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향기가 흐르는 탑산
자비 향기가 흐르는 탑산
  • 정남진 장흥신문
  • 승인 2018.12.0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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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한담 11

유용수/시인·수필가

무성한 팥배나무가 가을볕에 멍든 잎사귀를 털어내자 붉은 열매로 또다시 화려함을 토해내는 것을 보면, 번뇌의 경계를 벗어난 적멸은 생멸이 함께 사라지기에 처연하게 아름다워지는 걸까. 나무 가지마다 붉게 쌓아놓은 허영조차도 간수하지 못하고 후두둑쏟아낸 자리를 지나, 우리는 숲의 끝자락에 걸린 산사로 들어와 고단한 탐욕과 곡진한 삶을 벗어 가벼워지고자 하는 것이다. 가을볕이 촘촘히 파고든 십일월, 천관산 탑 공원을 둘러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백의 시 한 구절을 읽으며 곱게 난 넌출고개를 오른다.

가을바람에 가을 달 맑고 밝은데/ 秋風淸 秋月明 /낙엽은 우수수 모였다가 흩어지고 / 落葉聚還散 / 까마귀 잠자다 소스라쳐 놀라네 / 寒鴉棲復驚

잔대 꽃 하나가 감사함과 은혜로움을 품고 교교한 가을빛에 흔들거린다.

어느 누구와 사랑스러운 눈 맞춤 한번 해보지 못한 가련한 쥐꼬리망초와 산부추는 화려한 자홍색을 두르고 있는 듯 없는 듯 가을볕에 몸을 태우고 있고, 갈바람은 후미진 골짜기에 무한사랑을 품고 남모르게 피었다가 함초롬히 지고 있는 노란 마타리 꽃의 탄식과 설움까지 털어내고 있다.

산을 뭉개는 구름이 바람과 함께 적요를 헤치며 휘돈다. 조락(凋落)하는 산허리로 흐르는 애타는 염불소리에 뒤엉키고 찌든 어둠을 들숨과 날숨으로 토해내며 오를 때, 깊은 옹이를 움켜쥔 키 작은 소나무에서 쏟아내는 포근한 젖 내음으로 위로받으며,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풍경의 울음소리에 휘청거리는 억새꽃 자리에서 가을의 달달한 향기와 숨 막힐 것 같은 계절의 화려함을 끌어안고 쪽빛 바다를 바라본다.

바람이 휘청거릴 때마다 바다를 건너온 파도는 수천만 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밀려와 검게 멍든 돌밭에 하얀 포말로 자지러지는 것은 굴곡진 세월 속에 상처뿐인 천관보살을 위로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홀연히 사라진 89 암자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걸까. 불안의 시대 속에 허기진 생각들을 쏟아낸 반야굴 에서 몇 발자국 오르니 날 선 산죽 너머 이끼 낀 축대위에 천관보살의 향기가 흐르는 천년 사찰 탑산사가 스멀거린다.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바람과 구름이 주춤거리는 하늘 길 아래, 인도의 아소카왕이 아육왕 탑을 세워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장엄한 자리에 800(신라 애장왕1)영통화상이 창건하여 의상대사와 법량대사, 담조대사, 침굉선사등 많은 고승이 수행했던 탑산사는 화려한 과거를 묻고, 부처의 가피와 천관보살의 지혜를 전할 뿐, 산사는 시들한 햇살이 내려앉은 억새꽃에 빛나고 있다.

속진(俗塵) , 슬그머니 법당에 밀어 넣는다. 시린 하늘과 쪽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자비의 눈과 마주하며 몸 안에 익어가는 달갑지 않은 기억들을 끄집어낸 후, 꿈꾸는 기도를 가만히 털어놓는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게 하소서. 남을 이롭게 해야 내가 이롭게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이제는 가슴에 묻어둔 욕심 하나를 비워낼 줄 아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집착과 갈등, 무지와 분노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맞볼 줄 아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시고, 거친 삶 속에서 망가지고 상처 난 영혼, 잠시 멈추고 돌아볼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내 안에 앙칼지게 익어 가고 있는 퍽퍽한 삶의 자락들을 내려놓고 법당을 나오자 바다를 밀고 올라온 바람이 가슴을 덮치며 지나가고, 침굉당(枕肱堂) 지붕 위로 창연한 가을이 흐른다.

스님, 침굉당이라는 당호가 궁금합니다.”

일생을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항상 화두를 놓치지 않고 정진하다 좌탈입망으로 열반에 든 침굉 현변선사(枕肱 懸辯, 1616~1684)의 삶과 스님의 유언에 따라 법구를 금화산 징광사(순천 낙안) 바위틈에 모셨는데, 새나 짐승이 달려들지 않고 그 모습이 변하지 않아 3년 뒤 사중스님들이 다비하고자 할 때, 스님의 법구가 저절로 불길에 휩싸여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도성스님의 이야기 속에서 과거로부터 배우는 한 수행자와 대면하고 있다. 무엇을 내려놓았기에 저렇게 평온한 모습일까. 가사 장삼 한 벌 걸린 침굉당에서 한 수행자의 무소유 삶을 더듬다가 문을 열고 나온다.

헝클어진 생각을 추스르지 못하고 찾아온 산사에서 스님의 한마디가 새겨진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바쁘게 쫒아가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지금 그 자리에서 뒤돌아보고 살필 줄 아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의 마음이 비움이 아니겠습니까.” 긴 숨 몰아쉬며 돌계단을 내려오니 바다로 이울고 있는 노을에 마지막을 태우는 붉은 팥배나무 열매가 산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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