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1)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1)
장흥을 다시 읽는다(1)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1)
  • 김선욱
  • 승인 2023.09.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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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기 직전에 사생결단하다

“장부(丈夫)에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외치다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호남절의록』 마하수조(원문)

 

 

 

 

 

 

 

 

 

 

 

 

 

 

 

 

 

 

 

▲마하수가 태어난 안양면 학송마을 전경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절하였던 장흥 출신의 ‘정유재란(丁酉再亂) 영웅’이 있었다. 마하수(馬河秀,1538~1597)가 그 주인공이다.

마하수(馬河秀), 그는 누구인가.

마하수, 충무공 구하려 적진으로 돌진, 순절

마하수는 조선 중기, 장흥 출신의 무신이다. 자는 선천(先天), 호는 주촌(舟村),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를 역임하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전사하였다.

마하수는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의 7세손이고, 장흥 마씨 조은공파(釣隱公派) 파조 마전(馬腆)의 6세손이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남계(南溪) 김윤(金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윤이 공에게 무예를 익히도록 권하여 무예를 익혀 명종 19년(156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인 1595년 공은 아버지와 함께 부안강 전투에 참가했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부친 직사공(直司公) 마인서(馬麟瑞)가 전사하자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선공감의 경력을 되살려 향선 제조에 힘썼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10여 척의 향선을 건조하고 여러 척의 폐선도 수선(修船)하여 바다에 띄워 많은 배로 위장하였다.

공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돕기도 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투옥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전라도 회령포(會寧浦 : 장흥 회진)에 이르렀을 때, 두 아들과 향선(鄕船) 10여 척을 거느리고 통제사 이충무공의 진영을 찾아가 인사하고 이순신의 지원세력으로서 배후에서 이순신의 해전을 도왔다.

그해 9월 명량해전 때, 왜선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된 이순신을 보자, “장부로 태어나서 이때가 죽을 때이다.”라고 결의를 굳히고 마성룡(馬成龍)·마위룡(馬爲龍)과 함께 왜적을 향하여 돌진하였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아들 마성룡도 해전 현장에서 순절하였다.

마하수는 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경기도 충현사(忠顯祠)와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 충현사에 배향되었다.

마하수 장자 마성룡도 명량해전서 순절

마하수의 장자(長子) 마성룡(馬成龍,1564∼1631)은 자는 운학(雲鶴)이요, 호는 죽창(竹窓)이다. 공은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였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정유재란 때 명령해전에서 부친 참판공(參判公, 마하수)을 도와 아우 위룡(爲龍)과 함께 향선 10여척으로 충무공 후원군으로 명량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부친이 전사한 후, 성룡도 부상당한 상처를 싸매고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배안에 안치한 후, 아우 위룡과 함께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을 대파했지만, 마침내 상처가 악화되어 명량해전 현장에서 순절하였다.

마하수의 차자(次子) 마위룡(馬爲龍,1576~1638)은 자는 운포(雲浦)요, 호는 송파(松坡)이다. 송파는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도 힘썼다. 임진란 때 선산부사 정경달(丁景達)의 군영으로 들어가 전략을 함께 세워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한 공으로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다시 첨정(僉正)으로 승차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부친을 도와 형 성룡과 함께 이충무공 막하로 들어가 명량해전에 참가하였다. 부친이 전사할 때, 형과 함께 시신을 거두고 염을 한 후 상복을 입고 다시 충무공 진중으로 들어가 충무공 진중에서 왜적과 싸우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귀향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위룡의 아들 시웅(時雄)과 마하수의 삼자(三子)요 위룡의 아우였던 이룡(而龍)은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이것이 마하수와 마하수의 두 아들 성룡(成龍)·위룡(爲龍)에 대한 대략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권3 상, 壬辰義蹟, 忠武李公舜臣同殉諸公事實) ② 『이충무공전서』(권14, 부록6, 기실紀實 하, 마씨가상) ③ 『연경재전집』(卷61권, 蘭室史料四, 督府忠義傳) ④ 『淵泉集』(卷26, 豐山洪奭周成伯著, 墓碣銘上) 등과 『마씨 대동보』 등에 출전된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한 것이다.

이제, 마하수가 출전된 사료 중 『호남절의록』, 『충무공전서』, 『연경재전집』, 『연천집』(묘갈명) 등을 살펴 보자. (다음의 기문記文에서는 ‘국역문’에 ‘원문(原文)’도 함께 수록했다.)

『호남절의록』에 출전된 마하수

-“공(이순신)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

마하수(馬河秀), 자(字)는 선천(先天). 호(號)는 주촌(舟村). 본관은 장흥(長興). 충정공(忠靖公) 천목(天牧)의 후손이고 부사직(副司直)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성질이 효성스러웠고 절조를 숭상하였다. 남계(南溪) 김윤(金胤)에게서 수업하였는데 김공이 무예를 익히도록 권하였다. 명종 19년(1564) 무과에 급제하고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다.

임진란(1592) 때 아버지 사직공(司直公)이 적에게 해를 당하니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유란(1597) 때 이충무공을 회령포(會寧浦)에서 만나니 이공(이순신)이 고을의 여러 배들을 모아 후원을 해주도록 요청하므로, 공은 “마땅히 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이로써 남자는 비록 흰머리가 되어도 마음은 건장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문연(文淵 : 마원 馬援)의 “말가죽으로 시체를 싼다(馬革裹尸).”라는 구절의 것이다.

공은 이후, 백진남(白振南)·정명열(丁鳴說)·문영개(文英凱) 등 십여 사람과 함께 먼 바다에 배를 늘어놓고 마치 군선(軍船)처럼 보이게 하여 명량(鳴梁) 싸움을 응원하였다. 공이 고을의 배들(향선 10여 척)을 모아 외양(外洋)에 배치하고 바라보니 이공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칼을 빼어 들고 “대장부가 죽는도다.”하고 두 아들 성룡(成龍), 위룡(爲龍)과 함께 포위망 속에 깊숙이 들어가 힘껏 싸우다 탄환을 맞고 죽었다.

(『호남절의록』의 원문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연경재전집』 독부충의전(督府忠義傳) -

“오직 장부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마하수(馬河秀)는 장흥(長興) 사람이다.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였다.

정유년에 바다에서 수병으로 전란의 피해를 모면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고 들었다.

기쁘게 말하길, “이젠 우리들이 근심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회령포(會寧浦)로 출전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공(마하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향리(鄕里)에서 모을 수 있는 병선(兵船)이 얼마나 되는가” 라고 하였다

“10여 척입니다.”

공이 말하길 “제가 후원할 수 있는 일은 군용(軍容)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백진남(白振南),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정명열(丁鳴說) 등이 각각의 배로 올라왔다.

왜적과 전쟁이 명량(鳴梁)에서 시작되었다.

마하수는 바다 밖(전투 현장의 외곽)에서 진을 쳤다.

그러던 중 이순신(李舜臣)이 왜군의 배로 포위된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이) 칼을 뽑아 소리치기를 “장부(丈夫)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아들 성룡(成龍)과 위룡도 함께 왜군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힘써 싸운 지 한참 만에 마하수는 왜군의 탄환을 맞아 순절하였다.

『硏經齋全集』 권61/蘭室史料四 /督府忠義傳 : 馬河秀長興人。官繕工主簿。丁酉避兵海中。聞李舜臣復爲統制使。喜曰吾屬無憂矣。往詣舜臣於會寧浦。舜臣勞曰君鄕里避兵船有幾。曰可十隻。曰君盍綜糾之爲後援。以補軍容也。曰諾。時白振南,金聲遠,文英凱,卞弘源,白善鳴,金澤南,任永凱,丁鳴說等。各以船至。方戰鳴梁。河秀列陣外洋。望見舜臣被圍。拔釰曰丈夫死耳。與二子成龍,爲龍。突倭軍。力戰良久。中丸卒。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2001

『충무공전서』의 마씨가상(馬氏家狀)

- “내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을 때이다”

마하수는 장흥(長興)이다. 관선공 주부(官繕工主簿)이다.

정유년(丁酉年)이다. 배 한 척을 준비한다. 바다 가운데서 난을 피한다.

들으니, 이통제(李統制 : 이순신)가 복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우리들이 어찌 근심하겠는가!”

마침내 회령포(會寧浦)로 가서 이공(이순신) 앞에 엎드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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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계 김윤(南溪 金胤,1506~1571) : 선조 3년 사마시에 급제,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영천은 자신의 학문을 이을 사람은 윤과 분이라고 했다.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등과 동문수학

한 사실이 옥봉집(玉峯集)에 실려 있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

2)  교감·역주 호남절의록, 고정헌 저, 김동수 교감·역주, 경인문화사, 2010.

  3) 마원(馬援) : BC 14AD 49. 중국 후한(後漢)의 정치가이자 무장. 자는 문연(文淵). 티베트족의 정벌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정벌 등에     공이 많았다. 45년 흉노와 오환(烏丸)을 토벌하러 출전하였으나, 열병으로 고전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4) 본문엔 문연과혁시지구(文淵裹革時之句)라 나오는데 이 시()는 시()의 잘못으로 보인다. 마원(馬援)이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지방을 평정하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데 그중의 맹익(孟翼)이란 사람에게 지금 흉노와 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裹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말.

5) 군용(軍容) : 군대의 상태. 주로 사기(士氣)나 기율(紀律), 또는 군대의 위용(威容)이나 장비 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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