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④ / 추강 남효은과 장흥 예양강(2)
■기획 / 아, 예양강④ / 추강 남효은과 장흥 예양강(2)
  • 김선욱
  • 승인 2023.04.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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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양강, 온전히 길게 빛나는 강”-‘길게 흥한다는 장흥’ 상징
예양강을 ‘예강(汭江)’, ‘예수(汭水)’로 …‘예(汭)’를 놓지 않았던 시인들
김선욱/ 본지 편집인, 시인

추강(1454∼1492)은 『조대기』에서, 사망하기 1년 전이던 1491년 3월부터 장흥의 별관(別館)에 우거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문 『조대기』도 1491년에 기록됐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최초로 예양강이 소개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에 편찬되었다)

추강은 이 『조대기』 첫 문장에서 “수령천(遂寧川)이 가지산(迦智山)으로부터 나와서 장흥부(長興府) 북쪽 몇 리를 흐르다가 물길을 돌려 동쪽으로 흘러가고, 동정(東亭)을 지나 예양강(汭陽江)이 되었다가 강물이 또 남쪽으로 내려간다.”며 예양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대기』의 내용 분석은 차후에 하기로 한다)

이처럼 추강은 산문 『조대기』에서 수령천과 예양강을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이 산문 외에도 그의 시(詩) ‘예양강(汭陽江) 동정(東亭)에서 경회(慶會)에게 시를 남기고 작별하다 汭陽江東亭。留別慶會’에서도 예양강을 적시하고 있다.

추강의 시 ‘예양강 동정에서…’

추강의 시(詩) ‘예양강 동정에서…’를 보자.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에게 시를 남기고 작별하다 汭陽江東 亭留別慶會

천관산 수려하지만 내 고향 아니니 冠山雖麗非吾土

이별한 다섯 해에 홍안이 늙었구려 別來五年紅顔蒼

만난 지 며칠 만에 또다시 작별하니 相逢數日又相別

맑은 눈물 뚝뚝 이별 잔에 떨어지네 淸淚浪浪落離觴

예양강 흐르는 강물 유리처럼 푸르고 汭陽江水琉璃碧

꽃 진 뒤의 봄빛도 반 넘어 저물었네 花落春光歸半强

성조에는 한 인재도 버림이 없으니 聖朝一才無棄擲

그대 같은 문장을 누가 능히 잊을까 如君詞藻孰能忘

뇌양의 춘죽은 남인의 사모함이니 雷陽春竹南人思

구공은 응당 중서당에 들어가리라(1) 寇公應入中書堂

말하노니 부디 음식 많이 드시구려 寄語努力加飧飯

학서 당도할 날 이제 응당 바쁘리라(2) 鶴書赴隴今當忙

봄날 동정 위에서 작별하는 이 자리 春天祖席東亭上

죽마고우의 정회는 크게 상할 뿐이라오 竹馬情懷太堪傷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 『秋江先生文集』 卷之二/ 시(詩)/ 칠언고시(七言古詩)

이처럼 자연지명으로서 구체적인 ‘예양강’을 처음으로 적시한 사람은 추강이지만, 사서(史書)나 지리지(地理志)가 아닌 개인 시문집에서 추강보다 앞서, 예양강의 별칭이요 약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汭水)’를 적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추강의 스승으로 동시대 문인이요 당대의 대석학이었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이었다.)(추강은 점필재의 문하생이었다).

점필재는 추강보다 23세 연상이었지만(추강과 같은 해인 1492년에 별세하였다), 추강과는 사승관계로 막역하게 교유(交遊)한 사이였다. 점필재는 ‘남추강에게 답하다(答南秋江書),’ ‘남추강에게 부치다 寄贈南秋江[佔畢齋’ 등 시 2편과 서간문인 ‘남추강에 답한 편지 答南秋江書’를 남겼을 만큼 추강은 우의가 깊었다.

점필재의 서간문 첫 문장에서, 우리는 점필재와 추강의 우의와 그 깊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추강 족하(足下)여, 내가 호남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 거의 반년이 되었으나, 우리 추강의 문안이 한 번도 이르지 않음을 내심 괴이하게 여겼소. 이에 생각하기를 ‘추강이 지난해에 호남과 영남을 두루 돌면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유적들을 남김없이 찾아보았으니… 秋江足下。僕自湖南還都下。幾及半載。而竊怪吾秋江之問一不至。意以爲秋江往歲遍湖嶺之外辰,弁二韓之遺迹。搜討無餘。…”

이처럼 추강과 절친했던 점필재도 남도 유람 차 장흥을 들려 장흥에 관한 시 2편을 남겼는데, 이 시 2편의 작시(作詩)의 시기로 보아 추강의 『조대기』 보다 앞선 시기다.

점필재, 예양강 약칭 ‘예수(汭水)’ 시 남겨

점필재의 2편의 시는 ‘장흥부에서 치자를 감상하다 長興府賞梔子’와 ‘호남의 이 절도사(계동)가 관산 동정에 대한 4수의 시를 부쳐 보여 주면서 화답하기를 요청하다 湖南李節度使 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이다. 이 중 두 번째 시인 ‘호남의 이 절도사(계동)…’에서 예양강의 약칭인 ‘예수(汭水)’가 나온다. 즉 “… 예양강엔 흰 마름꽃이 피었도다 汭水白蘋開… ”라는 시구에서이다.

점필재의 시 ‘호남의 이 절도사(계동)…’를 보자.

- 이계동(1450~1506)은 조선 전기 함경도절도사, 경기도관찰사, 병조판서,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크게 활약했으며 독서에도 힘써, 당시 문무를 겸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다.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

호남의 이(李) 절도사(계동)가 관산(冠山) 동정 4수의 시를 부쳐 보여 주면서 화답하기를 요청하다[湖南李節度使 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

뛰어난 인물은 서남쪽에 있고 俊彩坤維上

외로운 성은 마읍(3)가에 있도다 孤城馬邑邊

산과 냇물은 한없이 좋거니와 山川無限好

꽃과 달은 누구를 위해 고운고 花月爲誰姸

군교들은 빗줄기처럼 뒤를 따르고 列校從如雨

먼 곳 백성들은 신선처럼 바라보리 遐萌望若仙

동정에 봄빛이 하도 광대한지라 東亭春浩蕩

사공의(4) 시편을 휘둘렀네그려 揮灑謝公篇

어리진(5)을 겨우 파하자마자 才罷魚麗陣

행주(6)에서 옥술잔이 넘치는구나 行廚灔玉杯

부암엔 아침 해가 비스듬히 비추고 婦巖紅日側

예양강엔 흰 마름꽃이 피었도다 汭水白蘋開

봄놀이는 점차로 늦어만 가는데 春事垂垂晩

징서(7)는 자주자주 내려오누나 徵書鼎鼎來

군문으로부터 이십 리 일대에는 轅門二十里

다시 빙 둘러 화성(8)을 띠었으리라 更帶火城回

소덕문 앞으로 난 길은 昭德門前路

여전히 똑바르고 또 비스듬하리 依然直復斜

명원엔 매실이 이미 열었을 게고 名園已梅子

화려한 거리엔 버들꽃이 그득하겠네 繡陌盡楊花

날짜 정하여 그윽한 골목 찾거든 指日尋幽巷

공과 함께 얕은 백사장에 앉아 놀리라 需公坐淺沙

만날 때를 당해 그리움이 더하여 臨逢增戀嫪

수시로 택일하는 집을 찾는다오 時訪建除家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점필재의 이 시는 추강의 ‘조대기’ 보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을 것이므로, ‘예수(汭水)’를 예양강으로 본다면 예양강의 최초 시는 추강의 ‘조대기’가 아닌 점필재의 ‘호남의 이 절도사(계동)…’가 될 것이다.

여기서 점필재는 ‘예양강’을 ‘예수(汭水)’’로 표현했지만, 점필재 외에도 존재 위백규의 시, 위 대홍의 묘지명에서도 예양강이 ‘예수(汭水)’로 표현되기도 했다.

존재, 임회의 묘표문

위대홍 묘지명에도 ‘예수(汭水)’ 등장

존재 위백규는 기산팔문장(岐山八文章)인 임회(林誨, 1508∼1573)에 대한 ‘묘표문’인 ‘죽곡 임공 묘표竹谷林公墓表’(『江漢集』 卷十六 / 墓誌銘)에서 예양강을 ‘예수(汭水)’로 표현했다.

“…

금옥 같은 문장에 金玉文章

기린 봉황 같은 도덕으로 麟鳳道德

형제간에 화답하며 塤篪迭和

남쪽 지방에 큰 명성 있었지만 鳴于南國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胡不大施

어이 지방관으로 전전했던가 棲遑郡邑

영원한 건 이름뿐이니 不死者名

진실로 천만년은 가리라 允也千億

예양강 넘실거리고 汭水洋洋

기산 봉우리 우뚝하나니 岐岑矗矗

아 즐겁도다 빗돌이여 於樂貞石

새긴 글을 길이 보여 주시게 永示顯刻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존재는 이처럼 위 시에서 “예양강 넘실거리고 汭水洋洋”라며 예양강을 예수(汭水)로 표현한 것이다.

또 위대용(魏大用, 1530~1610)(9)의 묘지명인 ‘통정대부 형조 참의 위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 通政大夫刑曹參議魏公墓誌銘 幷序’에서도 예수(汭水가 나온다.

“ …

대인은 그를 벗삼았고 大人友之

열사는 그를 천거하여 烈士擧之

대부 벼슬 내렸으나 爵下大夫

절조 지켜 마음 변하지 않았도다 而守不移

예양강물 출렁출렁 汭水湯湯

흘러가고 흘러오며 以泝以沿

공의 풍도를 維公之風

영원토록 전하리라 永世其傳”

-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이 묘지명의 시에서도 “예양강물 출렁출렁 汭水湯湯”하고 예양강을 예수(汭水)로 표현돼 있다.

이처럼 시인들은 예양강을 예수로 약칭하여 표현하기도 했지만, 기실 ‘예수(汭水)’보다는 ‘예강(汭江)’이라는 약칭의 표현이 더 널리 사용했다.(10)

‘예수(汭水)’의 경우, 중국의 고사(古事)에서 나오는 ‘예수’와 혼동되기 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주나라 유왕 3년에 지진으로 인해 삼천(三川), 즉 기산(岐山)에서 발원하는 경수(涇水), 위수(渭水), 예수(汭水)가 흔들리는 변고가 생겼다”라는 고사에서 ‘예수’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쉽게 ‘예양강’의 준말로 여겨질 수 있는 ‘예강(汭江)’은 통상적인 고전용어에서도 ‘예양강=예강’으로 알려졌을 만큼, 많은 시인들이 예양강을 ‘예강’으로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면, 마을 이름인 예양리와 자연지명인 예양강 증 어느 곳이 더 먼저 불려졌을까.

예양리는 본래 삼국시대 성하촌으로 성촌이 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의 서초등학교와 토요시장 자리에 장대(將臺)가 있어 장대촌으로 불리어졌다가 예양강의 이름을 따 예양리로 불리어져 온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장흥의 향토사에는 1747년 출간 『장흥지(정묘지)』 부내방(府內坊)의 마을 편에 예양리가 처음으로 나온다.

‘예(汭)’는 물굽이를 의미

예양강을 ‘예강’, ‘예수’, ‘예강’이라고 불렀듯이 예양강을 작시한 시인들은 한사코 ‘예’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이 ‘예(汭)’는 나름의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汭)’ 자(字)는 물굽이, 굽어 흐르는 강의 안쪽이라는 뜻이다. 물굽이에서 ‘굽이’는 ‘휘어서 구부러진 곳’이라는 뜻이고, 굽어진 곳을 세는 단위는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굽이’, ‘굽어지다’는 온전하다, 오래간다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도덕경(道德經)』 중 ‘도경(道經) 22장’에 “굽히면 온전할 수 있고 휘어지면 곧게 펼 수 있다曲則全 枉則直”고 했다. 즉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껴안고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하니 빛난다. 스스로 뽐내지 아니하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하지 아니하니 으뜸이 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 옛 말에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진다 한 말이 어찌 헛말일 수 있으랴?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敝(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 聖人 抱一, 爲天下式. 不自見故 明, 不自是故 彰, 不自伐故 有功, 不自矜故 長. 不唯不爭故 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김용옥의 『노자가 옳았다』에서

즉 ‘굽으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게 된다 曲則全 枉則直)’. 한 마디로 휘어지고 굽어져서 더 온전하고 더 오래간다, 굽어져 있어 펴진다는 희망이 있다는 비전을 담은 의미다.

예양강의 ‘양(陽)’은 볕이요 빛이다. 그러므로 굽어져 펴진다는 찬란한 희망이요 광명이요 비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도덕경』의 의미를 더하면, 굽어져 더 온전히 빛난다는 것이다. 즉 ‘예양강’은 길게 흥하다는 ‘장흥’의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장흥군이, 오래도록 잊혀졌던 예양강을 되찾아 그 강이 우리의 일상이 되고 희망이 되고 광명이 되는 강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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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뇌양(雷陽)의……들어가리라 : 한창 돋아나는 봄 죽순은 남쪽 지방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니, 응당 등용되어 중서성(中書省)의 정사당(政事堂)인 중서당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명신(名臣) 구준(寇準)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구준이 형주 사마(衡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죽자, 서경(西京)으로 장사를 지내려고 형남(荊南) 공안현(公安縣)을 지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길에 나와 곡하고 제사 지내면서 대나무를 잘라 땅에 꽂고 지전(紙錢)을 걸어 놓았는데, 한달 뒤에 보니 마른 대나무에 다 순(筍)이 났다고 한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2) 학서(鶴書)……바쁘리라 : 머지않아 다시 부르는 왕명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학서는 일명 학두서(鶴頭書)로, 서체의 하나이다. 옛날 조서(詔書)를 학두서체(鶴頭書體)로 썼기 때문에 제왕의 조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3) 마읍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속했던 현명(縣名)이다. “… 수령(遂寧)은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서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수령현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遂寧, 本百濟 古馬彌知縣, 新羅改馬邑縣, 爲寶城領縣, 高麗改遂寧縣, 爲靈巖任內, 後來屬 ”- 『세종실록 151권』 地理志/全羅道/長興都護府

4) 사공 : 남조 송(南朝宋)의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 듯하다.

5) 어리진 : 군영(軍營)에서 실시하는 진법(陣法)의 이름이다.

6) 행주 : 본디 도시락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야외(野外)의 연회(宴會)를 뜻한다.

7) 징서 :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서(命令書)를 말한다.

8) 화성 : 횃불로 성(城)을 에워싸서 성을 수비하는 것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양간(羊侃)이 후경군(侯景軍)의 핍박을 받았을 때 성(城) 주위에 횃불을 많이 던져 화성을 만들어서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9) 위대용(魏大用)의 자는 경행(景行), 호는 괴봉(魁峯)이다. 1555(명종10) 사마시에 합격한 후 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임계영(任啓英) 등과 뜻을 함께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특히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임계영의 포계(褒啓)로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장흥의 석천사(石川祠)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10) 예양강을 예강(汭江)’으로 표현한 시들은, 梧灘 沈攸(16201688) : 예양강에 배를 띄우다 汭江泛舟 조선 후기 영조 때의 학자 김희조(1680~1752) 방호선생문집(放湖先生文集)』 : 예양강 가에서 수령 이만협과 함께 천렵을 구경하다 汭江上同李侯觀川獵… ③ 『옥봉집(玉峯集)/玉峯別集/玉峯集後序三之下/: 汭江別 이춘원(李春元)구원집(九畹集)/九畹先生集卷之一/ : 老夫曾食汭江魚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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