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 내겐 길이 없습니다 //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 숲 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 더러 길이라는 데 / 눈먼 나는 아 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 막힐 듯, 숨 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오세영, 《6월》 전문
해거름 햇살이 붉게 물든 강물은 요란하지 않다. 천천히 흐르는 물소리가 취향을 넘어 치료가 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예양강은 사람을 품고 흐른다. 들리는 물소리가 낯설지 않고,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물 냄새 또한 낯설지 않다. 몸속에 새겨진 내 어머니 젖무덤에 베긴 냄새가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장흥은 필시必是 어머니의 품”인 것이다.
나는 오늘 헝클어진 삶과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벗어나고자 길을 걷는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물비늘이 흩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요히 침묵 속으로 들어가 예양강 물레길을 걷는다. 백석이 노래한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다.’라는《통영 2》 한 구절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양강 물레길도 ‘자다가도 일어나 걷고 싶은 곳’이다. 물레길은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야 오감을 느낄 수 있다. 해찰도 부리며 걸어야 한다.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적시고 걸어야 하고, 해거름 햇발을 선점하려는 금계국이 꽃대를 뒤틀고 있는 모습도 찬찬히 바라보며 걸어야 한다. 물레길을 걷고 있으면 자연스러움이 배어난다. 이처럼 아름다운 물레길을 맨정신으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잘 마시지 못하는 막걸리이라도 한잔 걸치고 걸어야 한다. 비틀비틀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 두런두런 또 다른 세상을 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처럼 푸른 유월 어느 날. 막막함을 붙들고 물레길에서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은 날도 있었다. 외딴 유선각에 걸터앉아 한없는 설움을 쏟아낼 때도 강물은 오늘처럼 무심히 흘렀다.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고, 그냥 미안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나에게 미안했고, 함부로 내 버려둔 나에게 미안했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보고 싶어도 애써 당당한 척하는 안타까운 나에게 더 미안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더 울어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푸른 억새밭에서 들려오는 청량한 개개비의 울음소리가 감정을 깨운다. 개개비의 울음소리와 떼로 유영하는 물고기의 힘찬 몸놀림을 바라보는 짧은 물멍의 시간은 삶의 한쪽을 내려놓기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 물레길을 걷다 보면, 삶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징검다리와 나무를 묶어 풍경을 만들고, 물레길을 걷는 사람은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있어 경이롭다.
프랑스 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 교수(1953 ∼ )는 『걷기 예찬』《2002. 현대문학》이라는 산문집에서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고,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이며,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서 찍어놓은 어떤 연대감 같은 것이다.”라고 길을 정의하고 있다. 예양강 물레길이야말로 무수한 사람들이 써 놓은 풍경이다. 오랜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예양강은 여러 세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역사이다. 꾸불꾸불 흘러오는 물 풍경으로 옛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연대하는 강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또 이렇게 말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며,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했다. 그렇다. 행복한 감정을 되찾으려면 몸의 감각을 열어 놓고 걸어야 한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불러내는 것이다. 생각이 무성茂盛하더라도 걸어야 한다. 그것만이 내적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나를 성찰케 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힘이다.
예양강 물레길을 걷는 것은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다. 걸으며 돋아나는 모든 기억은 내가 걸어왔던 삶이고 내가 걸어가야 할 또 다른 세상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밀어내지 말아야 하고, 구속하지도 말아야 한다. 참담한 패배의 순간도 소중하다. 처참하게 기억되는 삶 일지라도 긴 숨 몰아쉬며 걸어야 한다. 그리고 허망한 꿈이 솟구칠지라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금계국과 데이지꽃이 뭉그적거리는 유선각에 앉았다. 별 하나가 강물에 잠겼다. 강바람이 자연으로 향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다독인다. 아무 생각이 없다. 초점 잃은 텅 빈 상태.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지금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