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7)/옥봉과 예양강 - 용호(龍湖)로 부르며 예양강을 사랑했던 옥봉 시인(3)
기획 - 아, 예양강(7)/옥봉과 예양강 - 용호(龍湖)로 부르며 예양강을 사랑했던 옥봉 시인(3)
  • 김선욱
  • 승인 2023.05.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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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에겐 ‘용호=청영정=부춘리’는 동의적(同意的) 의미였다

보림사 오가며 -부춘리 늘 쉬어갔을 터, 부춘리는 옥봉 시(詩)의 보고였을 듯

김선욱/시인, 본지편집인

 

 

▲옥봉이 썼다는 ‘용호’의 흘림체 글씨

 

▲옥봉이 용호로 부른 부춘리 예양강 전경

 

<지난호에 이어서>

⑥부춘 별장에서 富春別墅

석양 무렵 호수 정자서 볼젠 / 夕陽湖上亭

봄 풍경은 호수 풀 뿐인가 했더니 / 春光在湖草

달빛 환한 산 앞 정자에서 보니 / 明月山前榭

꽃그늘도 볼수록 다시금 좋네! / 花陰看更好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詩/五言絶句/송주호 역

 

 

*별서(別墅) : 별장. 농장이나 들에 한적하게 지은 집

용호 등 부춘리와 관련된 옥봉의 시에서 유일하게 ‘부춘(富春)’이란 지명이 등장한 시다. 이 시에서 호수(용호)도 나오고 정자(청영정)도 나온다. 굳이 그 호수를 용호니, 그 정자를 청영정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시인은 ‘부춘’이라는 시어를 통하여 그 호수는 용호이고 그 정자는 청영정임을 전제하고 작시했을 것이다.

송주호 교수는 이 시 해설에서 “…이 작품은 작자가 여기에(문희개 별장인 부춘원림富春原林을 말한다) 머물면서 읊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 이 작품은 기구(起句)와 승구(承句)가 상관적인 전반부로, 전구(轉句)와 결구(結句)가 상관적인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 시간은 석양 무렵이고 후반부 시간은 달이 밝은 밤이며, 전반부 공간은 호수 위의 2층 정자이고, 후반부 시간은 산 앞의 단층 정자이다. …우리가 시인에게 이 시의 감흥을 말해 달라고 하면 ‘석양 무렵 호수 위의 정자에서 볼 땐 호수 풀뿐인가 했더니 밝은 달빛 환한 산 앞 정자에서 보니 꽃그늘도 볼수록 다시금 좋네!’라고 답해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역해에서 ‘…에서 볼제’ ‘…뿐인가 했더니’ ‘…서 보니’ ‘…좋네’ 라는 감탄형 어미 등을 넣은 것은 이 시 작자인 옥봉의 모국어 감각과 그 활용의 솜씨가 체화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보림사 나들이-부춘리서 늘 쉬어갔을 터

옥봉은 ‘○○스님에게 지어주다 贈○○上人’등 스님 소재‧제재의 시나 사찰 소재로 쓴 시들이 무려 70여 편에 이른다.

또 옥봉에게는 고향의 대표적인 사찰이었을 보림사를 소재로 한 시도 10여 수에 이를 정도로 많다. 이 사실은 옥봉이 보림사를 자주 찾아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마 고향 장흥을 찾을 때마다 거의 보림사를 방문했을 성싶다.

옥봉에게 보림사는 그의 장형인 기봉(岐峯)과 함께 글을 읽고 공부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사찰이었다. 시 ‘보림사에서 서상사의 운을 따라 짓다 寶林寺 次徐上舍’의 부제가 “예전에 형님과 함께 여기서 책을 읽으며 공부하였다 舊與伯氏讀書于此”였다. 아마 기봉 형님과 보림사에서 독회할 때 서상사(徐上舍) 등 여러 선후의 지기(知己)들과 함께하며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보림사에서 기봉 형님을 기억하는 이 시에 서상사가 함께 나오는 이유이다. 특히 이 시에서 말한 서상사의 경우, 옥봉이 그의 별장을 찾아가 시를 짓기도 하고 그와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함께 시를 짓기도 했던 격의 없는 시우(詩友)였다.

이처럼 옥봉에게 보림사는 기봉 형님이나 다른 여러 시우(詩友)들이 함께 우정을 나누며 공부도 함께 하였던 아름다운 기억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보림사를 자주 찾았을 것이다.

해남(당시는 영암군 )에서 강진을 지나 장흥을 경유하여 예양강 상류에 있는 보림사를 찾아갈 경우, 장흥에서부터는 거의 예양강을 마주하거나 강변길을 따라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장흥에 들어서자마자 장흥부 입구였을 사인암부터는 아예 예양강을 등에 짊어지고 보림사까지 오갔을 터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예양강이 예외없이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오래도록 쉬어갈만 한 중간 쯤에 부춘리가 있었고, 용호가 있었고, 청영정이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격의 없이 반겨줄 문위세며 문희개도 있었다. 술을 좋아하여 예양강변에서 늘 취해 있기 일쑤였던 옥봉은 취기로 인해 그 예양강의 서정을 온몸으로 읽었을 것이다. 늦은 겨울에서 이른 봄철이면 부춘리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가 더욱 옥봉을 유혹했을 터였다.

예양강을 비롯하여 부춘리의 용호, 용강에 대한 시가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터벅터벅 거의 하룻길을 예양강과 이웃하며 오르내렸을 옥봉이었다. 옥봉의 시 중에 강의 아름다운 서정을 그린 시들이며 나룻터, 뱃사람 등 강에 대한 시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호=청영정=부춘리’ 동의적(同意的) 의미

옥봉에게 ‘용호‧청영정‧부춘리’는 동의적(同意的)인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도 늘 보던 고향의 강이기에, 거기다가 하나의 어휘로도 의미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용호‧청영정‧부춘리’는 ‘용호=청영정=부춘리’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세 어휘 중 하나만 써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 어휘도 대개는 시제(詩題)에만 활용할 뿐 시어로서 사용은 피했다. 오언절구(五言絶句) 등 정형시에서 자수(字數)등 한정된 시어 선택에서 굳이 시제로 표현된 동의(同意)의 시어를 반복해서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의 완성도와 은유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다는, 더욱 다양한 사유(思惟)도 함유할 수 있다는 자신의 독특한 시 문법(文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부춘리의 예양강 시에서 자주 시제로만 사용한 ‘용호(龍湖)’의 표현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 즉 시에서 지명을 확정하지 않은 모호한 그 표현으로 옥봉의 ‘용호’를 부춘리 ‘용호’로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쉽게 지명 따위를 언급하지 않은 옥봉도 시 ‘거문고 악사 서인준에게… 贈琴師徐仁俊’에서는 “용호와 천포사이 오며 가며 하는 채로 來往龍湖泉浦間”라고 지명을 분명히 표기하여, 용호가 장흥의 부춘리 예양강임을 확연히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시인들에겐 사정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옥봉처럼 십 수 년을 지켜보거나 찾았을 부춘리 예양강이나 영호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처음으로 쓰는 그곳에 대한 시였기에 사전에 그곳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을 것이고 그곳과 관련된 지명 등 최소 2가지 어휘 -그것도 시제(詩題) 등을 포함해서- 정도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장흥이 고향이 아닌 외지 시인 계은 이정립(李廷立,1556~1595)과 백호 임제(1549~1587)의 경우가 그랬다. 백호야 옥봉과 절친이었으므로 그렇다 치더라도, 계은이 옥봉과 동시대이긴하였지만, 용호‧청영정 관련 시를 작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계은의 경우, 당대 옥봉과 자주 교류하였거나 친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부춘리 문희개를 매개로 하여 어느 만큼은 알고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또 그가 문희개와는 친교가 돈독하였기 때문에 옥봉과는 상관없이 문희개가 그곳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이고, 그에게 부탁한 그곳에 대한 즉 부춘리의 ‘청영정’이며 ‘용호’ 관련의 시를 작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문희개(1550~1610) 보다 6년 연하였던 계은은 문희개와는 성균관서 함께 수학하였던 질긴 인연도 있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계은은 문희개로부터 시를 청탁받아 작시하여 주고 직접 장흥과 부춘리를 방문하여 청호정 등의 시를 남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계은은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으로 형조참의, 좌승지, 예조참의를 지냈던 문인이었다. 그는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해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으며, 이조좌랑 때 호남어사가 되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기도 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좌승지·직제학 등을 거쳤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1594년에는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사직 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은집』을 남겼는데, 이 『계은집』은 1708년 목판본으로 『계은선생유고(溪隱先生遺稿)』로 간행되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될 만큼 당대의 대학자였고 저명한 문사(文士)였던 계은은 유고집에서 장흥 관련 시 5수를 남겼다.

이 시들은 ①‘문진사에게 주다- 희개 贈文進士 -希凱’ ②‘청영정 淸映亭’ ③‘장흥 문희개가 갑신년 가을 글(詩)을 지어줄 것을 청하여 원운에 차운해 주다. 을유년 봄 구황어사로 호남에 도착하니 문희개가 글을 보내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여 시가 이루어졌다. 장흥 갈 때 추첨이 있어 문희개 집을 지나가게 되어 또 앞 시운(前韻)을 사용한다-2수 長興同年文上舍希凱。求題其亭。甲申秋。次元韻書贈。乙酉春。以救荒御史。行到湖南。上舍作書懇邀。願成詩讖。長興適有抽栍。因過文家。又用前韻。二首. ④‘병술년(1586) 가을 남쪽 사우(士友) 중 옛날 놀던 감회와 생각을 시로 지어 부쳐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는 장흥 땅 문희개다 丙戌秋。有南中士友作書見寄。感念舊遊有作。友卽長興地同年文希凱也’ 이다.

계은의 시 5수는 시제며 그 부제에서 문희개가 시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쓴 시이거나 문희개 집을 찾아가 쓴 시, 부춘리의 청호정을 보고 쓴 시로 이러한 시를 쓴 시기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이런 시에서 거의 ‘용호’가 나오고 있다.

계은의 시를 보자.

부춘리, 용호, 청영정을 증언한 계은 이정립

①문진사에게 주다 - 희개 贈文進士 -希凱

옛날 봄날 궁(성균관)에서 놀던 추억 / 舊遊追憶泮宮春

손잡고 생각을 말씀하던 모습이 순박했다 / 握手平生說景淳

그때 즐거워하던 정은 이민(李敏) 같았고 / 當日歡情如李敏

지금 사귐(교제)(交道은 원빈(元賓)의 무리다 / 至今交道類元賓

서릉동 토방에서 등불 아래 담소하니 / 土床燈話西陵洞

저물녘 공신 집(北第隣)은 피리 소리 원망스럽다 / 怨笛斜陽北第隣。

한번 죽음과 삶 갈리면 어디에도 물을 곳 없어 / 一隔死生(或作泉臺)無問處。

눈물 수건으로 감히 상대할 수 없구나 / 不堪相對淚沾巾。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溪隱先生遺稿/詩/七言四韻/1991/김규정 역

*이민(李敏,생몰 미상) : 후한 말의 하내태수로 도리(道里)를 알며 이상향을 꿈꾸었던 사람. 하나라 태수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 명사가 되었는데, 요동태수로 공포 정치로 철혈 지배권을 확립했던 공손도(公孫度)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통해 어디론가(그의 이상향)으로 도망가, 그가 간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원빈(元賓,766~794) : 당나라 문인.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던 한유(韓愈, 768~824)의 제자다. 문장에 능하여 한유(韓愈)와 막상막하로 일컬어졌다. 한유의 답서에 (짧은 글임에도) 아홉 번이나 원빈(元賓)을 극찬하며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강조했다. 여기서는 한유와 원빈의 관계처럼 절친인 관계, 또는 지나치게 자기과시가 심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비유했다고 할 수 있다.

*북제린(北第麟) : 하후연(夏侯嬰, ?~기원전 172)이 큰 공을 세워 가장 좋은 저택을 하사받았다. 왕의 북궐에 인접한 집이란 의미로 보통 ‘공신의 집’을 가리킨다.

위 시에서처럼 문희개는 성균관에서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 연유로 이후 계은과 문희개는 친교가 계속 이어졌고, 문희개는 이런 과거의 인연으로 계은에게 시를 써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②청영정 淸映亭

비 오듯 꽃 지자 가을 물 같다 / 落花如雨水如秋

봄을 다한 용호에 타향 나그네 노닌다 / 春盡龍湖客遠遊

불빛 난간 비추어 밤 낚시터 알고 / 火照雕欄知夜釣

강 건너 반초 물가에 사람 소리 난다 隔江人語在芳(一作 空)洲

*‘방芳’(향기, 꽃) : 방(芳)자가 어떤 본(本)에는 ‘공空’(빈 물가) 자로 돼 있다.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溪隱先生遺稿/詩/七言絶句/1991/김규정 역

이 ‘청영정’ 시는 계은이 직접 부춘리 문희개를 찾아가 청영정에서 묵으면서 썼던 시로 보인다. 계은은 이 시에서 시제로 ‘청영정(淸暎亭)’을 명시한데 이어 시어에서도 청영정 앞에 흐르는 예양강을 ‘타향의 나그네가 노니는 가을 물 같아 보이는 용호’로 표현하면서 그 용호를 바로 ‘청영정의 강’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③‘장흥 문희개가 갑신년 가을 글(詩)을 지어줄 것을 청하여 원운에 차운해 주다. 을유년 봄 구황어사로 호남에 도착하니 문희개가 글을 보내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여 시가 이루어졌다. 장흥 갈 때 추첨이 있어 문희개 집을 지나가게 되어 또 앞 시운(前韻)을 사용한다-2수 長興同年文上舍希凱。求題其亭。甲申秋。次元韻書贈。乙酉春。以救荒御史。行到湖南。上舍作書懇邀。願成詩讖。長興適有抽栍。因過文家。又用前韻。二首’

강남마을(장흥 마을)은 물이 하늘이 되니 / 江南村巷水爲天

귤도(橘島) 단풍나무 숲 어느 곳에 있는가 / 橘島楓林何處邊

청영정 앞에는 한 조각 바위 있으니 / 淸映亭前一片石

혹 개울 손님 후일에도 잠 잘 수 있나 /倘容溪客異時眠。

-이하 시 ‘其二’ 중략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溪隱先生遺稿/詩/七言絶句/1991/김규정 역

* 귤도풍림(橘島楓林) : 옛사람이 꿈꾸던 이상향을 비유한 듯.

이 시에서도 시인은 청영정과 청영정 강물에 잠긴 바위를 끌어내 그 바위가 용암이고, 그래서 그 강이 용호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④‘병술년 가을 남쪽 사우 중 옛날 놀던 감회와 생각을 시로 지어 부쳐달라고 하였다. 그 사우는 장흥 땅 문희개다 丙戌秋。有南中士友作書見寄。感念舊遊有作。友卽長興地同年文希凱也

동남의 제일고을에 다 모여 都會東南第一州

작년에 배 놀았던 모임 기억한다 泛槎曾記去年遊

용진(용의 나루) 입구에서 꽃비 만나고 龍津渡口逢花雨

청영정 변에는 낚싯배 묶여 있었지 淸映亭邊繫釣舟

-이하 4구 중략

이 시는 을유년(1585)에 부춘리를 방문했던 때(계은은 1584년에 부춘리를 방문했었다)를 기억하고 쓴 시다.

이 시에서도 계은은 청영정(변)과 용진(龍津)을 시어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용진(龍津)은 ‘용의 나루’이므로 그 의미는 곧 용호의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1584년 부춘리를 방문하고 하룻밤을 묵기도 했던 계은은 문희개 사는 마을이 부춘리고 그 부춘리에 청영정이 있었고, 청영정 앞에 흐르는 강에는 용바위가 있었고, 그 강을 용호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事實)을 이와 연관된 시로서 웅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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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寶林寺次徐上舍舊與伯氏讀書于此百年多少意中人開口相逢到底春話得別情唯有酒不妨歸興倒烏巾一杯難喚九原人草沒孤墳已幾春風雨匡山餘物色對君今日更霑巾.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玉峯詩集上//七言絶句/1989

2) 계은의 시 贈文進士-希凱舊遊追憶泮宮春 : 옛날 봄날 성균관에서 놀던 추억참조

3) 長興同年文上舍希凱求題其亭甲申秋次元韻書贈乙酉春以救荒御史行到湖南上舍作書懇邀願成詩讖長興適有抽栍因過文家又用前韻二首 : 江南村巷水爲天橘島楓林何處邊淸映亭前一片石倘容溪客異時眠-한국문집총간/溪隱先生遺稿//七言絶句/1991

4) 중략된 其二繡衣飄拂落梅天. 行遍黃雲海戍邊. 會合有緣詩有讖. 石亭今夜近君眠.”이다.-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溪隱先生遺稿//七言絶句/1991

5) 중략된 시구는 行客未諳湖外諺歌兒多唱洛中謳如今已似前生隔安得秋來夢作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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