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가 박진화를 말하다② - 슬픔을 그릴 수 있는가? … 박진화는 그린다
김상봉 교수가 박진화를 말하다② - 슬픔을 그릴 수 있는가? … 박진화는 그린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6.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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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지난 호에 이어서>

박진화의 역사화는 한마디로 말해 지옥도(地獄圖)이다.

박진화의 초기 작품은 거의 이런 그림이다. 1989년 작품 <탄생 2>는 무덤을 그린 그림이다. 그 무덤은 누구라도 망월동 무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무덤이 어떤 의미의 탄생이었을까?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박진화의 그림이 무덤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망월동 5.18 희생자들의 무덤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80년대는 이른바 민중미술의 시대였다. 박진화의 그림이 망월동 묘지에서 잉태되었다면, 우리는 그의 그림도 넓은 의미의 민중 미술의 일환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의 어떤 그림이 박진화의 그림처럼 불의한 역사 속에서 투쟁하고 상처 입은 민중의 고통을 절절하게 형상화했는가? 그래서 박진화의 그림이야말로 80년대 고통스런 한국 역사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함석헌의 글이 20세기 한국 역사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박진화의 그림은 이른바 민중 미술의 성과로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15년’전(展)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도 민중 미술가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미협 회장으로서 자기 자신이 기획했던 『민중미술 역사를 듣는다』라는 책에 그가 대담자로 등장할 뿐, 그 역사를 같이 만든 예술가로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와 민중 미술 운동 사이의 거리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박진화의 그림이 어떤 의미에서 민중 미술의 범주에 속하느냐 또는 속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그리 중대한 물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박진화의 그림이 어떤 의미에서 민중적이냐 하는 물음은 그것의 예술적 가치에 직결된 물음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물음은 박진화의 그림을 통해 나타난 예술의 민중성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민중성이 단지 예술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철학과 종교에도 요구될 수 있는 어떤 척도라면, 우리는 이 물음을 인간의 최고의 정신활동의 진리의 기준에 대한 물음으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 민중적인가? 그의 그림이 고통에 대한 응답인 한에서, 그것은 민중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미술이나 다른 예술에만 적용되는 대답이 아니라 종교와 철학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교도 철학도 오직 고통에 대한 응답인 한에서 민중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이라도 고통받고 수난받는 인간이야말로 민중이기 때문이다.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인간의 자기성찰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미술이 민중의 자기 성찰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민중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민중이 되는가? 우리는, ‘사람이 역사 속에서 모든 종류의 폭력에 의해 고통받을 때, 고통받는 인간이 바로 민중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민중은 단순히 수난받는 객체가 아니라, 동시에 폭력에 저항하는 주체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민중이 수난당하면서 저항할 때 그는 역사의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는 모든 종류의 고통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동성 속에서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언제나 선행하는 역사는 수난과 고통의 역사이다. 그 고통에 응답할 때, 민중은 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중 미술이 화폭 위에 그려진, 그런 민중의 반성적 자기 형상화라면, 민중 미술은 고통의 자기 성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한 예술적 성찰일 것이다. 그리고 박진화의 그림이 그런 고통의 형상화인 한에서 그의 그림은 민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고통을 그릴 수 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면의 슬픔을 화폭에 그릴 수 있는가? 그림도 인간의 고통을, 고통받는 인간의 내면의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세상에 수많은 슬픈 음악이 있듯이, 슬픈 그림도 있는가? 이것은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같은 공간적 표상이라도, 빛과 색채의 예술인 회화는 건축이나 조각의 직접적 물질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정신적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평면 공간에 현시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아 있다.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내면의 슬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화폭에 그대로 현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오직 화폭에 그려진 눈빛이나 표정 또는 몸짓 같은 외적 징표를 통해서만 내면의 슬픔을 간접적으로 현시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외적 형상을 통해 내적 고통을 유추한다.

하지만 이처럼 외적 형상을 통해 내적 고통을 환기시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구슬픈 음악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만 슬픈 그림을 보기는 어렵다. 세상에 유명한 그림들 가운데 어떤 그림이 슬픈 그림이었을까? 수천 년 동안 서양의 화가들이 그려온 예수의 수난에 대한 그림 가운데 어떤 그림이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수많은 성모애가(stabat mater)의 구슬픈 가락에 비하면, 예수의 수난과 마리아의 슬픔을 화폭에 그린 수많은 그림들은 적어도 감정 표현의 직접성에 있어서 음악을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유독 회화는 다르다. 그것은 내적 고통과 슬픔을 직접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음악보다 열등하지만, 우리를 자기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앞에 마주 세운다는 점에서 음악보다 우월하다. 전형적 사례로서 우리는 케테 콜비츠의 판화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궁핍>, 엄마 치마폭을 붙들고 빵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들과 등을 돌리고 얼굴을 감싼 엄마의 모습을 그린 <빵을!>이라는 판화는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가슴을 저민다. 그런데 그림은 그렇게 차마 바라볼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당신은 이 고통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떠나지 말고 계속 이 고통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이 음악이 흉내낼 수 없는 회화의 힘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타인의 고통 앞에 마주 세우기 위해 굳이 화가의 노동이 필요한가? 그것이 문제라면 도리어 화가의 더딘 손-노동에 비해 부지런한 사진작가의 발-노동이 훨씬 더 유능하지 않겠는가? 사진이 실물을 너무도 생생하게 재현하는 지금, 인간을 자아의 협소한 골방에서 끌어내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게 만들기 위해, 그림으로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박진화의 그림은 우리를 이런 물음 앞에 마주 세운다는 점에서도 도발적이다.

오랫동안 박진화의 그림은 뚜렷한 형상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런 그림 가운데 대표적 사례라고 할 <서편>을 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을 향해 걸어오는 것까지는 알겠으나, 더 이상의 형상은 식별하기 어렵다. 그 대신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전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함성이 또는 노래 소리가 마치 들려오는 듯한 착각 같은 것에 빠져들게 된다. 무슨 까닭일까?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색은 빛의 스펙트럼인 것이다. 그런데 빛에는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이 있다. 하나는 직선으로 진행하는 입자의 성질이며, 다른 하나는 파동의 성질이다. 직진하는 입자로서의 빛은 선명한 기하학적 형상의 근거이다. 그러나 파동으로서의 빛은 들을 수 없는 소리의 근거이다. 소리가 음파 즉 파동이듯이, 빛도 광파 즉 파동이다. 그러나 음파는 귀로 들을 수 있지만, 광파는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들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듣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림이 파동으로서의 빛의 파노라마를 그려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림을 통해 빛을 흔들리는 파동으로 듣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면의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귀로 들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면에서 울리는 고통스런 신음 소리는 남이 귀로 들을 수는 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파가 아니라 심파(心波) 또는 정신의 파동인 것이다. 그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귀로 들을 수는 없다. 박진화는 귀로 들을 수 없는 내면의 소리를 빛의 파동으로 들려주려 한다. 그의 그림에서 윤곽이 흐려지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형상을 희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마치 파동으로서의 빛이 이중 슬릿을 거쳐 회절과 간섭현상을 일으키듯이, 그의 그림에서도 선명한 윤곽선은 서로 간섭을 일으켜 흐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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