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14)/옥봉과 예양강(10) - 옥봉, 장흥 고문학 선구자 천방 유호인과 교유하였다
■기획 - 아, 예양강(14)/옥봉과 예양강(10) - 옥봉, 장흥 고문학 선구자 천방 유호인과 교유하였다
  • 김선욱
  • 승인 2023.08.09 1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봉, 김인후(金麟厚) 수제자 조희문 장흥부사와도 교유하였다

김선욱 / 시인 . 본지 편집인
천방 유호인 묘역

 

 

 

 

 

 

 

 

 

천방 유호인 유허비

<지난호에 이어서>

옥봉과 천방 유호인

장흥은 16세기초부터 문예(文藝), 곧 문학이 발흥되기에 이른다. 이 장흥고문학의 발흥기를 주도한 사람이 첫째는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1502~1584)이요 둘째 인물은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이었다. 천방은 기봉의 20년 연상이었다. 기봉이 조선조 기행가사의 효시인 ‘관서별곡’으로 장흥의 가사문학을 선도한 인물이었다면, 천방은 그 스스로 시인(漢詩)으로서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양성, 성리학과 함께 고문학의 학맥을 일구면서 장흥 한시 문학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장흥의 고문학 발흥을 주도한 두 인물이 옥봉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 기봉은 아버지처럼 존중했던 장형이었고, 천방은 연배 차이를 불문하고(천방이 옥봉의 35년 연상이었다) 옥봉과 교유했던 것이다.

천방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사표(師表)로 불렸던 큰 선비였다. 그가 종유(從遊)했던 사람들은 풍암 문위세, 괴봉(魁峰) 위대용, 죽곡(竹谷) 임회, 운곡(雲谷) 김귀명 등이었다. 문인으로는 정경달(丁景達,1542∼1602)을 비롯하여 문희개(文希凱,1550~1610), 위덕의(魏德毅,1540~1613), 백문린(白文麟,1482~1544년), 위홍주(魏弘宙,1558~1634년), 이섬(李暹,1553~1616), 김지주(金砥柱) 등 각 집안의 파조나 파조에 버금가는 명사들이었다.

천방은 옥봉에게 35세 연상이었으나 옥봉이 천방의 제자 문희개와는 절친이었기에 옥봉도 천방을 스승 격으로 여기며 교유했을 것이다.

다음 시는 옥봉이 천방을 만나기 위해 그가 칩거하고 있는 연하동으로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일에 대한 소감을 적은 시다.

연하동의 유상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煙霞洞 訪劉上舍 不遇-名 好仁

붉은 잎들이 펄펄 나는 푸른 골짜기 신 밑 쪽에 / 紅葉飛飛碧洞陰

사립문도 안 닫은 채 석양빛 만 짙었는데 / 柴門不掩夕陽深.

신선 찾아 어디를 가 돌아올 길 늦는 건가 / 尋眞何處歸來晩

벽에 가득 맑은 시만 객은 스스로 읊고 있네 / 滿壁淸詩客自吟

ⓒ峯詩集上, 詩, 七言絶句/송주호 역

*연하동(煙霞洞) : 보통 연하동(煙霞洞)은 속세를 떠난 신선 같은 사람이 살고 잇는 곳을 의미한다. 실제로 여기의 연하동 『장흥읍지(정묘지)』에 장흥 장동면 거개부락(옛날 지명 사개소) 동쪽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금은 장흥군 장동면 척동마을에 속해 있다.

천방의 소요처며 강학의 장소였던 연하동은 천방이 68세 때부터 1584년 83세로 영면할 때까지 선영 곁에 초가를 짓고 시묘살이를 하며 시문을 완습(翫習)하고,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소요(逍遙)한 곳으로 가액(家額)은 정정당(定靜堂)이고 별채는 불우헌(不憂軒)이며 뜰 앞의 완묘지(玩妙池) 옆에 신선옹(神仙翁)이라는 노목과 양호정(養浩亭)이 있었던 곳이다.

*상사(上舍) : 생원, 진사를 의미. 천방은 32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였지만 과업을 버리고 처사(處士)의 삶을 고수하였다

*심진(尋眞) : 진계(進界), 곧 속세가 아닌 참된 세계인 신선이 사는 세계.

이 시는 읽기만 해도 절로 술술 이해가 되는 참으로 쉽게 묘사된 시다. 산 밑에 고즈넉한 산장 같았을 천방의 거처가 사립도 닫혀 있지 않아 기다렸으나, 어디 신선이라도 만나러 갔나 하고 생각하고는 벽에 가득한 청아한 시만 절로 읊조리고 있다는 작자의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시다.

옥봉의 천방 거처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자주 방문하였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부담 없이 찾아갔을 것인데 객으로서 주인 없는 빈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작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월계 조희문 장흥부사와 옥봉

옥봉 때 장흥부사였던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1527~1578)도 옥봉과 교유가 있었다.

두 사람의 교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당대 호남 시단의 거목이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 그리고 이들의 후인들인 조희문과 백광훈 등의 사이에 얽히고설킨 인연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미암과 하서는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미암은 아들 유경렴(柳景濂)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하서의 사위가 되고 딸은 해남윤씨 윤항(尹衖)의 아들 윤관중((尹寬中)과 혼인하였다. 미암은 당시 해남에서 사장 성세한 해남 윤씨와 혼맥을 맺음으로써 해남과 호남에서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일원으로서 명성에 도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옥봉은 이들 해남 윤씨와도 혼맥의 인연을 맺는다. 옥봉의 며느리 즉 백진남(1564~1618)의 아내는 해남윤씨 윤관중의 딸로 미암 유희춘의 외손녀였던 것이다.

월계 조희문은 하서의 수제자요 김인후 맏사위가 된다.

그리고 옥봉의 형 기봉은 하서와 절친이었다. 하서가 기봉의 12년 연상이었음에도 하서는 기봉을 무척 아꼈고, 기봉 역시 하서를 매우 존숭하고 따랐다.

『기봉집』에는 기봉이 쓴 ‘김하서를 그리며 思金河西’와 하서가 쓴 ‘관서 융막으로 떠나는 기봉을 전송하며 奉贈岐峯重赴關西戎幕(乙卯八月日-金麟厚)’라는 시만 출전하지만, 『하서집(河西集)』에는 ①‘백대유(기봉의 字)에게 주다-3수 贈白大裕光弘(號岐峯)’(오언절구)’ ② ‘백대유를 보내며 送白大裕’(칠언절구) ③‘백대유에게 和白大裕(칠언절구)’ ④ 정자(正字) 백대유를 보러 방문하며 白正字大裕見訪(칠언절구)-2수 ⑤ 백대유에게 주다 贈白大裕 (칠언절구) 등 5편 8수가 출전된다.

이는 하서와 기봉 사이에 얼머나 우의(友誼)가 깊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옥봉은 하서의 2남인 김종호(金從虎)와는 절친이었다. 그런 이유로 옥봉은 하서의 『하서전집(河西全集)』을 엮기도 했다.

실제로 옥봉은 시 ‘김계의(김종호의 자)와 작별하며’라는 시에 부기한 주(注)에서 “그의 선친 하서집을 나에게 가려 뽑아 맞춰주기를 청했다 以其先公河集 請余抄定”라고 밝히기도 했다.

월계(月溪)는 남원 출신이었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56년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주서, 성균관전적·사예·사성을 거쳐 사헌부장령, 사간원헌납, 이조좌랑,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장흥부사로 있을 때 명륜당에 제생(諸生)들을 모아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 등을 강의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는 등 문교진흥으로 풍속을 교화시켰다고 한다.

경연에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정치의 요점을 들어 진달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김인후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성(誠)과 경(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특히, 문장이 뛰어났으며, 당시 기대승(奇大升)·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변성온(卞成溫)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월계유집(月溪遺集)』 5권 2책을 남겼다.

이런저런 인연 속에 월계 조희문이 장흥부사로 부임하고, 옥봉은 월계를 만났다.

월계에게 옥봉은 장인어른이 아끼는 기봉의 아우였다. 옥봉에게 월계는 둘도 없는 친구 김종호의 매부요, 기봉 형님을 매우 아꼈던 김종호 부친의 수제자였던 것이다.

조희문은 옥봉의 10세 연상이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옥봉의 형인 기봉을 중심으로 질긴 인연, 처남 김종호가 절친이라는 등의 이유에서라도 월계는 옥봉을 더욱 각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68년 32세 : 당시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1527~1578)이 장흥부사였다. 공은 가서 뵙고자 여러번 부사 앞에 나서니, 조공(월계)은 공을 반드시 맞아들이고 공경히 대접하였다. 그가 공에게 준 시에

“청수는 엉켜 골짜기에서 흐르니 멀리까지 티끌이 없고 淸氷出壑泂無塵

신선 사는 산중이라 속세 사람들은 끊겼네 姑射山中絶世人”

라는 구절이 있다. 또 공에게 매양 물품을 보내고 친히 갖추었다. 공

역시 시를 지어 사례하니 “은혜를 알기에 노인을 받들어 늙어가네恩知老老推”라는 구절이 있다. 이 역시 일기 중에 있다.

(時趙月溪希文倅長興。公覲行。每由府前路。趙公必邀見 而敬待之。其所贈詩。有淸氷出壑泂無塵。姑射山中絶世人之句。且爲公每馱送供親之具。公亦作詩謝之。有恩知老老推之句。亦在日記中)

위 내용은 옥봉의 31세 때, 월계와 관련되어 나오는 옥봉 연보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31세 때 옥봉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으로 옥봉이 몇 번 월계 장흥부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때마다 월계는 공손히 대해주고 물품을 지원해주곤 했던 것 같다. 이때의 정황을 시로 주고받았다고 연보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 두 사람 간의 교유시가 『옥봉집』에 출전되고 있다.

조월계가 옥봉에게 부치다 寄玉峯趙月溪

청수(淸水)는 엉켜 골짜기에서 흐르니 티끌이 없고 / 淸水出壑泂無塵

신선 사는 산중이라 속세 사람들은 끊겼네 / 姑射山中絶世人

어깨가 용이롭고 시가 호해(湖海) 위에 있으니 / 肩聳吟詩湖海上

천남(天南)의 만물이 날로 새롭고 맑아지고 있네 / 天南萬物日淸新

-ⓒ『玉峯集』/後序/附錄/寄玉峯趙月溪[希文]

*고야姑射 : 고야산(姑射山)으로 신인(神人)·신선(神仙)을 말함이니,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그곳에 은거하는 신인(神人)은 肌膚若氷雪(피부가 마치 얼음과 눈 같았다)이라” 하였다.

월계 조명부(조희문 부사)에게 사례하며 謝月溪趙明府-名希文

베풀어 돕간 시절형편 보아 한 것 같고 / 發養看時候

은혜 준 건 노인 대접 미루어 알지만 / 恩知老老推

생선 삶아 저녁 반찬 올려져 받고 / 烹腥供夕膳

쌀 찧어서 새벽밥을 이어지으며 / 舂米繼晨炊

콩 음료도 진실로 분에 맞는데 / 菽飮誠宜分

맛 좋은 술을 다시 잔에 따르고는 / 芳醪復滿巵

기쁜 얼굴 흰 머리로 대하여 주니 / 怡顔對華髮

이 후의(厚誼)를 말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소 / 此意道無辭

-ⓒ 『옥봉집』 / 詩/五言律 / 송주호 역

*노노추(老老推) : 여유 있는 자가 궁핍하고 어려운 노인을 자신의 집안 노인으로 여겨서 온정을 베풀어주는 주는 것(老吾老 以及人之老)을 미루어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老吾老 以及人之老‘의 원문은 “내 집 어른을 받들어서 남의 집 어른에게까지 미치고, 내 집 어린애들을 아끼고 길러서 남의 집 어린애에게까지 미치면, 천하를 손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天下 可運於掌”(『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章句上) 이다.

*명부(明府) : ‘明府君’의 준말. 한위漢魏시대 군수의 칭호. 여기서는 부사 월계 조희문을 말함.

*방요(芳醪) : 맛 좋은 술.

*화발華髮 : 하얗게 센 머리털.

이 시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옥봉이 스스로 ‘노인(恩知老老推)’이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해설자 송주호 씨는 당시 40이 되면 노인으로 인정하여 수의를 준비했다면서 작자 자신이 노인으로 자처하고, 결구에서는 “기쁜 얼굴로 허옇게 머리가 센 자신을 대해주니”하며 더욱 고맙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마 월계의 도움이 너무 고마워서 그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설했다.

옥봉은 이 시 외에도 시 ‘조명부의 달 구경시에 화답하며 和趙明府翫月之韻’와 월계와 관련된 또 하나의 시로 ‘장흥 땅에서 텃밭을 사는데 땅 주인이 밭 값의 도움을 주어 고맙게 여기다 長興地買基田 得地主助田價’ 시도 있다. 여기서 ‘밭 값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월계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의미다. 이 시를 보자.

장흥 땅에서 텃밭을 사는데 땅 주인이 밭 값의 도움을 주어 고맙게 여기다

長興地買基田 得地主助田價​

어버이 떠나 멀리 사니 춥고 굶주리는데 / 離親遠寓爲寒飢

그리는 정 깊건만 헤아려 베풀길 없구나 / 狐兔情深計莫施

살펴 산 몇 이랑 땅의 담장을 밀어 젖히며 / 試買墻拫數畝土

백년의 뜰과 집에 사사로이 은혜를 입었네 /百年園屋荷恩私

ⓒ玉峯詩集上, 詩, 七言絶句

*기전基田 : 텃밭

*지주地主 : 땅의 주인. 여기서 장흥 부사 조희원이 금전적인 돈을 지원하여 지주로부터 땅을 산 것

으로 보인다.

*호토(狐兔) : ‘호사토비(狐死兎悲)’ 준말. 이 말은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한다는 뜻으로, 동류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사자성어다.

*장근墻根 : 『옥봉집』 영인본에는 장근墻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뿌리 根근은 당길 拫흔으로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

1) 김인후가 유희춘의 아들을 사위로 삼게 된 내력이 燃藜室記述에 나온다. 유희춘이 과거에 입격하기 전 유희춘은 김인후와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하였다. 어느날 김인후가 염병에 걸려 위급하게 되었을 때 유희춘은 김인후를 제 숙소로 데려가 극진하게 간호하여 살려냈다. 이후 김인후는 이러한 유희춘의 은공을 잊지 않았다. 유희춘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김인후는 자네 처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이다 자네 어린 아들은 내가 사위로 삼을 것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연려실기술 9/仁宗朝故事本末/김인후)

2) 정자(正字) : 7품 관원으로 처음 나타난다. 정자는 홍문관·승문원·교서관에 설치된 관직으로, 홍문관의 정자는 책[典籍]이나 문장의 교정을 그 임무로 삼았다.

3) 하서집출전의 기봉 관련 시 58: 河西先生全集卷之五/五言絶句/‘贈白大裕 光弘號岐峯’=“春山百花落幸有一枝紅寂寞茅簷下飜愁酒盞空*其二 : 春光留草屋醉面欲爭紅見子忘沈疾其如雪鬢蓬*其三 : 採蘭幽念起好去奉親盤蓼蓼嗟無及經營萬事難河西先生全集卷之六/七言絶句/‘送白大裕’ = “東院西風此送君玉川破屋數間雲南山野鶩聲何事客酒盈觴我已醺河西先生全集卷之六/七言絶句/‘和白大裕’ = “訪我炎天臥病時聞君今向漢江湄悠悠歲月添霜鬢少壯歡娛子自知河西先生全集卷之七/七言絶句/‘白正字大裕見訪’=竹江村映白沙故人來到故人家相逢痛飮東城酒一醉忘情字畫斜*其二 : 落葉西風正字過黃花柚盞夕陽斜龍鍾未赴金華召獨臥茅簷醉作家。 ⑤河西先生全集卷之七 /七言絶句/‘贈白大裕’=“畏景當天不可行征驂且待夕涼生今來不盡心中話東閣黃花再結盟

4) 하서전집편찬 및 간행내역을 보면, 원래 하서의 시문은 유고 십여 권 시서(詩書)가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아, 조희문(하서의 첫째 사위이자 문인)8년간 수집한 초본(草本)을 백광훈(白光勳)이 초서(抄書)하고, 저자의 문인이요 둘째 사위인 양자징(梁子澂,1523~1594, 담양소쇄원을 지은 양산보(1503~1557) 아들로 거창·석성 현감을 지냈다, 옥봉의 지기이기도 했다)과 신각(申覺)이 교정 및 간역(刊役)을 맡아 전라 감사 송찬(宋贊)의 협조로 1568년에 간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趙希文 序’)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