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장흥(5) 장흥의 시인(詩人), 새로 발굴 - “임극충(任克忠)-위대한 시인”(上)
다시 읽고 새로 쓰는 장흥(5) 장흥의 시인(詩人), 새로 발굴 - “임극충(任克忠)-위대한 시인”(上)
  • 김선욱
  • 승인 2023.03.2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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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친부는 유명 재상, 누이는 공예태후, 장손 임규任奎는 유명한 시인이었다”

『동문선』에 칠언율시 등 3편 수록, 장흥인으로 『동문선』 게재 시로는 최초

조선조에 널리 회자- 『보한집』 『신증동국…』 등 여러 사서‧시문집에 소개

 

 

 

 

 

 

 

 

 

 

 

 

 

 

 

 

 

 

 

 

 

 

 

 

 

 

 

장흥임씨 시조는 고려 때 상서공부원외랑을 지낸 임호(任顥)이다. 그의 아들 임의(任懿, 1041∼1117)는 검교태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임의의 아들 임원후(任元厚, 1089∼1156))는 문하시중을 지냈는데, 그의 딸은 인종비(仁宗妃) 공예태후(恭睿太后)다.

조부(祖父), 친부(親父)는 재상이었고, 누이는 공예태후였으며, 임의의 장손이요 임원후의 장자인 임극충(任克忠)은 유명한 시인(詩人)이었다. 임극충이 평장사로서 고급관리였지만 시인(詩人)으로 명성을 날린 고려조에 유명한 시인이었음을 새롭게 발굴, 확인하였다.

임원후에게는 극충(任克忠, 任奎)·극정(克正)·부(溥)·유(濡)·항(沆) 등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고려조에 현달했다. 장남 임극충(任克忠)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풍채가 웅장하고 식견이 있었다. 차남 임극정(克正)은 호부상서로 있을 때 정서(鄭敍)의 사건(의종 아우인 대녕후 경大寧侯 경璟과 결탁하였다는 사건)에 연루되어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강직되었다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이동된 후에 죽었다. 3남 임부(任溥)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글을 잘 하였다. 부친 원후가 죽은 후 의종이 외척의 권력을 억압하느라고 태후를 몹시 박대하여 외척의 한 사람이던 그는 나이 20세가 되었음에도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명종이 즉위한 후 예빈주부(禮賓主溥)로 임명받았고 후에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승직되었지만, 곧 이를 사직하고 과거를 보아 급제한 후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이부시랑(吏部侍郎)으로 재임하다 죽으니 이부상서 한림학사 관직을 추증받았다. 그는 외모와 태도가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특히 산천 유람을 즐겼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선(神仙)’이라고 하였다. 4남 임유(任濡)는 평장사 되었을 정도로 5형제 중 가장 위명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5남 임항(任沆)은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지었다. 얼굴이 맑고 준수하여 귀염성이 있었으며, 사람을 얕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부시랑에까지 이르렀다. 일찍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당시 금나라의 주객시랑(主客侍郞)으로 유명했던 이양(李陽이 임항의 사람됨을 사랑하여 대단히 관대히 대했다고 한다.

이상은 고려 중기의 명신이던 임의(任懿, 1041∼1117)의 ‘열전(列傳)’에 ‘임의 부가(附加) 기록’으로 출전되는 임의 손자들에 대한 대강의 기록으로 열전에 출전되는 내용이다. (『고려사』 권 제95 >'열전 제8'>‘임의任懿’)

임극충- 외척의 어진이로 유명

이들 5형제 중 문리(文理)에 가장 밝아 유명한 시인(詩人)이 된 인물은 장남인 임극충(任克忠, ?∼ 1171)이었다. 그는 외척 재상가의 장자이었음에도 학덕을 갖추어 ‘명신(名臣)’ 칭송을 들었던 인물이었다. 어진 성품에 품행이 방정(方正)하고 신중해, “외척의 어진 이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外戚之賢無出其右”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 인물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임극충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성인이 된 후 개명한 ‘임규(任奎)’라는 이름이었다.

이 임규(任奎)의 이름으로 『동선문』에 시 3편이 출전, 임규(임극충)가 당대 대단한 시인이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 등 모든 사서(史書)에는 어김없이 임규의 관직명이던 임극충(任克忠)으로만 나온다. 다만, 『동문선』를 비롯 『동문선』 이후 여러 시문이 담긴 조선조 사서 등에서만 임극충이 아닌 임규(任奎)로 출전, ‘임극충=임규’인지, ‘임극충=시인’이었는지에 대해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 연유로 아직까지 누구도 임극충이 시인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임극충 사후 50여 년 후에 태어난 당대 유명한 문신이었던 최자(崔滋, 1188∼1260)가 1254년에 편찬한 『보한집(補閑集)』에서 ‘임극충의 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최자는 굳이 임극충이 임규라고 밝힌 것은 아니다. 다만 최자는 당연히 ‘임극충=임규’였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임극충의 별명은 임규였다’고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후에 조선조에서 『동문선』을 엮은 편집자들이 ‘임규’라는 임극충의 별명으로 임충의 시를 게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굳이 이 두 사람의 시를 제대로 비교해보지 않는 한은 ‘『동문선』의 임규의 시= 『보한집』 임극충의 시’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대체적으로 관인(官人)으로서는 임극충(任克忠)이었지만 시인(詩人)으로서는 임규(任奎)가 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문선』 이후의 모든 곳에서 임규의 시로 소개되고 있는 점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선 『동문선』에 출전되는 임규(任奎)의 시 ①‘병으로 휴가 얻어…得病告暫’ ②‘과연복정(過延福亭)’ ③‘강촌야흥(江村夜興)’ 등 3편을 살펴보자.

① 병으로 휴가 얻어 잠깐 강촌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며 말 위에서

[得病告暫往江村還京馬上]/임규(任奎)

得病告。暫往江村。還京馬上。[任奎] : 萬事悠悠一夢塲。自憐身世未全忘。少而寡合多踈放。老不求名可退藏。書室舊開師子嶺。釣臺新占少華岡。國恩未報親猶在。更踏紅塵跡似忙。

인간 만사가 이럭저럭 한바탕 꿈 / 萬事悠悠一夢場

내 어이 몸과 세상 온통 잊지 못하는가 / 自憐身世未全忘

젊어선 남과 맞지 않음은 소방한 까닭이요 / 少而寡合多疏放

늙어 이름 안 구하니 물러가 숨을 만하네 / 老不求名可退藏

서실은 전부터 사자령에 마련했었고 / 書室舊開師子嶺

낚시터 새로 소화강에 차렸건만 / 釣臺新占少華岡

나라 은혜 못 갚았고 부모 아직 계셔서 / 國恩未報親猶在

홍진을 다시 밟으니 제법 바쁜 내 행색 / 更踏紅塵跡似忙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역) > 1968

- 『동문선』 제12권 >칠언율시> ‘得病告暫往江村還京馬上’ > 임규(任奎)

② 과연복정(過延福亭)/임규(任奎)

過延福亭 [任奎] : 誰勸君臣入酒鄕。不知禍自在蕭墻。酣歌不闋瓊樓上。腥血交流輦道傍。煬帝汴河秋冷落。明皇蜀道雨凄凉。當時此恨無人識。滿目溪山泪數行。

누가 군신을 권하여 취향으로 인도했던고 / 誰勸君臣入酒鄕

화가 절로 소장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 不知禍自在蕭墻

옥루 위의 거나한 노래가 그치지 않는데 / 酣歌不闋瑗樓上

연도 옆에 끔찍한 피 가로 세로 흘렀어라 / 腥血交流輦道傍

수양제 변하에서 가을 바람 싸늘했고 / 煬帝汴河秋冷落

당명황 촉도에서 궂은 비가 처량했지 / 明皇蜀道雨凄涼

당시의 그 한을 아는 사람 누구인고 / 當時此恨無人識

산이랑 시내를 바라며 눈물 겨워하노라 / 滿目溪山淚數行

*연복정(延福亭) : 옛터가 개성 동대문 밖 산대(山臺) 바위 밑에 있음. 고려 의종(毅宗)이 이 정자를 짓고, 기화이초(奇花異草)를 심으며 뚝을 쌓아 호수를 만들고 밤낮 배를 띄우며 놀다가 마침내 위사(衛士)들의 원망을 사서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만났다.

*소장(蕭墻) : 소(蕭)는 숙(肅)의 뜻이고, 장(墻)은 병풍이라 하였는데, 화가 밖에서가 아니요, 안에서 일어남을 ‘소장의 화’라 이른다.

*수양제(隋煬帝) …… 싸늘했고 : 수 양제가 주색(酒色)에 빠져 강도(江都)에 순항하여 유련(留連)하다가 변하(汴河)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弑害)되었다.

*당명황(唐明皇) …… 처량했지 : 명황(明皇 : 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으로 촉(蜀)에 파천(播遷)하다가 마외파(馬嵬坡)에서 양귀비(楊貴妃)를 사사(賜死)한 뒤 몹시 상심했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행궁에서 달을 보니 마음 상하는 빛, 밤비에 방울소리 들으면 애끓는 소리.”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역) > 1968

- 동문선 제12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過延福亭’ > 임규(任奎)

③ 강촌야흥(江村夜興)/임규(任奎)

江村夜興 [任奎] : 月黑烏飛渚。烟沉江自波。漁舟何處宿。漠漠一聲歌。

달빛 침침한데 까마귀 물가에 날고 / 月黑烏飛渚

연기 잠긴 데 강물 절로 물결이 이네 / 煙沈江自波

고기잡이 배는 지금 어디서 자는고 / 漁舟何處宿

멀고먼 한 가락 노랫소리 들리네 / 漠漠一聲歌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역) > 1968

- 『동문선』 제19권 > 오언절구(五言絶句) > 江村夜興 > 임규(任奎)

이상 3편이 『동선문』에 출전되는 임규(任奎)의 유명한 시다. 아마 3편 정도가 실렸을 정도이므로 상당량의 시문이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유작집 등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이상의 시를 발견, 확인하지 못해 아쉽다.

또 자칫 ‘고려조 장흥임씨 임규(任奎)’의 시를, ‘조선조 후기 풍천임씨 임규(任奎, 1620~1687)’의 시로 착각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조선조 임규는 본관이 풍천(豐川)이고 호는 석문(石文)이다. 조선조 임규는 1670년(현종1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경주 부윤 등을 거쳤고, 1680년(숙종6) 전라도 관찰사에 이어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686년 황해도 관찰사를 끝으로 관직을 떠났던 문인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인터넷 상에서 그 풍천임씨 임규의 한시들이 자주 소개되는데, 간혹 고려조 장흥임씨 임규의 시를 조선조 임규의 시로 소개하는 오류도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혹자는 ‘『동문선』 임규 시’가 어찌 ‘장흥임씨 임극충의 시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문선』은 조선조 1478년(성종 9)에 발간된 시문집이다. 그런데 조선조가 아닌 고려조 말 고종 41년(1254)에 최자가 지은 시화집 『보한집補閑集』은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과 더불어 고려의 3대 시화집으로 꼽히는 명작물이다. 그런데 이 『보한집』을 편찬한 최자는 『동문선』에 수록된 임규의 그 3편 중 2편을 임극충의 시로 소개하고 있다. 즉 『보한집』에서 최자는 임극충 시를 소개했는데, 『동문선』에서는 임극충의 다른 이름인 임규의 시로 수록하였던 것이다. 최자와 임극충은 생년이 50여 년 차이의 인물들로, 거의 당대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 최자가 임규와 임극충을 혼동할 리 없었을 것이다.

또 『송경광고(松京廣攷』(卷6) ‘누정 연복정’ 편에도 ‘임규(任奎)=임극충(任克忠)’임을 분명히 명시해 놓고 있다. 즉 연복정에 대해 소개한 앞 부분에서는 “임규시, 이규보시, 이색시 任奎詩. 李奎報詩. 李穡詩 『原志』”라고 소개하고는 그 다음 시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임극충이 시를 짓다 作任克忠詩”라고 명시하고 이어진 시 내용에서도 이른바 “誰勸君臣入醉卿…”시작하는 『동문선』 임규의 시 ‘과연복정’를 소개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누정 연복정’ 기자(記者) 역시 임규 시인은 곧 임극충 시인었음을 분명히 명시해 놓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문선』의 임규가 바로 임원후의 장자였던 임극충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동문선』 임규의 시를 ‘임극충의 시’로 소개된 『보한집』의 관련 내용을 보자.

(다만 『동문선』과 『보한집』의 시 국역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은, 역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①任文肅公克忠, 過延福亭云

任文肅公克忠, 過延福亭云, ‘煬帝汴河秋冷落, 明皇蜀道雨凄凉. 當時此恨無人信, 滿目溪山淚數行.’ 文順公題云, ‘複道渾成碧草蕪, 笙歌寂寞鳥相呼. 箇中殷鑑分明在, 莫遣遺基掃地無.’ 感古情深, 讀之悽然. 殷鑑一聯, 含蓄深切.

문숙공(文肅公) 임극충(任克忠)이 연복정(延福亭)을 지나다 이르기를,

“양제(煬帝)의 변하(汴河)엔 가을이 시들하고 / 명황(明皇)의 촉도(蜀道)엔 비가 처량하네. / 당시엔 이 한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 시내며 산이며 눈에 가득 담아 눈물만 몇 줄기”

라고 하였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이 지은 〈시에서〉 이르기를, / “복도(複道)엔 푸른 풀만 무성하게 섞여 있는데 / 피리 소리 노래 소리 사라지고 새들만 노래하네. / 그 가운데 은감(殷鑑) 분명하게 있으니 / 남은 터 쓸어버린 듯 없애지 말아다오.” 라고 하였다.

옛 것을 느끼는 마음이 깊어 이 시를 읽으면 처연해진다. 은감한 연은 함축한 의미가 깊고 간절하다.

-『보한집(補閑集)』 卷上 >任文肅公克忠, 過延福亭云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②凡留題以辭簡義盡爲佳, 不必誇多耀富

凡留題, 以辭簡義盡爲佳, 不必誇多耀富. 朴參政寅亮, 題僧伽窟二十韻, 咸郞中子眞, 題洛山四十四韻, 李史館允甫, 題佛影一百韻, 皆紀事實, 辭不得不繁. 若亭臺樓, 觀所過題詠, 只在一兩聯寫景. 如畵森然眼界, 使悤悤過客讀之, 口不倦心不厭, 吟玩遣興耳. 予平生飽聞任相國克忠, 題黃驪縣客樓云, ‘月黑烏校勘飛渚, 烟沈江自波. 漁舟何處宿, 漠漠一聲歌.’ 但奇其韻語, 未得其味. 及按廉中道抵宿此樓, 是時江烟冥漠, 淡月朦朧, 水鳥飛鳴, 漁人相歌. 惱眼感耳, 摠是任公之詠, 其詩價對景益高.

*‘月黑烏校勘飛渚’에서 세 번째 문자 원문은 ‘爲’이지만, 『동문선』에 의거해 ‘爲’를 ‘烏’로 바꿔서 국역하였다-역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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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37> 전라도> 장흥도호부> 인물 : 임규(任奎) - 원후의 아들로 진사시에 뽑히었으며,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외척(外戚)으로서 현명함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任奎元厚之子擢進士第官至門下侍郞平章事外戚之賢無出其右

2) 보한집(補閑集) : 고려 말 문신 최자(崔滋, 1152~1220)1254년에 편찬한 잡록(雜錄)으로 31책으로 되어 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이(崔怡)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보한집이라 표제를 붙였다. 1권에는 52, 2권에는 46, 3권에는 49조 등 총 147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한집에 수록된 작품은 대부분 시화(詩話). 파한집에는 삼국시대의 시화도 실린 반면, 보한집에는 오로지 고려시대의 시화들만 선취하였다는 점에서 두 책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3) 송경광고(松京廣攷): 1832년 임효헌(林孝憲)이 편찬한 지리서로 8책으로 구성됐다.

4) 송경광고6 누정 연복정 : 任奎詩. 李奎報詩. 李穡詩 原志,作任克忠詩. 誰勸君臣入醉卿, 不知禍自在蕭墻. 酣歌未闋瓊樓上, 腥血交流輦道傍. 煬帝汴河秋冷落, 明皇蜀道雨凄凉. 當時此恨無人識, 信作滿目溪山淚. 數行憶昔明王遊幸日, 龍舟錦纜傍江湖. 勸歡仙妓回眸笑, 被酒詞臣倒腋扶. 自古窮奢難遠馭, 幾人懷舊發長吁. 頹堤不見滄濤拍, 複道渾成碧草蕪. 羅綺飄將雲共散, 笙歌換作鳥相呼. 箇中殷鑑分明在, 莫遣遺基掃地無見山川考山㙜巖.

5) 동문선12, 七言律詩 過延福亭[任奎]에 같은 내용이 있다.

6) 동국이상국전집2, 古律詩 過延福亭 ; 동문선20, 七言絶句 延福亭[李奎報]에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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