칭부터 제고해 볼 일이다. 이미 인공화가 많이 되어 버린 자연자원을 다시 수만금의 돈을 들여 복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어쩌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과 말이 전도되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 나만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530여 년 전의 국가기록상의 예양강과 수령천

탐진강과 예양강, 어느 것이 먼저이고 선조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먼저 예양강에 대한 기록과 그에 대한 인식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국가에서 펴내는 관찬(官撰)의 사서에 전하는 것으로는 <동국여지승람>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1481년에 편찬하여 1530년에 보완편을 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나라(동국)안의 뛰어난 경승지를 수레를 타고 둘러본다는 뜻이 있다. 오늘날로 치자면 각 시군별 향토지를 한꺼번에 엮어 놓은 책이다. 인물과 시문, 기문 등에 대한 것도 많이 담고 있어 인문 지리적인 내용이 많다. 조선시대의 지역 이해에 둘도 없이 귀중한 책이다.

이 책의 제37권 전라도(全羅道)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산천조를 보면 다음의 기록이 있다.

o 예양강(汭陽江) : (장흥)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o 수령천(遂寧川) :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迦智山)에서 나와 (장흥)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省巖)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간략한 기록이지만 수령천과 예양강의 역사성을 담고 있다. 발원지도 가지산임을 밝히고 있고 장흥도호부의 치소인 읍성을 감고 돌아 성암에 이르러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탐진강의 기록은 없다. 수령천은 고려시대 말기까지 장흥읍 일원에 있었던 고을이다. 이 수령현은 그 백제시대에는 고마미지현, 통일신라시대에는 마읍현이라 했다. 강이름의 오랜 연원을 말해 주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뚜렷이 기록된 예양강

지도를 살펴보자. 지금은 <조선후기 지방지도>라 하여 축소 영인본이 나왔는데, 1872년경 국가에서 만든 지도로 현재 규장각 소장된 채색 지도가 있다. 이 지도 가운데 전라도 장흥도호부의 지도를 보면, 예양강이라 뚜렷이 기록에 남아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평생에 걸쳐 전국을 답사하여 그렸다는 대동여지도와 청구도에도 역시 예양강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동교와 계정교가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1872년)에 국가에서 제작한 장흥도호부 지도(부분)상의 예양강(우측 중하단부)과 장흥읍성,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동교와 계정교가 보인다.
대동여지도(김정호)의 예양강
청구도(김정호)의 예양강

 

예양강엔 흰 마름꽃이 피었도다

그렇다면 민간의 사찬 기록은 어떤가.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에서 예양강이라는 지명은 많이 찾아진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

학자로서 너무 잘 알려진 분이다. 그의 문집에 장흥에 관한 시가 있는데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양강도 표기 되고 있다. “호남의 이 절도사[계동]가 관산 동정에 대한 네 수의 시를 부쳐 보여 주면서 화답하기를 요청하다(湖南李節度使 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라는 제목의 24구 오언율시인데, 몇 구절만 골라 옮겨 보자. 청정한 자연과 며느리 바위에 솟아 오르는 아침 해, 흰 마름 꽃이 핀 예양강... 자연형 하천정화가 따로 필요 없는 정경이다. 생약초 사업을 한다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자연의 모습이 있겠는가.

山川無限好 산과 냇물은 한없이 좋거니와

花月爲誰姸 꽃과 달은 누구를 위해 고운고

婦巖紅日側 부암엔 아침 해가 비스듬히 비추고

汭水白蘋開 예양강엔 흰 마름꽃이 피었도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와 헤어지면서 시를 남긴다.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시의 제목은 “汭陽江東亭 留別慶會”이다. 14구의 칠언율시인데 다섯 번째 구절이 “예양강물 유리처럼 푸르구나(汭陽江水琉璃碧)”이다. 절경을 노래하면서 그 푸르른 경관을 나타낸 것이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추강 남효온의 예양강 시

 

남추강은 장흥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바로 조대의 기문(釣臺記)이다. 장흥의 지리를 개괄하면서 당시 교유한 인물들과의 일정을 적고 있다. 그 시기는 1491년(성종 22) 3월 초이다. 함께 한 사람은 윤경회(尹慶會), 이침(李琛), 김세언(金世彦), 김양좌(金良佐), 이세회(李世薈), 박의손(朴義孫), 최석이(崔石伊)등이었다. 이 기문에서도 첫 대목에 수령천과 예양강이 나온다. 앞의 시는 조대에서 교유하고 난 뒤 헤어지면서 같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조대기>를 옮겨 본다.

수령천은 가지산으로부터 나온다. 장흥부 북쪽으로 수리 거리에서 흘러 돌아서 동쪽으로 흐른다. 동정(東亭)을 지나 예양강이 된다. 강은 흘러 또 남으로 내려간다. 성에서 7-8리 거리 독실[獨谷]의 서쪽 기슭에 이르면 강물을 굽어다 볼만한 곳에 기묘한 바위[奇岩]가 있다. 그 바위 위에는 사람이 삼십여명 정도 앉아 놀 수 있으며 맑고 잔잔한 물결이 돌아 흐르고 괴상하게 생긴 바위들은 곁에 서있고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도 그 곁에 섞여 있었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작두산(鐯頭山)이 있고 서쪽을 보면 수인산(修因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인암(舍人岩)을 대하고 있고 바위 뒤로는 만덕산(萬德山)이 그 봉우리를 노출하고 있으니 참으로 절경(絶境)을 이루고 있다.

홍치 사년(弘治 四年, 성종 22년, 1491년) 음력 삼월 초순경 나는 장흥 별관(別館)에서 우거하고 있으면서 날마다 향중(鄕中)의 선비[士人]들과 장난도 하고 즐겁게 놀았다.

당시에 윤선생 구(尹遘)라는 분이 있었는데 자(字)는 경회(慶會)이다.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그만두고부터 방랑하다가 이곳 장흥읍성(城)밖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이선생 침(李琛)은 자(字)가 가진(可珍)이라 하였다. 함열현감(咸悅懸監)을 그만두고부터 모친상을 당하자 상기[服]를 마치고 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흥에 성(城)의 북쪽에서 살았다.

추강 남효온선생의 조대기(<추강선생문집> 권4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제16책 84면)

 

하루는 윤씨와 이씨 두분 선생이 고기잡는 도구[釣漁具]를 준비해 가지고 나를 남쪽 강변으로 맞이하여 그 바위(奇岩)에 올라가니 위와 아래로 큰 바위가 셋이나 있었다. 풀을 베어서 구덩이로 집어넣고 이중으로 풀자리를 설치한 다음 황어(黃魚)와 잉어(鯉魚)를 낚아서 혹은 굽고 혹은 회를 만들어서 작은 술잔 돌리면서 청아한 이야기[淸談]를 나누었다.

이때 한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김세언(金世彦)의 자는 자미(子美)인데 본고을 부사[俯伯]의 맏 아들이었으며 다음 김양좌(金良佐)의 자는 인재(隣哉)인데 부사의 사위다. 다음은 이세회(李世薈)라고 하는데 자는 울지(蔚之)이며 윤경회(尹慶會)의 사위다.

그리고 시골 노인[野老] 두 분이었는데 하얀 눈썹이 기이하게 생긴데다가 의관(衣冠)은 시골 민간인 의관을 갖추었고 그 가운데 한분은 성명이 박의손(朴義孫)이라 했으며 또 한분은 최석이(崔石伊)라고 했다. 이 두 노인도 역시 윤씨와 이씨 두 선생을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술을 대여섯순배 돌리고 나니 해는 지고 달이 떠올랐으며 바람이 일자 물결이 치기 시작했으며 의손(義孫) 노인은 일어나 춤을 추었고 석이(石伊)노인은 창가(唱歌)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자 두 선생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들 여기에서 놀기로 한지가 오래였지만 이 지역에 이러한 기암(奇岩)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하며 어찌 서로 시골노인들과 합해서 대(臺)를 한번 쌓아 놀고 영구(永久)히 전할 수 있게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두 노인은 절을 하며 이르기를 오직 명령만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므로 두 선생이 다 말하기를 오늘의 즐거움은 고기를 낚은 것이 제일 좋은 일이었으니 그 대(臺)이름을 조대(釣臺)라고 한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천지의 가운데에서 타고난 것은 동일한 그 생명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이 생장하는 것도 타고난 생명들은 동일하게 그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한 곳으로 쫓아가고 위태로운 곳을 피하며 생(生) 즐거워하고 사(死)를 싫어한 것은 사람이나 미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고기를 보면 잡아먹고 고기가 사람 앞에 나타날 때마다 삶아 먹는다면 고기의 걱정거리고 나의 즐거움을 삼아야 되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처음 나뉘어 지고 만물이 머물게 되었으며 이미 머물게 된 다음에 생기를 받게 되었고 생기를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쓸모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쓸모가 있다는 것은 수용(需用)을 뜻하는 것이니 수(需)라는 것은 먹고 사는[飮食] 길[道]을 말한다. 기왕에 음식(飮食)의 도가 정해져 있다면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게 되는 것도 이치라고 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는 그물을 만들었고 우왕[大禹]은 생선을 먹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순(舜)임금도 뇌택(雷澤)에 가서 고기를 잡았으며 공자(孔子)도 비록 그물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낚시질 만큼은 멈추지 않았으며 맹자(孟子)도 왕도(王道)를 논하면서 또한 이르기를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이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송나라 때 와서 소옹[邵子]은 어부와 초부(漁樵)가 묻고 답하면서 해가 다하도록 시비(是非)를 논하다가 마침내는 섭을 꺾어 고기를 삶아서 먹고 역(易)을 논했다고 하였으니 고기를 낚는 즐거움도 믿음이 가는 말이라 하겠다. 하물며 고기[魚]는 우리에게 먹히고 우리는 조물(造物)주에게 먹히게 되는데 우리가 조물주에 먹히면서 즐거움을 주게 됨을 안다면 또한 고기도 우리에 먹히게 됨이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조(釣)자를 써가지고 그 명칭을 하여 높이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記)를 다 쓰고 나서 나는 또 그 두분 선생께 설명을 드리며 이르기를 옛적에 엄자릉(嚴子陵)은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 가서 낚시질을 했기에 그가 앉았던 곳을 이름하여 조대(釣臺)라 했다고 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고 이르기를 이때와 그때의 명칭은 같지만 취지는 다르다고 여겨졌다. 대개 그 엄자릉(嚴子陵)의 큰 지조는 백세뒤에 널리 전해오면서 일월(日月)과 함께 빛나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임금과 신하의 의를 끊고 즐거운 마음으로 풀과 나무[草木]가 함께 썩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은 아마도 공자께서 말씀하였듯이 등용되면 자기의 뜻을 시행하고 놔둬버리면 은둔해야 한다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된다.

만일에 그 윤경회(尹慶會)와 같은 분은 나와함께 머리 싸매고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그분의 학식이 관대하고 엄정하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다. 그리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재능과 지혜가 원대(遠代)하며 국정에 참여하여 쓰일만한 인재로서 참으로 보배로운 존재이다. 행실은 효(孝)와 청렴[廉]을 겸비했고 재질은 문(文)과 무(武)를 겸하였으며 일찍이 선정(善政)으로써 함열(咸悅) 지역을 다스렸기에 그 명성과 공적도 나타나있다.

두 분 선생은 참으로 자잘하게 절의나 숭상하고 고고함을 양성하며 시가나 읊조리고 날을 보내는 무리들과 견줄 바가 아니며 이른바 토야[江湖]의 먼 곳에 처하면서도 그 임금과 국가를 걱정하는 분이었다. 뒷날에 천은(天恩)이 항간에 미치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부르는 문서[鶴書]를 가지고 이 조대로 달려 오면은 두 분 선생은 반드시 짚신을 벗어 던지고 낚시줄도 걷어 치우고 그 낚시질 하던 솜씨를 바꾸어서 임금을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리니 어찌 변통성 없는 엄자릉에 비교하랴!

곧 바로 강태공[太公]의 조황(釣璜)과 함께 의당 서로 천년[千載]의 세월을 두고 선후를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양강(汭陽江)의 조대(釣臺)도 후세 사람들이 위수(渭水, 강태공 낚시터)가에 있는 조대와 같이 명소라 지적할 것이니 필연코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기대하노니 그대들은 여기에 힘쓰기 바라노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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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치 사년(弘治 四年) : 조선 성종 22[1491], 홍치는 중국 명나라 효종[1488-1505]의 연호.

2) 嚴子陵 : 후한(後漢)의 여조(餘兆)사람. ()는 자릉(子陵). 어릴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변성명하고 숨어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隱居)하였음. 후세에 사람들이 그의 낚시질 하던 곳을 일러 엄릉뢰(嚴陵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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