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오남 김한섭 선생은 강진유학자인가 장흥유학자인가?
특별기고- 오남 김한섭 선생은 강진유학자인가 장흥유학자인가?
  • 장흥투데이
  • 승인 2023.04.1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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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 오남 김한섭 선생은?

김한섭(1838~1894)선생은 장흥군 부산면 흥룡동(현재 내동마을)에서 출생했으며 30세 때부터 이항로, 임헌해,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해 독자적인 성리학 세계를 구축했다.

선생은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1년이 못되어 스승이 사망하여 귀향했고, 그 이후 임헌해(1811~1876) 문하에 들어가 8년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김평묵(1819~1891), 최익현(1833~1894) 등 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헸다.

1877년(39세)에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에 이주했으며 1887년(49세) 강진군 도암면 수양리로 가족의 거처를 옮겼고 1890년(52세)에 그곳에 봉양정사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당시 제자들은 20~30명 정도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혁명을 일으켜 전라도 각지를 점거할 때 당시 강진현 보암면(현재 도암면)의 도총장(都摠長) 직책으로 농민군들이 강진으로 입성하는 것을 저지하다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4년(56세)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당시 강진현은 농민군 집강소(농민군 자치기구)설치를 반대한 것 때문에 장흥동학접주 이방언(1838~1895)은 강진현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방언은 장흥군 용산면 출신으로 일찍이 김한섭과 글을 같이 배운 친구였다. 김한섭은 그러한 이방언에게 「적도들에게 경고하는 글」을 지어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동학군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의병을 모집하여 수성군을 조직하고 보암면(현 도암면) 도통장으로 동학군의 진입에 대비했다.

12월 7일 오전에 농민군이 강진현에 들이닥쳤다. 당시 강진현감 이규하는 곧바로 달아났고, 김한섭은 다른 의병들과 함께 포를 쏘아댔지만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었다. 강진 병영에서는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태에서 동문과 남문이 부서지고 농민군이 밀려들어오면서 김한섭은 그때 사망했다.

◆ 김한섭 선생의 장흥 용호정 기문

내가 겨우 7~8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문중 어른(김영, 1769~1830)을 따라 문중의 제각(현재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는 근처) 에 간적이 있었다.

마침 장흥지방 고을의 원로들이 교육과 관련된 모임을 하면서 차를 마시고 시를 논하고 있었다. …중략…

그 후 1873년(40세)년 여름에 (강진군 성전면 거주) 용호정(전남도 지정, 지방기념물)정자의 주인을 찾았다. 주인은 최규문(1784~1854)선생의 장남 최덕신(1817~1886)이었고 나에게 건네준 용호정에 관련된 시집과 시문은 나의 재종조인 김영께서 집필한 것이었다.

이 정자는 1827년 봄에 짓기 시작했고, 정자를 짓기 전에는 사모대라 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용호정이 있는 곳이다.

그의 아버지(최영택,1759~1838)는 효성으로 고을에 소문이 났다.

그의 아버지는 선친(최수인,1731~1815)의 묘에 성묘를 다니는데, 비록 추위나 더위, 장마에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현재 용호정이 있는 곳 사모대는 영광김씨 평강공을 모시는 제각으로 가는 길목이다. …중략…

몇 년 후에 최규문의 아들 최덕신이가 지붕도 수리했다. 수려한 호수와 산자락, 기괴한 암석, 그윽한 화초, 즐겁게 노니는 물고기는 물고기와 새들은 옛날 사람들이 시문으로써 잘 표현했다.

아아, 이 정자는 옛날에 알려지기로는 단지 아름다운 자연을 지극히 즐기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진실로 효의 본보기라 하겠으니, 열 번 들은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자의 주인이 함께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흡족한 마음으로 시를 짓는다.

바위 깍은 공중 아래에는 용궁인데

우뚝한 정자가 강물 한 가운데 떠 있네

물고기 푸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노닐고

검은 눈썹을 연 구름은 붉은 빛을 내리 비추네

지난 일들은 끝없이 고목나무에 이리고

거문고 소리는 은은하게 외로운 오동나무에 들리는 듯하네

긴긴 세월의 성묘 길이라고 말들 하지만

산뜻하게 꾸민 개울과 산이 선생을 좋아할 것이네

-1888년(50세) 2월에 영광인 김한섭 쓰다.-

◆ 남기고 싶은 말

최근에 장흥문화원에서 탐진강 상류(옛 장흥 예양강변)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덟(8)개 정지를 홍보하는 영상물을 전라남도 공모사업으로 제작했다.

그런데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용호정 기문을 장흥의 대유학자 김한섭 선생이 지었다고 해설하고 있어 필자의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장흥동학혁명기념관을 찾은 관광객에게 「의향 장흥」을 홍보하면서 남도장군 이방언 장군과 동문수학했던 오남 김한섭 선생이 동학농민군에게 희생된 인물이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같은 인물을 장흥선비들의 「충. 효. 절의 정신」을 배우고 익혔던 공간인 장흥의 상징 8정자를 홍보하는 영상물 일부분에 또 다르게 홍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한섭 선생은 강진에서 제자들을 양성했기에 강진의 유학자라 한다.

과연 김한섭 선생은 장흥선비들의 표상이 되었던 장흥의 대유학자로 칭송받았는가? 의문이 앞선다. 사실과 다른 내용은 훗날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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