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옛터산책4 - 선비가 숲을 이룬 고을. “장흥”
■장흥의 옛터산책4 - 선비가 숲을 이룬 고을. “장흥”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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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梁基洙

장흥향토사연구회장

고려시대 장흥
고려시대 이전 장흥

내 자동차의 내비게이션(Car navigation system)은 외지에서 장흥군 경계를 들어서면 “건강 휴양촌 정남진 장흥군 입니다”하고 예쁜 여자 목소리로 안내한다. 그런가 하면 화순군으로 발길을 옮겨 그 경계에 들어서면 또한 예쁜 목소리로 “세계문화유산 고인돌이 잠든 화순군 입니다”하고 안내한다. 이러한 안내는 전국의 시군단위로 안내를 한다.

이러한 안내문의 선정을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제작하는 회사는 어떻게 선정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홍보문구를 각 시·군(市·郡)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 회사에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돌이켜 보니 한때 장흥군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역현안 구호로 선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를 지금도 장흥군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장흥군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장흥을 “정남진(正南津)”이라는 별칭을 곧잘 입에 올리고 장흥에 대하여 조금은 안다는 관광객들이나 향우들은 “문림(文林)고을”이나 “문림의향(文林義鄕)”을 별칭으로 부른다.

장흥군이 별칭을 갖게 됨은 1981년 12월부터 장흥의 행정을 맡아 책임했던 신계우(申季雨) 군수가 군민의 자긍심을 기르고,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82년 5월부터 장흥은 “의향(義鄕)이다”라는 별칭을 처음 말하였다. 이후 신(申) 군수는 1982년 9월 승주군수(昇州郡守)로 전임되었음에도 장흥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장흥문화” 제6호에 “의향장흥(義鄕長興)”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자, 군민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대를 이은 박준식(朴俊植) 군수는 군정구호를 “화합 약진하는 의향장흥”으로 하

고려시대 장흥
고려시대 장흥

 

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신(申) 군수는 “의향”에 대한 글자의 뜻과 의향의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과거적 의미의 의향으로 장흥군은 다른 고장보다 많은 의병이 있었으므로 이의 역사적 위업의 전통을 선양하는 뜻이라 했다. 둘째는 현대적 의미의 의향으로 민주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시대의 국민으로서 밝고 맑고 깨끗한 정의사회를 이룩해야하는 군민적 사명을 말했다. 셋째는 미래적 의미의 의향으로 자자손손 대대로 의로운 사람들이 되어 이 고장을 의롭게 하는데 있다. 하였다.

한때나마 장흥의 행정을 책임졌던 수장으로서 군민들의 성향을 간파하여 이러한 별칭을 가지게 했음은, 장흥군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두터웠음을 느낄 수 있는 한 부분이다. 또한 군민들을 일깨워 군민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밝고 복된 고장이 되도록 하고자 했음은 행정가로서 대단한 지혜를 발휘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신(申) 군수는 “의(義)”라는 글자 뜻에만 큰 의미를 두고, 과거, 현재, 미래의 해석을 하면서도 이러한 “의”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장흥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발전 시키고, 군민들에게 내재된 문화의식을 높여 장흥인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하는 윤수옥(尹洙鈺) 양기수(梁基洙) 김동옥(金東玉) 김상찬(金商燦) 등 17명의 젊은이들이 모여“장흥문화동호인회(長興文化同好人會)”를 조직하고 그들이 모여 ‘의(義)는 문(文)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명하고 설명하여 장흥인으로서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문림(文林)고을”과 “문림의향(文林義鄕)”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하였다.

“정남진(正南津)”이라는 별칭은 2006년도부터 사용하였다. 당시 군정을 책임한 김인규(金仁圭) 군수는 지역의 특성을 살린 군정 홍보로 인구를 증진 시키고 지역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당시 군정구호를 “느린 세상 건강한 장흥” 정하면서 장흥군의 위치를 쉽고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과제를 군 산하 공직자들에게 공모하여 “정남진(正南津)”이라는 문귀를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그 제안을 냈던 공직자(朴松基)는 서울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을 중심에 두고 정북쪽으로는 ‘중강진(中江鎭)’에 이르고 정남쪽으로는 장흥군이니 전 국민이 쉽게 기억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여 채택되었다. 이 제안이 채택되어 발표되자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강진’을 기억하고 서울의 동쪽인 강원도 강릉에 ‘정동진(正東津)’이라는 지명을 기억해 ‘정남진’이라는 별칭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아, 용산 남포마을에서는 표지석을 세우는가 하면, ‘유치면농협’은 장흥읍과 부산면농협을 합병하면서 ‘정남진장흥농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후에 장흥군에서 관산 삼산마을에 정남진 표석과 전망대를 세웠다. 그러자 인천광역시 서구에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정서진(正西津)’이라는 별칭과 ‘정서진’이라는 도로명까지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남진이라는 별칭은 관광객이 장흥군의 위치를 쉽게 기억하게 할 뿐 장흥군민의 성향이나 자긍심과 자존감을 나타내는 별칭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장흥군민은 물론장흥을 왕래한 관광객이나 향우들은 “문림(文林)고을”이나 “문림의향(文林義鄕)”의 별호를 즐겨 부른다.

용산면 남포에 세워진 '정남진 표지석'
용산면 남포에 세워진 '정남진 표지석'

여기서 “문(文)”이란 단순한 글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학문(學問), 학예(學藝), 문학(文學), 예술(藝術) 등을 이르는 말로 다시 표현하자면 곧 ‘선비’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한 말로 “선비들이 숲을 이룬 고을”임을 나타낸 별칭이다. 그러나 문림(文林)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깊이 있게 파악하지 못한 분들은 “문인(文人)을 많이 배출한 고을”로 그 의미를 축소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예부터 장흥은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 1522-1556) 옥봉 백광홍(玉峰 白光勳 1537-1582) 형제를 비롯해 수우옹 위세직(守愚翁 魏世稷) 등 많은 문사(文士)를 배출하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청준(李淸俊) 송기숙(宋基淑) 한승원(韓勝源) 위선환(魏瑄煥) 김제현(金濟鉉) 김녹촌(金鹿村) 이성관(李成寬) 등을 비롯해 문단에 등단한 문인들이 150여명에 이르니 단순하게 문인(文人)들의 고장으로만 바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장흥인들에 대한 성품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파악한 사람들은 장흥이 단순한 문인들의 고장이 아니라 선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흥은 한반도 서남해의 중심고을로서 고려시대부터 중앙에서 벼슬을 받은 부사(府使, 종3품)가 고을의 수령으로 업무를 보아 오면서 인근 고을까지 관장하여 왔기 때문에 이를 중심적으로 시행하는 관리들로서는 중앙으로부터 하달되는 명령과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백성들의 뜻을 다시 중앙으로 진달하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어느 고장보다도 많은 공부를 하여야 했고 또한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켜야 했다. 곧 문자를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일은 전근대 사회에서 단순히 글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글을 알면 그에 걸맞는 사상과 행동이 뒤따라야 했다. 이를 우리는 ‘선비’라 했다.

‘선비’는 순수 우리말이다. ‘선비’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면 “①지난날 학식은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 ②학덕을 갖춘 이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 ③어질고 순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한자어에서는 주로 ‘사(士)’자가 선비의 뜻으로 쓰이며 ‘유(儒)’자나 ‘언(彦)’자도 선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비’란 어원적으로 ‘어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한자의 ‘사(士)’자도 그 의미에서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을 가르킨다. 이러한 사(士)의 성격은 고대 중국에서는 관직의 명칭이자 신분계급의 하나이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맹자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관직과 분리된 ‘인격(人格)’의 측면이 강조되어 이상적인 인간의 하나가 되었었다. 어느 모로 보나 결함없이 신(神)에 가까울 정도로 완전성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상이 ‘성인(聖人)’이라면 선비는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별로 흠이 없는 인간을 말한다. 사람이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무망(無望)에 가까운데 비해 선비는 수양과 학문의 실천을 통하여 성취가 가능한 인간상이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우선 글을 깨우친 이들은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수련으로 자질을 갖추었다. 선비는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체득하고 실천함을 본연의 모습으로 삼고 이를 통한 인격적인 성취에 목표를 두었고, 공직자로서의 선비는 결코 부귀 따위로 자신의 영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옳은 것에 대한 굳은 신념과 부정에 대한 항거로 일관하는 자세를 보여 왔다. 선비는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학문과 도리를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본연의 자세이자 임무로 삼아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본분을 다하였다.

관산읍 삼산에 세워진 정남진 표지판
관산읍 삼산에 세워진 정남진 표지판

따라서 선비는 인격과 양심, 그리고 도덕성을 최고의 가치로 하여 부단히 자기를 연마하면서 개인보다는 사회를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여 신념과 용기를 갖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선비는 세속적 가치가 아닌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義)’ 를 추구하는 정신이며, 이 가치를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것이다(殺身成仁) 이런 정신은 우리 민족이 침략을 당했을 때 항거하는 태도로 나타났고, 외세의 문물과 세력이 밀려들자 전통에 배반되는 이념들을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과 신념을 확고하게 하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지켜나가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사조를 받아들여 개혁을 추구하면서 자강정책(自彊政策)을 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비들의 활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면 그 기개(氣槪)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났다. 장흥의 선현들의 활동사항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위제(文緯世)는 그의 네 아들 원개(元凱) 원개(英凱) 형개(亨凱) 홍개(弘凱)와 사위 백민수(白民秀) 조카 희개(希凱) 등에게 의병을 모집하여 참여케 하고, 자신은 군량을 조달하여 전라좌의병군(全羅左義兵軍)이 성주성(星州城) 수복전(收復戰)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다. 당포(唐浦) 지포(芝浦) 남해(南海) 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변홍달(卞弘達) 홍건(弘建) 홍적(弘迪) 홍선(弘渲) 형제들과 종형제간인 홍원(弘源) 홍주(弘州) 홍제(弘濟) 홍량(弘亮) 홍주의 아들 덕황(德璜)과 홍건의 아들 덕장(德章). 그리고 홍적의 제종질인 연수(延壽)와 그 아들들은 초계변씨(草溪 卞氏) 일문으로 12의열(義烈)을 낳았다. 또한 위방(魏魴)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한산도 해전에서, 김세호(金世浩)는 대함 8척을 건조하여 명량(鳴梁)해전에서 역전 끝에 전사했다.

특히 우리 고을 회진(會鎭)에서 출전한 충무공 이순신과 마하수(馬河秀) 마성룡(馬成龍) 마위룡(馬爲龍) 백진남(白振南) 정명열(丁鳴說) 문영개(文英凱) 등을 비롯한 장흥의 선비들은 물론 상민들까지 의병으로 적극적인 참전으로 명랑대첩(鳴梁大捷)을 승리로 이끌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문과 급제자로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였던 정경달(丁景達)은 금오산(金烏山)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죽령(竹嶺)에 6진(鎭)을 설치하여 요격전을 펴 승리를 거두었다. 뒷날 정경달은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의 활동 또한 훌륭하였다.

이토록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일어선 선현들의 거룩한 넋은 한말이후 일제의 침탈 과정 중에도 국권(國權)을 되찾기 위한 애국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영엽(金永燁), 박중일(朴重一), 백경인(白景寅), 이남재(李南載), 위계룡(魏啓龍), 오일록(吳日祿) 등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 乙巳條約, 乙巳勒約)이 있자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운암 정두흠(雲巖 鄭斗欽)은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자(庚戌國恥) “나라가 망하여 죄가 많은데 죄를 받을 나라가 없으니, 선현을 따라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도다 (國破難容無救罪 莫如身死逐先賢)” 하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 부인 한씨(韓氏) 또한 “나라가 망하여 지아비가 세상을 버렸는데 나 혼자 살아 무엇 하리오.(國破夫死 吾何獨生)”하면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위석규(魏錫奎), 박호암(朴虎岩), 최종오(崔種五), 문병전(文秉詮), 김용관(金容寬) 등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가 하면, 김범식(金凡植), 김두환(金斗煥), 길인주(吉寅柱), 고서동(高瑞東), 위종관(魏鍾官), 유재성(劉載星), 문병곤(文秉坤) 등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야학을 실시하여 민족사관 확립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비밀결사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한 길양수(吉梁洙), 정진수(丁瑨壽), 정종배(丁鍾蓓) 등은 농민조직 확대와 소작쟁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학생동지회 책임자로 활동한 고영완(高永完)은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는 등의 간접적인 독립운동을 한 김정상(金正祥). 그리고 천도교 중앙경리부장을 지내던 김재계(金在桂)를 비롯한 천도교도 김재반(金在班), 황생주(黃生周) 등은 각 읍면별로 책임자를 지정 기미년(己未) 3월15일 만세운동을 하는 등 외적의 침입에 항거했던 선현들의 끊임없이 노력하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장흥의 선비들은 어느 고을의 선비들 보다 사회의 양심이자로서 또한 지성인으로서 인격을 갖추어 각 시대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로서 또한 지성인으로서 책임을 감당해왔었다.

그런가 하면, 장흥은 지형적으로 산과 강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산물이 풍부한 관계로 타 지역에 비해 선비들이 문·사·철(文·史·哲)중에 문(文)에 치중하여 철(哲)과 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타 지역 선비들의 사조(思潮)와는 비교가 된다. 특히 영남지역(嶺南地域)의 선비들은 철(哲)과 사(史)는 지배 이데오르기에 입각하여 이성적 측면에서 인간의 성정(性情)과 생활규범을 탐색하려는 것이었다면, 장흥의 선비들은 문(文)에 비중을 두어 보다 감성적 측면에서 인간의 성정과 자연을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형상화 하는 경향이 무엇보다 강했다. 이러한 파악은 지난 90년대 초 전라남도내 각 고을에서 선현들이 남긴 유고집(遺稿集)과 문집(文集)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흥관내 선현들의 유고집과 문집이 인근 고을에서 조사된 문집보다 2∼3배가 많은 수량인 115권여가 조사되어 이를 반증하였다.

세속에 명리를 좆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올바른 도(道)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 곧 선비이다.

사회의 근본을 지탱하는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시대에 우리가 당면한 현세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명쾌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참된 선비가 누구인가?

인간의 정신활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새로움과 진보적 가능성은 그 집단 운명의 고전적 전통에서 출발했을 때에만이 보장 받을 수 있다.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부족과 민족의 정신사에 대한 홀대가 그 문화를 병들게 하거나 외국문화를 수입한 것으로 끝내거나 이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문화에 얼이 빠지게 하는 경우를 우리 종종 보아왔다.

우리 장흥은 예부터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어우어진 살기 좋은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또한 한반도 서남해 중심에 위치하여 서남해지역의 행정을 선도하는 선비의 고을이었다. 이즈음에서 장흥인들은 이를 다시 한 번 상기하여야 할 때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동시지방선거에 지역의 발전을 위해 주민을 대표하여 서로 일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옛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처사(處士)라도 선비로서의 기개(氣槪)를 잃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며 사회의 공론(公論)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보여 왔던 것처럼 우리 장흥인 모두는 선비의 후예로서 지역의 발전을 위해 공론을 모을 것이다.

당선된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또한 행정운영의 감시자인 의원으로써 제발 그 본분을 잊지 말고 모아진 군민의 공론(公論)이 무엇인가를 수시로 파악하여 공론(空論)이 되지 않도록 이를 겸허하게 받아드려 주민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朝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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