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12-창설 112년 역사의 장흥경찰서(중)
■역사산책12-창설 112년 역사의 장흥경찰서(중)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1.0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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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양기수/본지 논설위원. 장흥향토사연구회장. 시인. 수필가. 「문림고을 장흥」「장흥의 민속」「천관산」「보림사」등 장흥군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음.

해방 정국과 국립 장흥경찰의 발족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식민지로 만들고, 다시 중국과의 전면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확대하였다.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 들었던 일본에 미국이 히로시마(廣島 1945.8.6)와 나가사키(長崎 1945.8.9)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연합군이 일본의 항복을 재촉하자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기하여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해방의 감격과 경축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에서도 장흥의 젊은 활동가들은 “장흥청년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해방소식을 알리고 수시로 보도되는 정부의 정보를 주민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이를 계몽하였다. 또한 경찰을 대신하여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과 해방을 맞아 귀순하는 징용자와 노역자를 안전하게 인솔하고, 일본인 또한 안전하게 귀순 시키는 일 등 부서를 나누어 활동 하였다.

8월 16일, 1930년대에 조직된 청년동맹원들과 일제하에서 민족운동에 공명했던 고영완, 김두환 등이 고창석(高昌錫)을 위원장으로 한 “건국준비장흥군위원회”도 자발적으로 결성하였는가 하면, 장흥읍내에서는 그동안 권력층과 가까이 하고 재력적 여유를 가지고 활동하던 김중기, 김희기 등이 “건국준비장흥읍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황사봉, 김태곤, 조봉환 등 50여명이 “국군준비대”를 결성하여 활동을 하였다. 이들 조직의 활동은 모두가 치안유지와 귀환동포관리, 일본인 환국에 따른 신분보장, 일본인 재산관리로서 동일한 성격의 목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단순한 지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암투도 없지 않았다.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太平洋美陸軍總司令部, 세칭 맥아더사령부)는 1945년 9월9일 일본의 조선 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은 후, 9월11일에는 일장기 하강식을 거행 후, 일본 총독 아베를 해임하는 한편, 미군정 장관에 아놀드(Anold,A.L.) 소장을 그리고, 경무국장에 헌병 사령관인 슈이크 준장을 임명함으로써 9월 19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SAMGLK,약칭 ‘미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을 확정짓고 군정을 시작하였다.

미 군정당국은 일본인으로부터 인계받는 과정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종전의 모든 경찰관은 물론 관료들을 존속하게 하거나 재고용하여 친일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읍건준과 군건준 사이에 약간의 완력이 없지 않았다. 또한 미 군정당국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사설단체의 경찰권 행사를 금지시켰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민간인의 총기소지를 엄금하였다.

중앙건준이 인민위원회로 발전적으로 해체되는 것에 발마춰 장흥에도 건준이 발전적인 해체를 하여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고창석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이러한 해체과정에서 인민위원회는 면과 리까지 조직이 확대되어 주민들이 마을별로 인민위원장을 선출했다. 인민위원회는 미 군정이 해체를 요구할 때까지 통치권력을 행사했으나 미군정과 인민위원회는 이중적인 권력구조를 보였다.

1945년 10월 21일 미 군정청은 경무국을 창설하여 조병옥(趙炳玉)을 경무국장에 임명하고, 예하에 관방총무·공안·수사·통신과를 두고, 지역경찰에는 경무·보안·형사·경제·정보과를 두어 치안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경찰의 발족으로 창립기념일로서 지금까지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의 군정요원과 군정청의 시정방침이 지역에서의 시행은 즉시즉시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앙정부의 행정력과 통치력 역시 곧장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은 전라남도지사로 피그대령이 10월23일 취임하여 미 제101 민사부대와 함께 광주에 들어 왔고, 11월7일 전라남도에 새로운 경찰조직을 편성하였으며, 장흥에는 아이콘 소령이 이끈 미 제61군정중대 사령부가 10월28일 들어와 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예양리 120-2번지)에 여장을 풀고, 지금의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남동리 88번지)에 임시 사령부 사무실을 두어 장흥, 보성, 영암, 강진, 해남, 완도의 6개 군을 관활하면서 군정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제19구경찰서 / 강수의 촬영
▲제19구경찰서 / 강수의 촬영
▲장흥감무서 개설기년 / 강수의 촬영
▲장흥감무서 개설기년 / 강수의 촬영
▲1948년도 당시 장흥경찰서 / 강수의 촬영
▲1948년도 당시 장흥경찰서 / 강수의 촬영

미 군정청은 당시 청년 단원이었던 문병권을 장흥건준위원들의 추천을 받아 경찰서장으로, 고영완을 초대 장흥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경찰서장의 직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미군정에서는 다시 장흥경찰서의 초대서장으로 12월20일에 손석민(孫錫珉)을 임명했다. (지방경찰청에서 보존하고 있는 사령부에는 1946.01.12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5년 12월에는 도지사 산하에 있던 경무부가 경찰부로 격상되고, 1948년 1월16일 군정경(軍政警) 제23104호로 중앙의 경무국을 경무부로 확대하여 경찰계급을 경무부장, 경무부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으로 하였다. 또한 읍면에 위치한 경찰관 주재소를 지서(支署)로 이름을 바꾸었는가 하면 1946년 2월25일 각도 경찰부 보안과에 기마대를 신설하였다.

1946년 4월11일 각 도의 경찰부를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으로 바꾸고 경찰청과 경찰서 사이에 감찰서(監察署)를 신설하여 경찰서의 업무를 감독수행토록 하였다. 또한 경찰서의 명칭도 지명(地名)위주의 경찰서에서 구(區) 번호제로 변경함에 따라 장흥경찰서는 제8관구 소속의 “제19구 경찰서”로 이름하여 현위치(동동리 281번지)로 하였다.

그해 4월15일에는 전라남도에는 광주, 순천, 목포, 장흥, 4개소에 감무서(監務署)를 그리고 광산군과 무안에 경찰서를 신설하며, 지서의 근무자 수석을 주임으로 경찰서의 각계 주임을 계장으로 명명하였다. “장흥감무서”는 기양리 57번지(구 가나다여관)에 두었다.

이후 미군정은 각 시군정의 수행에 있어 이중권력이 행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의 해소를 위해 전남군정청에서 “제 정당은 등록하라”는 지시로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르자 군정에 협조자들과 인민위원장간에 어느 정도 권력 갈등이 있은 후 인민위원회는 기층세력에 대한 지지에도 미군정에 정면 대결을 못하고 점진적으로 지하화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익들의 테러에 대한 좌익의 저항은 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인민항쟁’의 여파가 이곳 장흥에 까지 미쳐 11월9일에는 관산면에서 소요사태가 있었고, 47년 5월에는 대덕, 용산, 안양면에서도 지역폭동이 있었으며, 47년 초봄에는 좌익 세력들이 유치면사무소와 부산지서를 습격 방화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5월10일 남한 단독선거를 실시 장흥에서는 이중기(李仲基)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헌국회는 곧 헌법기초 작업에 들어가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만들어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을 당선시켜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한도 9월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남조선노동당의 지도하에 파업, 시위, 경찰관공서 습격 등이 일어나 났는가 하면, 1948년 3월18일에는 유치지역에서는 유치지서에서 근무하던 경찰이 좌익에게 습격을 당하여 죽자 이를 문상하러 가던 당시 유치면장 문복호(文福鎬)씨가 좌익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과 6월15일에는 지방폭도들에 의해 안양면장(馬東春)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한편, 정치적인 불안과 사회적인 혼란이 지속되어 여순사건 잔여병들이 대덕 연정, 연지에 들어와 우익으로 전향한자들을 학살(1948.10.19)하는 사건으로 장흥경찰서 보안주임 외 20명이 전사하는 비운과 유치면의 국사봉과 가지산 등으로 숨어든 그들은 당시 장평면 봉림과 임리의 경찰출장소와 부산지서 소실, 안양면 소실 등의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이른바 보급투쟁 등을 벌여 주민들을 괴롭히자 국군 5사단 20연대 2대대원(대대장 金永恩)과 장흥경찰부대 등이 합동으로 국사봉과 가지산에 위치한 전남인민군 총사령부를 기습 소탕(1948.11.30) 하였는가 하면, 1949년 2월부터 경기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전인수, 최현, 김선우 등이 전남에 내려와 전남도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3월부터 11월까지 유치면 암천리의 유치북국민하교에 있던 남노당전남도당(南勞黨全南道黨) 본부가 지리산으로 옮겨가기까지 혼란을 진정 시키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1948년 5월1일부터 제19경찰서(장흥경찰서)가 1급 경찰서로 지정되었다.

1948년8월2일 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 설치되자 장흥경찰서 유치장을 대용감방시설로 활용하기 시작하여 1975년 4월15일 장흥교도소가 운영되기 전까지 미결수 유치장이 운영되었고, 1948년 9월15일 장흥경찰서 감무서를 폐지되었다. 또한 1948년11월25일 장흥경찰서에 기동대를 편성 장흥에 주둔하여 남노당전남도당의 인민유격대 잔당과 지방 폭도들의 소탕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장동면 만년리에 만년출장소를 설치(1948.12.01)와 장흥경찰서에 수사계 설치(1948.12.12)하고, 장평 임리와 봉림리에 경찰출장소 설치(1949.02.01)하였다. 또한 49년3월에는 관구경찰로 사용하던 서명을 시군명을 붙여 경찰서명으로 사용하여 “장흥경찰서”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다음호에 계속>

[사진4 ▲제19구경찰서 / 강수의 촬영

[사진5 ▲장흥감무서 개설기년 / 강수의 촬영

[사진6 ▲1948년도 당시 장흥경찰서 / 강수의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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