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양강(6)/옥봉과 예양강 - 용호(龍湖)로 부르며 예양강을 사랑했던 옥봉 시인(2)
■아, 예양강(6)/옥봉과 예양강 - 용호(龍湖)로 부르며 예양강을 사랑했던 옥봉 시인(2)
  • 김선욱
  • 승인 2023.05.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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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 백광훈이 부춘리 예양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있었다

시(詩) 기증할 만큼 풍암 문위세(3수), 청영정 문희개(2수)와 절친이었다
▲『옥봉 백광훈 시』, 학자원 출간.

 

 

 

 

 

 

 

 

 

 

 

 

 

 

 

 

 

▲『옥봉 백광훈 시선』, 평민사 출간.

 

‘부산면 부춘리’-1414년부터 출현

‘부춘동·부춘리’라는 마을 명은 향토지(『장흥읍지-1747』)에서 나오지만 그 이전, 옥봉 때보다 이전 시대인 1414년(태종 14년) 조선조 초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장흥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1414년에 현재의 부산면의 용반‧지천‧금자‧용계리와 장동면의용곡‧만년‧하산리가 합해져 용계면(龍溪面)에 속하고, 내안‧구룡‧유양‧기동‧부춘리 등 5개 리가 부산면에 속하였다”고 하면서 당대 ‘부춘리’라는 마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장흥마을 유래지』, p482)

이어 향토지 1747년 『장흥읍지』 부산방에 ‘부춘동(富春洞)’이 나온다.

1759년 『호구총수(戶口摠數)』에는 안곡(鞍谷)리, 내동리, 사두리(蛇頭里), 유양동, 기동, 고개리, 부춘정(富春亭) 등 8개 마을이 부산면에 속한다고 나온다. 여기서 마을 명은 부춘리(富春里)가 아닌 부춘정(富春亭)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부춘리의 청영정(淸暎亭)도 부춘정(富春亭)으로 부르게 되었던 듯 싶고, 부춘정이라는 정자 이름이 곧 부춘리를 뜻하는 이름으로도 불렀을 것으로 유추 된다.

그런데 1906년 행정 구역 개편에서는 고개리와 부춘리 대신 춘정리(春亭里)가 나온다. 이는 아마 당시 부춘리가 고개리, 도장골 등을 통칭하게 되면서 이전에 청영정이 있는 부춘동, 즉 ‘정자가 있는 부춘리’를 약술해서 ‘춘정리(春亭里)’라는 자연 마을 명으로 부르게 된 듯싶다.

왜 옥봉은 부춘리 앞강 예양강을 용호나, 용강으로 표현했을까. 옥봉이 자의적으로 시적 표현을 위한 자기만의 표현이었을 수 있지만, 당초부터 부춘리 예양강에 용암이 있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용강이요, 용호로 우의적(寓意的)으로 또는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자연마을 이름인 춘정리의 본명은 부춘리요, 부춘동이요, 부춘정이었다. 이 부춘리는 마을 앞강에 칠리탄(七里灘, 桐江)과 관련이 있고, 칠리탄 역시 부춘리와 함께 조선 초부터 불리었다면, 부춘리 강물 속에 잠긴 바위는 옥봉 이전부터 용암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옥봉은 용암이 잠겨있는 강이므로 용호로, 용강으로 지칭했을 수 있다.

부산면에는 부춘리 예양강에 잠겨 있다는 용암과 거의 유사한 ‘용(龍)자’ 지명이 유독 많다. 금자리 뒷산인 용두산(龍頭山), 심천의 ‘용 바위 산’과 용소(龍沼), 용반리(龍盤里), 용동리(龍洞里-유양리 3구), 용두리(龍頭里-구룡리 2구), 구룡리(九龍里), 흥용동(興龍洞-내안리 내동), 청룡동(靑龍洞-용반리 동쪽 골짜기), 용호정(龍湖亭), 부춘리의 용암(龍巖) 등이 그 예이다.

용암과 옥봉 ‘용호(龍湖)’의 각자(刻字)에 대하여

『장흥읍지』(정묘지) 부산방 산천 편에 부춘리 앞 물 속에 있는 용암(龍巖)을 설명하면서, 옥봉이 용암 상단부에 “옥봉의 글씨로 ‘용호(龍湖)’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白光勳書, 龍湖二字刻之”라고 하였다. 옥봉이 용호를 새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용암에 새긴 ‘용호(龍湖)’라는 글씨가 옥봉의 글씨라는 것이다. 거의 정확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일 수 내용으로 『장흥의 정(亭)‧사(謝)‧대(臺)』의 부춘정 편에 나온다. 즉 “정자 밑 강물에 잠긴 바위에다 ‘용호(龍湖)’라고 흘림체로 새겼으니 이는 옥봉 백광훈이 썼다고 전하며, 이에 대한 기록은 당시 청영정(淸暎亭) 주인 문익명(文益明 : 문희개 子)의 사적(事蹟)(‘남평문씨 영해공파보’)에 나타나 있다. 이를 보면, ‘時玉峯書龍湖於石面蓋所二龍閑臥之’라고 하였다. 이는 이곳 정자의 주인 문익명과 그의 부친 문희개의 충절을 찬양한 글로써 한가로운 두 마리의 용이 호수 속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고 설명했고 이런 내용이 『부산면지』 정자 편에 그대로 실렸다.

용암에 새겨진 ‘용호’라는 글자는 당연히 옥봉의 서체일 것이다. 옥봉은 에양강을 용호로 부르며 그에 대한 시도 여러 편 썼으니, 당연히 ‘용호’라는 흘림체 글씨 정도는 썼거나 그 글을 누군가에게 써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용호의 의미도 단순히 부춘리의 강을 용호로 자신이 애칭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희개에 대한 시 2편도 써 주었는데, ‘용호(龍湖)’라는 글씨를 써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 옥봉이 당대 그 스스로 용호 글씨를 용암에 새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후대에 문희개나 그의 아들 문익명이 새겼을 수 있다. 다만, 그 용호의 휘호와 용암에 새김의 의미에 대하여 ‘문희개와 문익명 부자(父子) 충절’ 운운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전혀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용호 각자(刻字)에 대한 앞에서의 충절 운운은 문 씨 측의 자의적(自意的) 해석이 짙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희개(1550 ~1610)‧문익명(1577~1655) 부자(父子)의 충절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희개는 임진왜란 때 숙부인 풍암 문위세를 도와 창의하고 많은 왜적을 참획한 전공으로 고창현감을 제수받았다. 또 정유재란 때는 아들 익명과 함께 참전했는데, 그가 칼을 맞아 상처를 입자 아들 익명이 진중으로 모신 후, 가신 김용배 등 10여 명과 주민 100여 명이 함께 분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러한 연유로 문희개 부자의 충절은 크게 평가받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시기성이 문제다.

옥봉의 시에 용호가 등장한 시기는 임진왜란의 발발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옥봉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492년 보다 10년 앞서인 1482년에 졸하였고, 그로부터 문희개 부자의 충절이 드러난 것은 17년 쯤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옥봉이 용호를 시어(詩語)로 사용할 당시에는 문희개 충절에 대한 찬양을 운운할 수 있는 시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용암에 새겨진 용호 글씨는 옥봉의 글씨였을 테지만, 옥봉은 자신이 용호라는 시어를 애용하고 애칭했기 때문에 쓴 글씨(草書)였을 것이고, 훗날 그 누구가가 그 글씨를 바위에 새겼고, 나아가서 문 씨 문중에서는 용호의 그 의미를 두 부자(父子) 충절 운운으로 확대 해석했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옥봉, 부춘리의 문위세‧문희개와 절친이었다

왜 유독 옥봉의 시에 용호, 청영정 관련 시가 많았을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 먼저 옥봉과 청영정이 있었던 부춘리에 살았던 문 씨들과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부산면지』 부춘리 마을 편 마을 유래에 의하면, “춘정마을(부춘리)은 조선조 초기 남평문 씨 현(賢)이 장평면에서 난을 피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인 고창 현감 문희개(文希凱)가 성촌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문희개의 부친 문위천(文緯川)이나 숙부들인 문위지(文緯地)‧문위세(文緯世) 그리고 조부 문량(文亮)도 ‘문씨 세보’ 등의 기록에 의하면 부춘리 출신으로 나온다. 구체적인 연보가 잘 알려진 풍암 문위세의 경우도 최소 30여 세까지는 부춘리에 살았던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문량의 장남은 문위천, 장손은 문희개였다. 그러므로 문위천‧문위지‧문위세 3형제들이 성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는 그들 일가는 모두 부춘리에서 살았을 것이고 특히 문량‧문위천‧문희개로 이어지는 문 씨 일족은 종가(宗家)로서 부춘리 성촌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들 3형제의 부친인 문량(文亮)은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로, 행오예포수군만호(行吾乂浦水軍萬戶, 품계-어모장군禦侮將軍)를 지냈던 인물이었다.

문량은 위천(緯天)·위지(緯地)·위세(緯世)의 3남을 두었다. 장남 문위천(1529~1573)은 자가 백장(伯章), 호는 춘정(春亭)이었다. 차남 문위지(文緯地,1532~1610)는 자가 중장(仲章), 호는 읍청정(挹淸亭)었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삼남 문위세(文緯世,1534~1600)’는 자가 숙장(叔章), 호는 풍암(楓庵)이었다. 임진난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용담현령을 역임했다.

이들 3형제 중 장자로 부춘리에 살았던 장남 백장 문위천은 부춘리 강 옆에 청영정을 세웠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고창 현감 출신의 청영정 문희개(淸潁亭 文希凱,1550~1610, 자 순거舜擧)였다.

옥봉은 이들 문 씨 3형제(백장·중장·숙장)와 동시대의 장흥인이자 선비로서 교유가 있었다. 3형제 중 셋째 숙장 문위세와는 옥봉이 3살 연하로 동연배인 데다 숙장이 시문(詩文)에 능한 문인(文人)이라는 성향 탓이었는지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지냈다. 옥봉의 시 중에 ‘문숙장에게 부치다 寄文叔章’의 2수와 ‘문숙장(문위세)에게 화답하며 和文叔章’ 등 시 3수가 나오는데 이 시에서 두 사람의 교유 관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 문 씨 3형제와는 옥봉뿐만 아니라 옥봉의 형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1522~1556)도 절친했던 듯싶다. 기봉도 백장 문위천에게 주는 시 ‘부녕관에서 지화의 운에 차운하여 문백장에게 주다 扶寧館次志和 韻贈文伯章’ 2수와 중장 문위지에게 주는 시 ‘중장과 헤어지며 贈別仲章’를 썼기 때문이다. (셋째인 문위세와 연관된 시가 없는 것은 아마 문위세가 기봉의 18년 연하여서 교유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순거 문희개(청영정 주인이었다)와는 청영정 등지에서 자주 어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이었는지 교유도 남달랐던 듯싶다. 이는 ‘문순거에게 부치다 寄文舜擧 -名希凱’ ‘문순거가 찾아오다 文舜擧來訪’의 2수의 시가 잘 말해준다.

이처럼, 부춘리에 살았던 문 씨 형제 중 문위세와 문위세의 중형 문위천의 아들 문희개와는 부춘리며 부춘리의 청영정, 부춘리 별장 등지에서 자주 어울렸을 옥봉이었으로 부춘리의 기억이 각별했을 성싶고, 그런 연유로 부춘리의 예양강이었던 용호며 청영정 등에 관한 시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다음은 문 씨 3형제 중 유독 친교가 깊었던 ‘숙장 문위세’에 대한 시 3수, 당시 청영정의 주인이었을 ‘순거 문희개’에 대한 옥봉의 시 2수이다. (이 시들의 번역과 해설 등은 『玉峯 白光勳 詩』을 참조했다)

옥봉, 문위세 관련 시 3수

① 숙장에게 부치다 2수 寄文叔章 二首-名緯世.

산속 비는 흙 질 만큼 오지도 않고 / 山雨不成泥。

산 구름은 괜히 제냥 돌아갔는데 / 山雲空自廻。

그 누구가 무릉 병객 딱해 여길꼬? / 誰憐茂陵病。

저물도록 거문고 터 바라만 보네 /日暮望琴臺。

*무릉병(茂陵病) : 한나라 대표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의미하는 무릉병객(茂陵病客)의 준말.

*금대(琴臺) :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사천성(泗川省) 성도 완화계(浣花溪)에 있었다고 한다. 사마상여는 거문고 악사 탁문군(卓文君)을 지독히 사모했다.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詩/五言絶句/1989/송준호 역

②또 한 수 又

호수 위서 일찍 옷깃 나란히 잡고 / 湖上曾聯袂。

달빛 속에 꽃 배 띄워 돌아왔는데 / 蘭舟泛月廻。

되려 자네 (세상을 피해) 숨었다는 얘길 듣고서 / 翻聞葉裏子。

노래하던 옛날 대(觀望臺)서 애만 태우네 / 腸斷舊歌臺。

*섭이자葉裏子 : 직역은 ‘나무 잎 속에 든 자’인데, 여기서는 자연 속에 숨어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詩/五言絶句/詩/1989/송준호 역

③문숙장에게 화답하며 和文叔章

저 건너편 물소리 들리어 와 / 隔水聲相聞

아침 내내 머릴 괜히 돌려 보는데 / 終朝首謾回

비낀 바람 가랑비를 불어 내리니 / 斜風吹細雨

흥취는 그냥 낚시터로 찾아 가누나 / 興入釣魚臺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別集/玉峯集後序三之下/詩/1989/송준호 역

위 시 3수는 옥봉과 숙장(문위세)간의 우정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 준다.

시 ①은, 사마상여가 과부 탁문군(卓文君)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타던 금대(琴臺)만 향해 저물녘까지 애타게 바라볼 뿐이던 것처럼, 옥봉도 절친인 문숙장이 있는 곳을 마치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사모하듯 간절히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 ②는, 옥봉이 예전 호수(아마 용호였을 듯)에서 달빛 맞으며 꽃 배 띄워 놀던 때를 회억하고 숙장이 은거했다는 애기에 더욱 숙장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인 옥봉의 마음을 그렸다.

시 ③은, 옥봉이 자기가 사는 마을(영암)에서 강물소리를 듣고 낚시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 머리만 굴려 보는데 바람결이 가랑비를 불러 와 낚시질 하고 싶은 흥취의 심경만 낚시터로 가게 한다는 내용의 시로, 시인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그런데 시인은 숙장에게 이처럼 자기의 소소한 일상마저 담아 보낸다. 가히 우정의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옥봉, 문희개 관련 시 2수

①문순거가 찾아와서 文舜擧來訪

뒤란 가득 송화 져서 다시 봄은 없지 했다 / 松花滿院更無春

문득 그대 온 게 기뻐 그래 두건 매만지곤 / 却喜君來爲整巾

서로 녹음 진 시냇가에 앉자자니 / 相引綠陰溪畔坐

낮 꾀꼬리 자꾸 울어 사람 만류하나 싶네 / 午鶯千囀似留人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詩/七言絶句/1989/송준호 역

②문순거에게 부치다 寄文舜擧 -名希凱

종이 없고 붓도 없으니 / 無紙亦無筆

산마을의 민요나마 회포를 푸니 / 寫懷山竹枝

그대 오길 바랄 수는 없다고 해도 / 君來不敢望

오늘은 그냥인 날 보다는 낫네 / 此日勝常時

*산죽지(山竹枝) : ‘산’은 산마을이며, ‘죽지(竹枝)’는 죽지사(竹枝詞)(민요)이므로 ‘산마을의 민요’라는 뜻이다.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詩/五言絶句/1989/송준호 역

시 ①,②를 보면, 옥봉과 문순거(문희개)의 교유 정도가 가늠된다. 서로 양가를 오고간 듯하다. 시 ①은 옥봉의 집을 찾아온 순거가 너무 기뻐 두건도 고쳐 쓰고 나가 만났고, 시냇가에 앉아 있으니 꾀꼬리도 두 사람의 만남을 시샘이라도 한 듯 울어대며 만류한다는 내용의 시다. 두 사람간의 우의를 추측하게 하는 시다.

시 ②도 두 사람의 우의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는 시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는 편지도 보낼 수 없는 형편이어서 민요나마 부르며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보니, 그동안 만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어 온 다른 날과 달리, 민요를 부르며 회포를 푼 오늘은 다른 날보다 낫다는 식으로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의 정도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 시에서 보듯, 옥봉은 숙장이나 순거와 우정이 각별했던 듯싶다. 이런 이유로 옥봉은 자주 문위세, 문희개가 사는 부춘리를 찾았고 부춘리의 청영정과 용호도 자주 보게 되었고, 그러한 부춘리 일대에서 얻은 시적 상상력과 시정(詩情)을 시화(詩化)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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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구 편저,1998, 장흥의 , 장흥문화원, p11.

2) 장흥흥지(정묘지)에 청영정(淸暎亭)은 문희개가 세운 것으로 나오는데, 풍암 문위세 유고집 3(1759, 1819년 간행)에 의하면 청영정은 1560년에 문희개의 부친 문위천이 건립했고, 처음의 이름도 자신의 호를 따 청영정(淸潁亭)이라고 했다고 나온다. 따라서 옥봉이 청영정을 드나들었을 때 문희개는 부친이 지은 청영정의 주인이자 관리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3) 扶寧舘次志和韻贈文伯章二首志和松川字: 蓬萊一秋朢南海白雲邊見子聊相慰離懷已半年松川今卽吉無恙菊花村知我歸鄕樂淸詩又細論-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岐峯集卷之二//五言絶句/2005

4) 贈別仲章 : 西溪氷雪凈三夜好同襟蕙畮薰薰臭梧岡噦噦音風期知在昔來往可從今凝睇茅山路靑靑萬竹林-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岐峯集卷之二//五言四韻/2005

5) 송주호 편저, 2020, 玉峯 白光勳 詩, 학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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