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전 장흥군 안양면의 경우, 남해 연안인 장재도 앞에서부터 사촌리 - 해창리 앞을 거쳐 지천포 앞까지 이어진 깊숙한 해창만이 있었다. 그래서 1747년 『장흥읍지(정묘지)』 안양방에는 “장재도(莊載島) : 해창 아래에 있고 세선(稅船)이 정박하다. 사촌리(沙村里) : 장재도 북 5리에 있고 건 모래와 염전이 있다. 지천포(芷川浦) : 해상 선박이 이곳에 정박하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10년 『장흥읍지(경술지)』에 “해창(海倉)은 전세(田稅)를 이곳에서 수로로 양주(楊州), 염창(鹽倉)까지 운송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38년 『장흥읍지』 및 1966년 『장흥읍지(병오지)』에서는 “해창항 : … 1928년 용산면 두암리와 누룻배가 왕래하였으며, 목포를 월 10회 운항하였다. 1940년 물동량 100톤이 반출입 되고, 200톤급 배가 왕래하였다. 지천포 : 거문도, 평일도, 완도, 진도, 제주도 등지와 어선이 왕래하고 파시를 이루었다. 1938년 해창 간척사업으로 폐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안양면 해창만이 내륙 깊숙이 지천포까지 이어져 있어, 지천포는 포구로서 작은 항만으로 기능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8년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8년 목단포 간척공사를 시작으로 1938년에 이루어진 해창‧지천포 간척공사를 말한다. 이 간척공사로 지천포 앞 바다 일부는 농경지가 되었고, 지천포 역시 어촌에서 농촌으로 변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천포에 남해바다가 이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어촌이었던 지천포의 앞 바다는, 당시 장흥부에서 가장 가까운 연안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해창만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해창 앞 바다는 200톤 배가 정박할 수 있을 만큼 깊어서 해창은 장흥부에서 조세로 바치는 세곡선이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해창에서 더 깊숙이 내륙으로 이어진 지천포는 얕은 바다로 인해 소형 어선만이 정박하거나 작은 어선들 왕래하는 작은 어항이었고 지천포를 통해 남해 연안으로 소형 어선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다 지형상으로 지천포는 곧바로 안양면 중심부로 상륙할 수도 있었고 장흥부의 남해 연안 중에서 장흥 중심인 장흥부와는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포구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흥부와는 최인근의 연안이었다는 점만으로, 지천포는 지형적으로 중요성을 안고 있었다. 고려말 장흥에도 왜구 침입이 잦았고, 왜구 침입은 장흥부가 있는 정안현의 관산 앞바다가 주로였지만, 안양으로도 왜구의 침입도 있었다. 이때 왜구의 침입은 장흥부의 가장 깊숙한 내륙의 포구였던 지천포였을 것이다.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일군 충무공이 서해로 빠져나간 사이에 전라도 서남해안은 명량해전에 패배한 왜구들의 주요한 침략 거점이 되며 수많은 전란의 입해를 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월 10일 전후로 펼쳐진 해남‧강진 병치전투, 10월 10 강진 남당포(당포)로 상륙한 왜구와 안동김씨 김흥업(金興業)의 남당포 전투, 남당포 전투에 이어진 장흥 평장리 금안마을에서 김응원‧김응규의 토구동 전투 그리고 석대들에서 해남 윤형‧윤검 형제의 전투와 위대기의 중령산 전투가 그 사례이다.
이들 강진, 장흥 일원에서 왜구 침입에 맞선 전투가 모두 10월 15일 전후에 일어난 전투였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 10월 초순에 일단의 왜구들이 장흥 안양면 해창만의 끝자락 포구 지천포로 상륙하였다. 왜구들은 용산면과 안양면 일대를 유린하며 잔인한 폭거와 만행을 저질렀다. 부녀자들을 납치하고, 도공들을 납치했으며, 무자비하게 양민들을 참살하고 아녀자들을 강간했다. 왜구의 그 폭거에 맞서며 목숨을 끊은 절부(節婦)가 용산‧안양면 일대에서 4명이나 나왔다. 그들은 물론 사대부의 여인들이었기에 후인의 기록으로 남겨졌고 그로 인해 열부로서 정려(旌閭)도 세워졌지만, 과연 왜구들이 그 사대부 부녀자들만 강간했을까? 아니다. 사대부 여인들이 아닌 양민의 아녀자들도 무수히 강간당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당한 폭거는 당연히 모두 묻혀 버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명량해전에 참전했던 동촌의 초계변씨들은 10여 명이었다. ‘초계변씨13충훈유허비’에 의하면, 초계변씨 17세 변홍원·변홍제·변홍주·변홍건·변홍달·변홍적·변홍선·변홍량 등 8인을 포함하여 18세 변덕항·변덕장·변덕일·변공의 4인 등 모두 12인 의사들이 명량해전 및 정유년 해전전투에 참여한 의사(義士)들이었다. 아마 17세 의사들 8인은 이종형제들로 30,40대 장성한 의사들이었을 테고, 18세 4인 의사들은 약관을 전후한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초계변씨13충훈유허비’를 엄밀히 분석해 보면, 17세 8인의 의사 모두 충무공의 명량해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18세에서는 변덕항과 변덕장도 참전하였다. 그리고 이들 변씨 10인 의사들은 고향으로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급거 귀향하였다.
“(변홍원) … 왜구가 고향 땅으로 침입했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장흥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니 적을 막는데 어찌 조금도 지체하랴’ 하고 여러 형제와 더불어 정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지포로 향하여 (지포전투에서) 적을 무찌렀다.”
“(변홍제) … 지포전투에서 형과 함께 순국했다.”
“(변홍주) … 충무공이 복임하자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백남진 문영개 마하수 정명열 김성원 등 300여 인의 의사와 함께 전선 10여 척을 수리하여 회령포(명량해전) 이순신의 진으로 들어갔다.”
“(변홍달) … 회령진(명량해전)에 이어 지포에서 침입한 적을 막으며 남포까지 추격하였다.”
“(변홍량) … 정유년에 문영개, 정명열 등과 함께 명량해전에서 적을 추격하였다. …지포전투에서 적 수천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고 상처를 묶고 싸서 독전하다가 군인들 속에서 마침내 전사했다.”
지천포 전투의 전투 개항은 나오지 않지만, 지천포 전투에 참전했거나 지천포 전투에서 순절했다는 변씨 들의 행적의 일부분이다.(‘초계변씨13인충혼유허비’)
‘초계변씨13충훈유허비’에 의하면, 지천포 전투에 순절한 의사는 변홍원, 변홍제, 변홍량 3인이다. (변씨 족보에서는 6인으로 나온다).
또 초계변씨 족보에 의하면, 변홍건‧변홍달‧변홍적‧변홍선의 부친 변국간(16세)이 1951년 별세하였고, 기일은 10월 18일이었다. 그리고 지천포 전투에서 변씨 형제들이 사망한 날짜는 10월 17일이다. 그러므로 지천포 전투는 16일∼17일에 일어났을 것이다. 전투는 어디서 벌어졌을까? 지천포 주변의 벌판(뭍)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지천포 앞바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변씨들이 충무공 후원군으로 갔을 때 향선 10여 척으로 이동했으므로, 고향의 왜구 침입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왔을 때도 당연히 향선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천포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왜구를 만나 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진포로 이동했을 때 300여 명이 뒤따랐다고 했으므로 100여 명은 최소 변씨들을 뒤따라간 정병이었을 것이다. 이들도 당연히 함께 귀향했을 것이고, 결국 100여명의 정병과 지천포·동촌 등 양민들도 당연히 함께 합세하여 참전했을 것이므로 지천포에서는 왜구와 대단한 전투가 치러졌을 것이다. 변씨의사 몇 분은 남포 전투까지 참전했으므로 왜구들은 남포를 경유하며 퇴각하였을테고, 변씨들은 남포전투까지도 참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변씨 의사들 3인(혹은 6인)은 이 지천포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수많은 이름없는 안양방의 양민들도 함께 전사했을 것이다.
이것이 1592년 10월 16일,17일을 전후로 지천포 앞바다에서 치러진 지천포 전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