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5) - 마하수와 명량해전 참전한 정명열(丁鳴說)의 ‘정유년 일기’
■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5) - 마하수와 명량해전 참전한 정명열(丁鳴說)의 ‘정유년 일기’
  • 김선욱
  • 승인 2023.11.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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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수 유허시비 건립, 유허비시집도 간행
김선욱 시인 , 본지 편집인
▲정명열 정유년일기
▲마하수 유허비1

 

 

 

 

 

 

 

 

 

 

 

▲마하수 유허비2
▲마하수유허비시집표지
▲마하수 유허비시집 속지

 

 

 

 

 

 

 

 

 

 

 

▲마하수 유허비시집 속지

<지난호에 이어서>

정명열의 정유일기

이충무공이 통제사로 재임되어 회령포에게 닿았다는 말을 들었다.

공(丁鳴說)이 크게 기뿐 얼굴로 말하길, “호남인이 안고 있는 근심은 다시는 없겠구나. 천도(天道)가 바로 펴지니 임금의 살핌이 밝구나.” 하였다. 오늘날 이공(李公,이순신)을 보니 통제사로 재임된 것은 바로 인심(人心)이 천리(天理)로 스스로 그리된 것이니, 어찌 인간의 힘으로 하는 일이겠는가? 백성의 무거운 짐에 비로소 재생(再生)의 기운이 쌓일 수 있겠다. 의사(義士)들은 다 죽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나 역시 그와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다만, 아버지가 천리 밖에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옛집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 곁에서 떠날 수가 없구나.

… 지금 곧 이통상(李統相)에게 적 탕진(蕩盡)의 명을 받았으나, 남은 배나 군사(軍師)가 박약(薄弱)하고 병량(兵糧)도 부족한데 도움을 받지 못해 적을 막을 수 없다. 만일 적을 섬멸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피란선(避亂船) 1척과 군량미 오석(糧米五石)이라도 이통상에게 보내드려야겠다.

…고향 사람인 마하수, 백진남, 김성원, 변홍원, 백선명, 김택남, 문영개 등이 각각 피란선을 같이 불러 모을 때, 공(정명열)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피란 중에 있었지만 곧 그들을 찾아가서 여럿을 보았다. 공이 말하길, “예전의 악야(岳爺)나 오늘날의 이야(李爺, 이충무공)가 얻은 사람은 모두 죽을 각오로 행동하였다. 우리들도 이때에 그들과 다를 수가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통상(이순신)이 먼 바다에 피란선이 진열됐다는 말을 듣고, 의원(疑援)해 하다가 곧 이해하며 이르길, “이른바 만전(萬全)의 책(策)을 얻었구나.”하고는, ”오직 이 강한 병세(兵勢)을 보며 적(賊)이 두려워하겠구나.”하였다.

이후 이공(이순신) 후원자들과 이통상 등이 적의 세력을 엿보고 기회를 틈타서 힘을 모아 공격하니, 그 파죽지세는 오로지 하늘을 들어 올리고도 남았다.

명량전투에서 공은 마하수(馬河秀)가 이통상을 후원하던 중에 적진으로 달려가 싸움을 독려하던 중 적탄을 맞아 순절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공은 크게 탄식하며 말하길, “육십의 쇠옹(衰翁)이 적에게 달려가 죽다니, 노익장(老益壯)의 의기(義氣)가 참으로 가상하구나.” 하였다.

10월 29일에 공은 피란 중에 우수영(右水營)으로 가 이통상을 만나 뵙고, 명량대첩에 대하여 말하길, “남도(南道)의 백성은 저의 삶입니다.”하고 이공(이순신)에게 인사하고, 이내 말하기, “마하수(馬河秀)는 당년 60세로 이공(李公)을 후원하러 달려가 싸움을 독려하던 중 적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니 이통상은 심히 탄식하였다.

정명열의 마하수에 대한 만장(輓章)

이어 공은 (마하수의) 만장(輓章)에서 “공이 육십세에 순절하시니 충렬의 위업을 햇님이 비추고 혈강에 울화가 맺힌다. 충절의 넋은 어느 곳에 의지할 것인가. 벽파정 저문 썰물이 안벽을 치며 울더라.”라고 하였다.

丁酉…聞李忠武公 再爲統制使來到 于會寧浦 公大有喜色 語左右曰 湖南人復屬憂無矣 天道必伸 聖鑑孔昭 今見李公 在爲統制 人心天理 自有然者矣 豈是人力之所爲哉 荷擔小民始有再生之氣蓄 義士皆有願死之心 至於如我亦基一也 但以父在千里 勤王無暇 母在高當無人奉養 人子之道 不可斯須離側 … 則今李統相受命於 蕩敗之 餘舟師甚 單兵糧不足 未可以禦賊不如助其 萬一以成殲賊 之功遂隧 以避亂船一隻 糧米五石送呈 于統相.

…鄕人白振南 金聲遠 卞弘源 馬河秀 白善鳴) 金澤南 文英凱 等 各以避亂船 齊聲響應時 公奉母夫人在避亂中 往見諸公曰 古有岳爺 今有李爺得人 死心無不響應 吾輩所素蓄積者 不可歇後於此時 聞李統相方今避亂船列於遙海 以爲疑援云 可謂得萬全策也 一以强兵勢 一以畏賊心 爲其後援者乘機覘勢 與李統相戮力並進 則破竹之勢 惟在此擧云.

…及鳴梁之戰 公聞馬河秀 爲李統相後援赴賊 以督戰中毒丸 以死歎曰 六十衰翁 赴死於賊 可尙義氣老益壯矣

…十月二十九日. 公避亂往右水營 謁李統相 賀鳴梁大捷曰 南民生活我 公所賜仍稱訟馬河秀死曰 馬河秀年當六十 爲公後援赴賊督戰中 毒丸而死 李統相甚磋惋.

…挽章曰 公年六十死於邦烈日秋霜照血腔鬱結忠魂何處托碧波亭下暮潮撞鳴呼

-ⓒ『霽岩集』(장흥문화원, 2019, 105-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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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수(馬河秀)의 유허비명(遺墟碑銘)

비문 역(譯)

-안동 김영한(金寗漢)

*마하수 유허비명을 쓴 김영한(金寗漢, 1878∼1950)은 대한제국 때 문신이며 학자였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894년에 17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898년 희릉참봉(禧陵叅奉)으로 출사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서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이 되었다가, 용인군수(龍仁郡守)·양근군수(楊根郡守)를 거쳐서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이르렀으나,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본과 채결되자 세상에 뜻이 없어져 조정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양부(養父) 김석진(金奭鎭)이 음독자진(飮毒自盡)하고 일본(日本)이 강권한 작위와 돈을 받는 것은 불충불효(不忠不孝)이라 하여 끝내 받지 아니하였다. 김영한 선생은 당대의 문장가로써 세상에 알려져지며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정부자(程夫子)가 안락정(顔樂亭)을 각(刻)하여(銘하여) 가로되, 물은 얕음을 싫어하고 땅은 거치름을 참지 못하다 하였으니, 후학(後學)이 선생(先生)을 우러러 은모(恩慕)함이 진실로 이와 같은 일이로다.

선조(先祖)가 묻힌 장흥의 화개산(華蓋山) 밑에 주암촌(舟岩村-지금의 장수리)이 있으니 곧 공(公)의 생장(生長)의 땅이로다. 팔궁산(八穹山)과 고리재(環寺)가 있어 지금까지도 길지(吉地)라 말하더니, 점점 개척(開拓)하여 논밭이 됨에 후손들이 모두 자탄(自嘆)하더라. 주암촌(舟岩村)에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으니 바로 학송리(鶴松里)라. 여기는 곧 공(公)께서 활쏘기를 익히던 땅이다.

이에 (후손들이) 논의하여 비석(碑石)을 세워 그 공적(功績)을 기록하기로 하여 운하(雲河)로 하여금 내게 비문(碑文)을 청(請)하거늘, 내가 병들어 붓과 벼루를 멀리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되, 그 충(忠)과 효(孝)의 정신이 족히 사람을 감동케 함이 있는 고로, 마침내 사양치 아니하였노라.

공(公)의 휘(諱)는 하수(河秀)요, 자(字)는 선천(先天)이다. 충정공휘천목(忠靖公諱天牧)의 7세손이다.

공(公)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奇異)한 데가 있었고, 지혜(智慧)와 용기(勇氣)를 겸비하였더라.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에 이르렀으나 어버이가 늙으심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봉양(奉養)하였더라.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친(父親) 사직공휘인서(司直公諱麟瑞)가 왜구(倭寇)를 피하려다 바다에서 망(亡, 臨終)하였도다. 이에 공(公)이 피를 토하여 하늘에 호소하기를, 적과 같이 살 수가 없음을 맹세하며 사자(四子, 네 아들)를 데리고 이충무공(李忠武公)에게 나아가니, 이공(李公, 이순신)이 그 용맹(勇猛)을 장하게 여기며 후원(後援)을 하라고 하니라.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명량(鳴梁, 현 해남 우수영)의 싸움에 임할 적에 공(公)이 바라보니, 왜적이 이공(李公)을 포위하여 형세가 심(甚)히 급하게 된 고로, 공(公)이 크게 호령하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왜적 수백을 타살(打殺)하고 마침내 적탄(敵彈)에 맞아 순절(殉節)하였니라.

적(賊)도 또한 대패하여 감히 재침치 못하니 이공(李公)이 도리어 크게 승전하였도다.

아! 슬프다! 공(公)이 한번 군사를 일으키니 충(忠)과 효(孝)가 쌍전(雙全)이라.(충과 효를 도두 온전하게 다 하였다). 본래 타고난 성정이란 누구나 다르리오마는, 다만 화복(禍福)으로 인하여 난(亂)을 당하매 살기를 꾀하고 임금을 잊어버리고 어버이를 배반한 자 허다하거늘, 오직 공(公)은 다만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만 알고 그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화살과 돌로써 싸워 임금과 어버이의 원수(怨讐, 원수를 원망하는 마음)를 갖고 또 중흥(中興)의 높은 공(功)을 이룩하니 어찌 장하지 않으리요.

연천(淵泉) 홍문간(洪文簡) 공(公)이 공의 묘표(墓表, 묘비문)를 지을 때 자세히 기록한지라. 특히 그 대략을 뽑아 그 유허(遺墟)를 문표(文表)하여 자손들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위로하노라.

명(銘)하여 가로되,

거치른 산 빈 터에 조그마한 땅이로다.

우뚝 솟은 유허비(遺墟碑)를 지나가는 자

반드시 발을 머무르고 그 뜻을 알고자 할진대

충(忠)과 효(孝)가 있는 마공(馬公)의 옛적 살던 곳임을 알고 가소서.

안동(安東) 金寗漢이 삼가 찬(讚)하다

癸未 1943년 8월 일 삼가 비를 세움

유사 후손 윤하(輪河)가 석순(錫珣) 석인(錫仁) 종기(鍾基) 상섭(相燮) 등과 서로 의논하여 세우다.

■원문

마하수(馬河秀)의 유허비명(遺墟碑銘)

비문 역(譯)

-안동 김영한(金寗漢)

*유허비명을 쓴 김영한(金寗漢, 1878-1950)은 대한제국기 때, 용인군수, 양근군수, 비서원승 등을 역임한 대한제국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894년에 17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898년 희릉참봉(禧陵叅奉)으로 출사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서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이 되었다가, 용인군수(龍仁郡守)·양근군수(楊根郡守)를 거쳐서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이르렀으나,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본과 채결되자 세상에 뜻이 없어져 조정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양부(養父) 김석진(金奭鎭)이 음독자진(飮毒自盡)하고 일본(日本)이 강권한 작위와 돈을 받는 것은 불충불효(不忠不孝)라 하여 끝내 받지 아니하였다.

김영한 선생은 당대의 문장가로써 세상에 알려져지며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정부자(程夫子)가 안락정(顔樂亭)을 각(刻)하여(銘하여) 가로되, 물은 얕음을 싫어하고 땅은 거치름을 참지 못하다 하였으니, 후학(後學)이 선생(先生)을 우러러 은모(恩慕)함이 진실로 이와 같은 일이로다.

선조(先祖)가 묻힌 장흥의 화개산(華蓋山) 밑에 주암촌(舟岩村-지금의 장수리)이 있으니 곧 공(公)의 생장(生長)의 땅이로다. 팔궁산(八穹山)과 고리재(環寺)가 있어 지금까지도 길지(吉地)라 말하더니, 점점 개척(開拓)하여 논밭이 됨에 후손들이 모두 자탄(自嘆)하더라. 주암촌(舟岩村)에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으니 바로 학송리(鶴松里)라. 여기는 곧 공(公)께서 활쏘기를 익히던 땅이다.

이에 (후손들이) 논의하여 비석(碑石)을 세워 그 공적(功績)을 기록하기로 하여 운하(雲河)로 하여금 내게 비문(碑文)을 청(請)하거늘, 내가 병들어 붓과 벼루를 멀리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되, 그 충(忠)과 효(孝)의 정신이 족히 사람을 감동케 함이 있는 고로, 마침내 사양치 아니하였노라.

공(公)의 휘(諱)는 하수(河秀)요, 자(字)는 선천(先天)이다. 충정공휘천목(忠靖公諱天牧)의 7세손이다.

공(公)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奇異)한 데가 있었고, 지혜(智慧)와 용기(勇氣)를 겸비하였더라.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에 이르렀으나 어버이가 늙으심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봉양(奉養)하였더라.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친(父親) 사직공휘인서(司直公諱麟瑞)가 왜구(倭寇)를 피하려다 바다에서 망(亡, 臨終)하였도다. 이에 공(公)이 피를 토하여 하늘에 호소하기를, 적과 같이 살 수가 없음을 맹세하며 사자(四子, 네 아들)를 데리고 이충무공(李忠武公)에게 나아가니, 이공(李公, 이순신)이 그 용맹(勇猛)을 장하게 여기며 후원(後援)을 하라고 하니라.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명량(鳴梁, 현 해남 우수영)의 싸움에 임할 적에 공(公)이 바라보니, 왜적이 이공(李公)을 포위하여 형세가 심(甚)히 급하게 된 고로, 공(公)이 크게 호령하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왜적 수백을 타살(打殺)하고 마침내 적탄(敵彈)에 맞아 순절(殉節)하였니라.

적(賊)도 또한 대패하여 감히 재침치 못하니 이공(李公)이 도리어 크게 승전하였도다.

아! 슬프다! 공(公)이 한번 군사를 일으키니 충(忠)과 효(孝)가 쌍전(雙全)이라.(충과 효를 도두 온전하게 다 하였다). 본래 타고난 성정이란 누구나 다르리오마는, 다만 화복(禍福)으로 인하여 난(亂)을 당하매 살기를 꾀하고 임금을 잊어버리고 어버이를 배반한 자 허다하거늘, 오직 공(公)은 다만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만 알고 그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화살과 돌로써 싸워 임금과 어버이의 원수(怨讐, 원수를 원망하는 마음)를 갖고 또 중흥(中興)의 높은 공(功)을 이룩하니 어찌 장하지 않으리요.

연천(淵泉) 홍문간(洪文簡) 공(公)이 공의 묘표(墓表, 묘비문)를 지을 때 자세히 기록한지라. 특히 그 대략을 뽑아 그 유허(遺墟)를 문표(文表)하여 자손들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위로하노라.

명(銘)하여 가로되,

거치른 산 빈 터에 조그마한 땅이로다.

우뚝 솟은 유허비(遺墟碑)를 지나가는 자

반드시 발을 머무르고 그 뜻을 알고자 할진대

충(忠)과 효(孝)가 있는 마공(馬公)의 옛적 살던 곳임을 알고 사소서.

안동(安東) 金寗漢이 삼가 찬(讚)하다

癸未 1943년 8월 일 삼가 비를 세움

유사 후손 윤하(輪河)가 석순(錫珣) 석인(錫仁) 종기(鍾基) 상섭(相燮) 등과 서로 의논하여 세우다.

■원문 :

程伯子銘顔樂之亭曰水不忍廢地不忍荒後學之景莫先哲元固當括如是而況後裔之於先祖平長興華蓋山之下舟岩之村卽舟村馬生長之地也有 八穹石環峙焉人到于今指點矣耕犂所侵渾成水田凡爲後喬者齎咨嘆漢息而距舟岩數百步有村曰鶴松寔公習射之墟也乃合謀琢珉以紀其績使雲河甫徵余語余病廢筆肇硏久矣而其忠孝有足感人者不終辭 公諱河秀字先天忠靖諱天牧之七代孫也公生有異 姿智勇兼備擢登科仕至繕工主簿而以親老棄官歸當穆陵龍蛇之亂皇考司直諱麟瑞避寇沒于海公 血泣號天誓不與賊俱生率其四子謁忠武李公李壯其勇使之殿悉舟師邀賊于鳴梁公望見賊李公急大呼入賊陣力戰良久竟中九死 然賊亦大敗不敢復與李公角而遂成大捷鳴呼公之一擧忠孝 隻全矣秉彛之性人孰不賊而但怵於禍福臨難苟免遣君後親者滔滔也 則只知有君親而不知有其 身裂奮臂裂眥衝昌矢石以報君親探讐助成中興之偉烈 曷易不 韙歟淵泉洪文簡公鑱公墓者詳矣特撮其大者表厥遺墟以慰后孫之孝思云 銘曰 荒山之址數畝之墟蚩蚩申+國艸申+國過必躊躇 曷易不 韙歟淵泉洪文簡公鑱公墓者詳矣特撮其大者表厥遺墟以慰后孫之孝思云 銘曰 荒山之址數畝之墟蚩蚩申+國艸申+國過必躊躇 識具有忠有孝馬 公之舊居 安東金寗漢撰 檀紀四千二百七十六年 癸未 八月日謹堅

有事後孫輪河以錫珣 錫仁 鍾基 相燮 相議 建設記裁及愚齊集

주촌공 유허비시집도 발간

주천공유허비는 1943년 8월에 세웠고, 이로부터 41년이 지난 1984년에 아마도 주천공 유허비를 다시 세우며, 유허비 제막식 같은 행사를 치렀고, 이때 전라도 각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참배하러 와 추천공에 대한 讚詩를 지어, 그해 『주촌집(舟村馬公遺墟碑詩集)』을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주천공 유허비명은, 위 비명의 말미에 보듯 1943년에 지은 것이고, ‘유허비시집은’은 1984년에 발간한 것으로 유추된다,

주천공 유허비시잡에 의하면, 제막식 때 강진, 보성 회천과 웅치면, 곡성군, 광주시 등 전라남도 각지에서 참석한 120여 명이 쓴 죽천공에 대한 찬시가 『주촌집(舟村馬公遺墟碑詩集)』에 엮어져 있다. 본 『주촌마공유허비시집』은 목활자본(木活字本) 1책으로 1984년(정해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자의 크기는 19.5×28.3cm이고, 쪽수는 66쪽이다.

이 책의 권두에는 성주(星州) 이성원(李誠洹)이 서문을 썼으며, 11세손 마석순(馬錫珣), 12世孫 마윤하(馬輪河), 13世孫 마동신(馬東信)이 발문을 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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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장흥마씨대동보--(363)霽岩公 丁鳴說 丁酉日記의 제목으로 게재돼 있다.

2) 악야(岳爺)는 악비(岳飛, 1103-1141)를 가르킨다. 중국 남송 초기 무장이며 학자.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남송 때 후배이(호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이 되었다. 그러나 무능한 고종과 재상 진회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국 저장성 항주에 있는 악옥묘에 관우와 함께 배향되었다. 이야(李爺)는 이순신의 이칭이다. 는 어르신이라는 뜻으로 중국인에게는 존경의 의미이다.

3) 의원(疑援) : 구원(救援)을 의심하다.

4) 이 비문은 안양면 학송리에 있는 마하수공 유허비(遺墟碑)’의 비문 국역본의 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주천공유허비舟村公遺墟碑)’이다

5) 정호(程顥,1032~1085) :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 정호의 동생 정이(程頤,1033~1107)도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들은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학자로 불리며, 이 둘을 정부자(程夫子)’, ‘정이천(程伊川)’으로 부른다.

6) 북송(北宋)의 정부자(程夫子, 程伊川)이 지은 안락정에 새긴 명 顏樂亭銘이 있다. ‘안락정(顏樂亭)’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던 옛터에 지은 정자(亭子)이다. 여기서 정부자(程夫子)는 그 명()의 마지막 장에 우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 둘 수 없네. , 올바른 그의 학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하였다.(性理大全 卷76). 이것은 안연의 즐겨 살던 곳에 후현(後賢)들이 그 장소의 유서마저 인몰(湮沒) 될까 염려하여 정자를 세우고 명()을 찬술(撰述)하여 영원토록 모앙(慕仰)하려 한다는 뜻을 표현한 글이다. 그러므로 우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 둘 수 없네 水不忍廢 地不忍荒라는 구절은 후인들이 선대(조상)가 기거하던 장소에 추모하는 표상을 남기거나 추모비를 세울 때 흔히 이용하는 구절이다.

7) 화개산(華蓋山 230m) : 장흥馬氏의 집성촌인 학송마을의 주산이요 뒷산이다. 화개산은 안양면의 사자산(666m)의 낙맥이 동으로 뻗치며 검암산(500m), 삼비산(664m), 상제봉(620m), 투구봉(520m), 매봉산(370m) 등을 형성하며 서남으로 뻗어네리다가 검암산(칼바위산)에서 뻗어내린다 뭉친 곳에 화개산이 위치한다. ()으로는 장수리, (西)로는 요곡재를 넘어 요곡마을과 경계하며, 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 끝에 학송리가 자리한다. ()으로는 학송 저수지와 사자산 끝머리인 골치산에 이른다. 마하수(馬河秀) 선친인 마인서(馬麟瑞,1512~1594)가 인근 장수리 주암촌에서 이곳 화개산 아래 해발 70~80m 자락으로 입촌한 후 마을을 조성하니, 바로 학송마으이었다. 이때부터 화개산 기슭의 소나무 군락지에 학()들이 서식하여 마을 명을 학송(鶴松)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8)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친다는 의미.

9) 마하수의 묘갈명을 지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를 가르킨다. 마하수 공의 묘갈명은 淵泉先生文集(연천집)(26)에 수록돼 있다. 연천은 형조공조병조호조예조 판서 등과 대제학을 지내고 후에 좌의정까지 역임했던 당대 대석학이었다.

10) 이 유허비시집은 겉표지는 舟村集으로 속표지는 舟村遺墟詩集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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