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논단 - 숲에서는 꽃들이 필사적이다
■장흥논단 - 숲에서는 꽃들이 필사적이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4.2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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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수필가

숲은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고 한다. 묵묵히 산을 지키는 오래된 나무의 모습을 보면 평안하다. 마을 당산나무 앞에서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할머니 집이나 외갓집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오늘 숲으로 들어오는 안온한 바람에 춘란은 몸을 비비고 일어나 꽃을 피웠다. 봄까치꽃은 도랑을 뒤덮었고 양지바른 곳에는 산자고와 제비꽃이 피었다. 자드락길 돌 틈에 핀 제비꽃이 평화롭다. 봄볕으로 범벅이 된 숲길을 타고 내려오는 계곡 물소리는 겨우내 시리던 마음을 녹인다.

오늘도 삶이 너무나 숨 가쁘니 잠시 쉬어가라고 붙잡는 마을 뒷산이 꿈틀거린다. 이미 연녹빛 떡잎을 드러낸 나무도 있다. 그래서 삼월은 숲이 제자리를 잡는 시기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규범에 따라 돋아나 몸을 부풀린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봄볕에 보채고 일어서는 생명들이 숭고하다. 차가운 땅바닥에 뿌리를 박은 채 누군가의 것들을 탐하지 않으며 햇볕이 주는 만큼 몸을 허락하는 숲의 질서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숨을 뱉어내는 나무들의 고요함에 탐욕스러운 하루를 의지해도 좋을 듯하다. 삼월의 숲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생명이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허물어진 언덕 끝자리에 핀 춘란이 교태를 접고 있다. 산짐승이 뜯어 먹고 남겨둔 허름한 잎사귀를 의지하여 꽃 핀 후 시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춘란은 성하지 않은 자신을 비관하지 않고 가장 소담한 모습을 드러내고 곱게 시들고 있다. 그 자리가 꽃자리이다.

오늘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다가가 기대고 싶은 날이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을 찾아가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수선스러운 언어보다 엷은 미소만으로도 모든 것들이 풀어질 것 같은 뭉근한 날. 언어로 저지른 것들과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새겨진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빛깔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어떤 가시를 숨기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상념 없이 무디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잃었던 감성을 깨우며 얼음장처럼 굳었던 삶의 탄력을 슬그머니 녹여 내는 봄날이었으면 더 좋겠다.

내게는 조금은 엉성한 삶 일지라도 약동하는 계절이 삼월이다.

생명이 움트는 삼월에는 동요하지 않고 응축된 에너지가 올라오는 계절이다. 그래서 삼월 숲에서는 돋아나는 생명을 위해 침묵한다. 침묵은 차단이 아니다. 자연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교감하는 것이다. 교감은 무릇 생명과 눈 맞춤으로부터 시작이다. 나뭇가지를 비집고 내려오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 교감이다. 그것들이 얼었던 대지를 녹이고 생명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월 흙에는 생명이 숨 쉬고 있다. 흙 내음을 마시면 겨우내 입은 자잘한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삼월 숲에서는 내 삶에 온전히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조용히 성찰하며 한 해를 설계할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이 필요하다. 겨우내 헝클어진 삶을 곧게 세우고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케렌시아Querencia가 숲이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행동과 불편한 잡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숲으로 가라. 들어가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걷다 보면 붙들고 있는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지 않겠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내 안에 불필요하게 들끓고 있는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숲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어느 시인은 “바람이 내 어깨를 다독이는 날이면 나는 바람이 되어 산에 오른다고 했다. 저만치 서성대는 봄날을 위해 겨우내 잠궜던 빗장을 풀어 헤치고 속진俗塵의 독한 냄새도 거두어 삭히고 산꽃을 그리워한다.”(김선욱 시인의 「등 너머의 사랑」 시집 중에서)라고 노래했다. 산꽃이 피는 산에서 속진의 독하고 오염된 더러움을 털어 내고 약동의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 숲이다.

오늘 하루도 무엇이 우리를 바쁘게 만들고 있는가. 터질듯한 부유함을 붙들고도 다 채우지 못한 욕망에 서성거리고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은 삶의 원동력은 될 수 있을지라도 행복의 조건은 되지 못함을 나는 알고나 있는 걸까, 어느 스님은 “중생은 욕망으로 살아가고 보살은 자비심으로 살아간다.”라고 설하고 있다. 오늘도 숲길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생각에 장애가 없는 삶을 꿈꾸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숲으로 가는 길에 하얗게 핀 목련이 온몸을 흔들며 꽃잎을 떨구고 있다.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나는 숨을 몰아쉬며 꽃의 과거를 회상한다. 뿌리에 힘을 주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죽은 듯이 겨우내 서 있던 속 깊은 엄숙함을 기억한다. 어느 새벽 시간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도 겨울눈을 치켜들고 잎눈과 꽃눈을 지키기 위해 털외투를 곧추세우던 목련 나무를 보았고, 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고 여여한 모습으로 봄을 기다리는 헌걸찬 모습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삼월 어느 날, 꽃이 피었다. 그때 지구는 숨을 죽이고 꽃 피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소나무 가지에서 잠을 자던 산새도 깨어나 생살을 찢으며 간절하게 피는 목련을 보았다. 이제 목련이 지고 있다. 목련이 지면 봄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래서 봄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에 오는지 모르겠다.

오늘 삼월의 햇살은 뜨겁고 숲에서는 꽃들이 필사적이다.

나도 모르게 나무와 꽃들의 숨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자드락길 꽃자리에는 아직 햇살이 머물고 있다. 그때 먼 산의 풍경이 또 한 번 나를 유혹하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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