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의 세월을 기억하는 팽나무들이 있는 장흥서초등학교
풍랑의 세월을 기억하는 팽나무들이 있는 장흥서초등학교
  • 정남진 장흥신문
  • 승인 2018.11.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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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11

양기수/장흥향토사연구회장

사람의 일생은 1세기에 불과하지만 나무들은 몇 세기를 살아 온 나무도 있다. 나무는 자신의 삶이 좋건 나쁘건 상관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기에 우리는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노목 아래 서면 저절로 노목을 우러러보게 된다.

장흥서초등학교 주변에는 짧게 잡아도 2∼3세기를 넘긴 노목이 교정주변에 다섯 그루가 아직도 그 세를 자랑하며 서 있다. 그 노목은 우리나라에서 당산목으로 위엄을 보이는 나무 중 가장 많은 팽나무이다. 지금은 서초등학교 교정에는 서로 다른 위치에 두 그루만 서있으나 10년 전에는 역사의 한 켠을 장식했던 노목이 된 팽나무 하나가 더 있었다.

장흥서초등학교 주변에 이렇게 고목의 팽나무가 많이 서있음은 조선시대 장흥서초등학교 교정이 바로 장대(將臺)였기 때문이다. 장대는 장흥도호부 장졸(將卒)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장소였고 무과(武科) 시험을 시행하였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장대를 관리하던 관청이 지금의 ‘한우마을식육점’과 학교관사 사이의 공터(예양리 120-10번지)에 있었다. 이 공터에 있던 한옥관청은 1917년 6월9일 총독부관제령 제1호와 조선총독부령 제34호로 ‘면제(面制)’를 공포하게 되자 “장흥면사무소”가 되어 업무를 보게 되었다. 이후 장흥면사무소는 1932년 11월1일자로 ‘장흥면(長興面)’과 ‘부동면(府東面)’이 합병되자 청사를 지금의 장흥읍 기양리 110번지(현 위치) 이전하여 떠나고 청사로 사용하던 건물은 1936년도에 해체하여 장흥읍 수성당(壽星堂, 동동리 186-8번지)으로 새롭게 태어나 현존한다.

한편 장대는 1894년 1월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를 몰아내어 패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지려는 동학교도(東學敎徒)를 중심으로 농민혁명이 전라도 고부군에서 발생하여 그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졌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에 신무기에 당할 길이 없어 장흥 석대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붙잡혀 처형을 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당시 남도장군으로 일컬어진 동학 대접주 이방언(李芳彦)과 그의 아들 성호(聖浩)가 이곳 장대에서 1895년 1월20일(음력12월25일) 처형당하게 된다.

▲사카이(酒井)농장 뒤에 보이는 숲이 팽나무이고 장대를 관리하는 건물이다 / 양기수 소장
▲사카이(酒井)농장 뒤에 보이는 숲이 팽나무이고 장대를 관리하는 건물이다 / 양기수 소장
▲장흥공립소학교 당시, 뒤에 보이는 팽나무에 이방언 부자가 처형되었다 / 이대희소장
▲장흥공립소학교 당시, 뒤에 보이는 팽나무에 이방언 부자가 처형되었다 / 이대희소장
▲현재의 장흥서초등학교 전경, 남산공원에서 촬영
▲현재의 장흥서초등학교 전경, 남산공원에서 촬영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정국은 안정되지 못하고 외세의 가입으로 더욱 정국이 혼란해지자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60-70여명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의병활동이 시작되어 전남 곳곳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 혁명군에 의해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을 비롯한 96명의 장졸이 장흥성을 지키다가 순절하는 등 사회적인 대위기를 맞자 장흥에 1906년 7월 “전라남도 경무서 장흥분서(全羅南道 警務署 長興分署)”가 세워 장흥, 강진, 보성, 순천, 광양, 돌산, 여수, 흥양, 낙안, 해남, 완도, 진도, 제주까지 관장하여 치안을 유지하게 하였는가 하면 장흥에 “헌병분대 분견소” 까지 두어 의병활동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더욱 심화되었고 장흥에는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이 이끈 의병 9백여 명이 장흥경찰서와 장흥헌병분견소 등을 기습하는 등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이들의 진압을 위해 일본군 보병 1개 소대가 1908년 12월13일 장흥군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의병을 토벌을 주업무로 하여 속칭 “우찌야마(內山)토벌대”라 했다. 그들이 주둔하는 장소가 곧 장대(將臺)라 불리는 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 부지(예양리 120번지)이다.

이후 장대 부지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한 “일본인회립소학교(日本人會立小學校)”를 건립하여 1945년 해방당시까지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로 사용하게 된다. 1910년도에 장흥향교에서 발간한 장흥읍지 속칭 경술지(庚戌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교원으로 ‘타카하시재경기(高橋經紀)’이고 일본인 학생이 15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후 학교사항에 대하여는 일본인이 다녀서인지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고, ‘목포신보’ 1912년 9월2일호에 “일본인회립소학교”가 “장흥공립소학교”가 되었다는 기록뿐이다. 그리고는 1930년대부터는 순수 일본인 외에 친일파 아이들도 일부 다녔다는 구술만 전하고, 해방당시 학교 이름이 장흥욱고등소학교(長興旭高等小學校)라고 불렸다는 내용뿐이다. [사진2]

이후 1945년 8월15일 정오를 기하여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맥아더사령부가 일본의 조선 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1945년 9월9일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은 후, 9월11일 일장기 하강식과 동시에 아베(阿部)를 해임한 후, 미군정 장관에 아놀드(Anold,A.L.) 소장을 임명하여 9월19일부터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SAMGLK,약칭 ‘미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을 확정짓고 군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따라 피그 대령이 10월23일 미 제101 민사부대와 함께 광주에 들어와 전라남도지사로 취임하고, 장흥에는 아이콘 소령이 이끈 미 제61군정중대 사령부가 10월28일 들어와 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예양리 120-2번지)에 여장을 풀고, 지금의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남동리 88번지)에 임시 사령부 사무실을 두어 장흥, 보성, 영암, 강진, 해남, 완도의 6개 군을 관활하면서 군정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군정은 장흥군수에 고영완(高永完)을 임명하고 손석민(孫錫珉)을 경찰서장으로 임명하여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군정을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 어린이들이 다니던 장흥욱고등소학교를 미군정 병사(兵舍)로 사용하였다. 그러자 손동기(孫東基) 외 장흥읍민들이 장흥욱고등소학교를 다시 배움의 터로 이용하기 위해 정부에 요구하여 1946년 2월1일 교사(校舍) 6실과 숙직실 1동, 관사 1동을 인수하고 4학급을 편성해 “장흥공립서국민학교”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교장은 민동식(閔東植)이 학교후원회장으로 손동기(孫東基)가 취임하여 운영하면서 그해 4월1일 6학급으로 9월1일에는 9학급을 편성하였다. 당시 학생은 총 114명으로 남자 61명 여자 53명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까지 2월1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였다. 다음해인 1948년 3월1일 학교후원회에서 가교사 2실을 증축하여 12학급으로 편성하고 그해(1948.7.17) 첫 졸업생으로 35명(남18, 여17)을 배출 한 후 9월1일 110명(남58, 여52)이 입학해 12학급을 편성하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는 교사 4명과 준교사 7명으로 11명이었다. 제2회 졸업생은 112명(남65. 여47)으로 1949년 5월1일 실시하였으며 당시 학생수 751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침공으로 장흥에는 7월28일 약 550여명의 인민군 정규군이 무력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지역의 치안을 맡은 장흥경찰은 7월22일 장흥경찰서에 몇 명만을 남기고 전남경찰 동원령에 따라 전남북의 경계인 “갈재” 사수명령을 받아 떠났기 때문에 장흥경찰이 지방좌익분자와 폭도들의 활동을 제압하지 못하자 장흥의 좌익폭도들은 7월24일 장흥군청에 “인민위원회” 간판을 걸게 하였다. 경찰동원령에 응했던 장흥경찰은 적 탱크 등의 화력에 밀려 45명의 경찰이 희생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7월28일 오후 완도로 작전상 후퇴를 하여야 하였다.

당시 장흥을 침공해 온 550여명의 인민군 정규군은 장흥서국민학교를 병사(兵舍)로 삼아 주둔하면서 이곳에서 첫 지방인민군을 모집하고 유치면 보림사에서 군사교육을 시키는 이른 바 인민해방작전을 벌였으나 1950년 9월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의 성공적 수행으로 장흥에 주둔하였던 인민군 정규군 남해여단 2백여 명이 유치면 강만리로 들어가고, 남로당 목포시당 일부와 완도, 해남, 장흥, 영암조직이 가지산과 국사봉에 집결, 전남도당에서 유격전에 대비 제3지구당으로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후퇴하였던 장흥경찰이 1950년 10월3일 장흥경찰서 직할파출소를 설치하여 경계하고 경찰주력부대가 10월5일과 6일 안양면 수문과 해창으로 들어와 장흥군을 수복한다. 인민군이 주둔하던 장흥서국민학교는 학교시설과 비품 등이 파괴되어 인민군이 떠난 뒤 곧바로 수업을 할 수 없어 10월21일 재학생을 심사하여 거주지에서 가까운 학교로 배치시키고 시내에 거주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12학급을 편성하여 교육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른다.

1946년 2월1일 개교한 장흥서초등학교는 2018년 2월13일 71회 졸업생을 포함해 총 6,685명을 배출하였고, 1984년 9월12일 개원한 병설유치원은 34회에 거쳐 총 792명이 배출되었다. 현재 장흥서초등학교는 16개의 교실과 도서·음악·과학·강당·행정실 및 급식실등 12실에 교장을 포함한 교사 13명과 행정요원 및 조리사 외 10명으로 총23명이 33명의 유치원생과 67명의 초등학생들을 돌보며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장흥서초등학교 교정을 오늘을 살고 있는 젊은 장흥 사람의 대부분이 여느 학교와 같이 초등교육을 받는 장소로만 여긴다. 그러나 조금 나이드신 토박이 장흥분들은 일제시대에도 고등소학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기까지는 하나 이곳의 터가 우리 국토를 지키는 숫한 군인과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는 장흥군을 수호하던 장졸(將卒)들의 체력단련과 무예단련 장소였고, 동학교도와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이방언(李芳彦) 부자가 처형당했던 팽나무가 지금부터 10여 년 전까지 예양관(汭陽館)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장흥서초등학교의 교정은 새롭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형장의 역할을 했던 그 팽나무가 세상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노목으로 그대로 고사하였을 때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재목으로 이용코자 하였으나 노목의 몸체에서 많은 화살촉이나 총탄과 같은 쇠붙이 들이 있어 결국 화목으로 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야기로만 전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뿐 아니다 서초등학교는 한일합병으로 일본군이 이 땅에 진군하였을 당시는 일본군이 교정에 진을 치고, 해방이 되자 미군이 진을 쳤는가 하면, 해방정국의 혼란스런 사회에서 청장년들이 이곳에서 지역의 자주 방위를 위한 향토방위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라도, 한국동란으로 북한인민군 정규군이 주둔하며 인민군 지원군을 이곳에서 모집했다는 사실은 방공을 국시로 삼았던 시절. 이러한 사실 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비밀이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음을 상기하면 오히려 가슴이 아픈 장소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사실은 장흥서초등학교가 단순히 문자를 해득하고 공동체의 삶을 처음으로 배우는 초등학교의 역할로서의 역할도 있다 하겠지만, 그동안의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 단순한 이야기꺼리가 아닌 애국애족을 강조하고 이를 가르치는 학교나 도서관, 아니 박물관으로서의 역할도 충분한 장소라 여겨지니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보전하는 일에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직도 그 긴 세월의 역사를 말하고자 하는 팽나무가 꿋꿋하게 서있으니 말이다. ♣小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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