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10/ 편백 숲을 걷다
■장흥한담10/ 편백 숲을 걷다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1.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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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용수/시인. 수필가

신 새벽, 강가에서 느끼는 늦가을이야말로 고독한 가을일 게다.

강물 위로 뽀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며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빨려든다. 나는 지금 은행잎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감성에 속삭이던 오래전 청춘을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은 내게 묻은 속진(俗塵)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나 혼자이고 싶다. 마른 바람이 풀잎을 눕힌 물 빠진 강가에서 묻으러 올라온 자잘한 강자갈에게 물속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들의 역동적인 삶도 듣고 싶다.

그래서일까.

강은 떠내려 올 새로운 물을 마중하고 있고, 이슬 머금은 강둑에는 자귀나무가 가슴 두근거리는 봄의 화려함과 가을의 환희를 털어낸 후 남겨진 떨켜를 보듬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풀등에 나뒹구는 저 강자갈은 어느 물결에 밀려 왔을까. 한 귀퉁이를 섧게 떨어져 나간 모나지 않는 저 강자갈은 어느 비바람에 부서졌을까. 누군가가 그려놓은 듯, 알 수 없는 그림이 새겨진 강자갈은 어느 바위에서 홀연히 떨어져 나와 이렇게 시리게 묻혔을까.

길 따라 흐르는 예양강은 가을이 깊게 흐르고 있다.

발걸음 멈추고 뒤돌아본 산 아랫마을에는 가을볕이 깊어 가고, 밭둑에 말라진 호박잎 사이로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에서 내 어머니의 곤궁했던 삶의 모습을 떠올리며 설핏한 미소로 붉은 고추 몇 개가 달린 산밭을 지나 산길을 따라 오른다. 등 굽은 노인의 발자국이 섬섬히 새겨진 산길에 억새는 하얗게 변해 가고, 가을을 붙잡지 못한 아쉬움인지 대숲은 푸른 잎 휘두르며 더더욱 서걱거린다. 힘겹게 떨고 있는 대숲 바람 속에서 자연이 가르쳐 주는 설법(說法)을 들으며, 겨울을 재촉하는 햇살을 따라 노란 모과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달한 향기를 들이키며 편백이 출렁이는 숲으로 간다.

이 길은 치유 숲으로 가는 길이다.

편백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로 메마른 감정과 지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의 숲이다. 맑은 공기와 흙냄새, 나무 사이를 흐르는 이름 모를 새소리, 숲 사이를 비집고 파고든 늦가을 햇살, 모든 것이 힐링(heeling)이고 휘게(Hygge)이다. 이 길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걸을 수 있는 가장 아늑한 길이다. 지친 일상 내려놓고 초록 물결 일렁이는 숲의 신록 사이로 늙은 노부부가 손잡고 걷는 뒷모습이 아름답고, 다섯 살배기 손자가 아장아장 따라 걷는 모습 또한 행복하고, 서로를 부축하며 산책하는 어느 노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처 난 내 영혼과 어긋난 육신이 금방이라도 치유될 것만 같다. 숲속에서 일렁이는 바람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흔들리는 것과 같은 편안함 때문일까. 키 큰 편백과 키 작은 나무, 그리고 황칠나무들이 참 조화롭다. 숲을 파고드는 가을바람에 편백은 피톤치드를 뿜어내고, 하얀 구절초와 노란 털머위, 노란 미역취 꽃, 늦게 핀 마타리 꽃, 하얀 참취 꽃, 그리고 보라색 잔대 꽃향기와 흙냄새가 버무려진 자연의 냄새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포근하고 넉넉한 자연의 향기이다.

외진 도린곁 산길을 오르며 긴장을 털어내고 여유를 부려본다.

얼굴을 달구는 가을볕에 한적해진 몸을 내밀자 편백 가지 하나가 해를 가리고 있다. 숲 바람이 쓸어낸 자리에 힐링과 휘게만 남은 산과 하나 되고 싶고, 우뚝 선 편백나무이고 싶고, 황칠나무 잎사귀에 내려앉은 햇살이고 싶고, 흔들리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이고 싶고, 개옻나무가 붉게 물든 산허리에서 오감을 깨우고 들려오는 산새이고 싶다.

오늘은 부족하게 살아온 삶을 위로 하고 싶다.

남보다 뒤떨어진 나의 삶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 느끼는 늦가을이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산물 소리가 늦가을 바람과 함께 나의 눈과 마음에 파고들어 고요와 편안함으로 안내한다. 바람결 따라 편하게 숲이 일렁인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가을빛에 흔들린다. 가슴도 일렁인다. 찌든 욕심을 털어내며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悠悠自適)걷는다. 산기슭에 내걸린 쪽지 하나에 눈길이 멈춘다.

한중자경(閑中自慶)

충지冲止

날마다 산을 보고 또 봐도 부족하고 / 日日看山看不足일일간산간부족

언제나 물소리를 들어도 싫지가 않네 / 時時聽水聽無厭시시청수청무염

자연에 살면 귀와 눈이 맑고 상쾌하니 / 自然耳目皆淸快자연이목개청쾌

그 소리와 빛 속에서 편안함을 기르니 좋아라 / 聲色中間好養恬 성색중간호양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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