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당시 초계변씨의 집성촌은 사자산 기슭의 동촌(東村)이었다.
당시 안양방에서 가장 성세한 마을은 아마 수원백씨 집성촌인
외기산·내기산·동계와 함께 동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읍지(정묘지)』 안양방의 주요 인물 군이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동촌의 초계변씨들이 거의 안양방 인물의 30∼40%를 점유할 정도로
관료직에 입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아마 장흥부 내 마을 단위에서 역대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었을 듯싶다.
그만큼 당대 동촌마을의 초계변씨의 성세는 대단했다는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서>
1747년에 발행된 『장흥읍지(정묘지)』 ‘안양방(安壤坊)’의 마을들은 외기산(外岐山), 내기산(內岐山), 동계(東溪), 비천동(飛天洞), 동촌(東村), 가장동(可藏洞), 고당(姑堂), 운정(雲亭), 방촌(傍村), 요곡(蓼曲), 상운계(上雲溪), 하운계(下雲溪), 수대(水大), 양사동(良思洞), 서당촌(書堂村), 모령(茅領), 풍암(豐巖), 중산(中山), 지천(芝川) [이들은 상도(상道)에 속한다], 학송리(鶴松里), 평촌(平村), 봉수동(烽燧洞), 수문포(水門浦), 인산(仁山), 사촌(沙村), 교동(橋洞), 해창(海倉)[이상은 하도(下道)에 속한다] 등으로 모두 27개 마을이었다. `
전체 마을 호수는 1,050호였고 인구수는 남자가 1,231명 여자가 1,115 명이였다.
당시 초계변씨의 집성촌은 사자산 기슭(지금의 비동리 알대)의 동촌(東村)이었다.
당시 안양방에서 가장 성세한 마을은 아마 수원백씨 집성촌인 외기산·내기산·동계와 함께 초계변씨 집성촌인 동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읍지(정묘지)』 안양방의 주요 인물 군이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동촌의 초계변씨들이 거의 안양방 인물의 30∼40%를 점유할 정도로 관료직에 입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아마 장흥부 내 마을 단위에서 역대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었을 듯싶다.
그만큼 당대 동촌마을의 초계변씨의 성세는 대단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1747년에 장흥에서 발간한 『장흥읍지』 ‘안양방’편 ‘인물’조에 수록된 초계변시들의 인물들이다. 이 기록만으로 당대 동촌에 거주하였던 초계변씨의 성세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총묘(塚墓)
변온(卞溫) 묘 : 목단 안 기슭에 있다.
변희손(卞喜孫) 묘 : 이산(梨山) 서쪽 위 기슭에 있다.
변국간(卞國幹) 묘 : 이산(梨山) 서쪽 가운데 기슭에 있다.
사마(司馬)
변온(卞溫) : 판윤(判尹 : 정2품) 남룡(南龍)의 5대손이다. 충청도에서 왔다. 생원·진사시에 모두 급제하였다. 사복시정(司僕寺正 : 정3품)과 동복(同福 : 화순군의 옛 지명) 현감을 역임하다.
변효인(卞孝仁) : 온(溫)의 아들. 진사이다.
변대손(卞大孫) : 온(溫)의 손자. 진사이다. 자는 여경(餘慶). 영천영천(靈川) 신잠(申潛,1491~1554) 과 교류하였다. 신잠이이 만사시를 남겼다. [영천의 『관산록』에 출전한다.
『관산록』에 그와 관련된 시가 4회 출전한다. 『관산록』에서 변대손은 갑자년 (1504년) 진사라고 기재돼 있다.] 다음은 영천의 만사시다
만년에 교분을 맺었지만 오히려 허물없이 친했네 / 晩交猶莫逆
적막한 데다 하물며 천애하게 되었구려 / 寂寞況天涯
맑은 가을이 끝날 때는 사찰을 찾았고 / 尋寺淸秋後
달 저문 때는 강에서 놀았지 / 遊江落月時
부질없이 쌍옥의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가 / 空餘雙玉美
다시 외로운 난새가 되어 슬프구려 / 復有隻鸞悲
때때로 대하였던 동촌(東村)의 노인 / 時對東村老
그대를 그리워하며 줄줄 눈물 흘린다네 / 思君淚幾垂”
*천애(天涯) : 하늘 끝. 먼 변방 아득히 멀리 떨어진 타향이 아니라 이승에 살아있는 핏줄이나 부모가 없음을 이르는 말. 영천에게는 이제 변여경-변대손-이 세상에 없어 그만큼 쓸쓸하게 되었다는 뜻.
변국량(卞國良) : 온(溫)의 현손. 진사이다.
변이보(卞爾寶) : 국간(國幹)의 현손. 박학(博學)하여 능한 문장에 도달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항상 비분강개하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방(帶方 : 남원)의 교비(校婢 : 다리의 비석)에서 강희[康熙 : 청나라 성조聖朝의 연호]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곧 글자를 쪼아서 지워버렸다.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무과(武科)
변효충(卞孝忠) : 온(溫)의 아들.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 추증.
변국간(卞國幹) : 희손(喜孫)의 아들. 명조 조에 붓을 던져버리고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로서 기질이 있어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칠도병사(七都兵使)를 지냈으며 세상을 마치자 예장(禮葬)을 했다.
변국경(邊國經) : 국간(國幹)의 아우.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이다.
변손심(卞孫璕) : 효인(孝仁)의 아들. 훈련원 주부(主簿)이다.
변공의(卞公懿) : 손심(孫璕))의 손자. 훈련원 판관(判官 : 종 5품)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다.
변상홍(卞尙弘) : 공의(公懿)의 아들. 벼슬은 부장(部長 : 종 6품)이다.
변경남(卞京南) : 국형(國衡)의 손자.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다.
변홍달(卞弘達) : 국간(國幹)의 아들. 국간이 호인(胡人 : 만주인)에게 포위되었을 때 홍달이 깊숙이 들어가 혈전을 벌여 크게 이겨 조정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과거시험을 허락받았다.[하삼도(下三道)에 양인(良人), 서얼(庶孼), 공사천(公私賤)이라도 왜적의 수급을 베어오면 과거를 허락하는 제도가 있었다.] 임진년에 장사로 뽑혀 많은 왜노(倭奴)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왜구가 두려워하는 조목(條目)이 되어 ‘흑면장군(黑面將軍)’이 되었다. [흑면장군 : 얼굴에 손바닥 만한 큰 점이 있으면서 강건한 사람에게 붙이는 애칭이다.]
변덕일(卞德駐) : 홍달(弘達)의 아들. 아버지의 기풍[氣質]이 있었다. ‘충의편’에 출전한다.
변덕장(卞德章) : 국간(國幹)의 손자. 수문장(守門將)으로 선무훈[宣武勳 : 선조 37년(1604년)에 내린 임진왜란 때 공훈이 있는 공신에게 내린 공훈]과 진무훈[振武勳 : 인조 2년(1624년에 내린 이괄의 난에 공훈이 있는 공신에게 내리는 공훈]에 녹훈되었다.
변복창(卞復昌) : 국경(國經)의 손자이다.
변이뢰(卞爾賚) : 국간(國幹)의 현손.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다.
남행(南行)
변희손(卞喜孫) : 효충(孝忠)의 아들.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변국형(卞國衡) : 길손(吉孫)의 아들. 벼슬이 선전관(宣傳官)이다.
변건손(卞建孫) : 온(溫)의 손자. 참봉이다.
변성남(卞星南) : 국형(國衡)의 손자. 벼슬이 참봉이다.
변화(卞和) : 벼슬이 참봉이다.
충의(忠義)
변덕일(卞德馹) : 홍건(弘建)의 아들이다. 광해군 무오년(戊午年 : 1618년) 에 장사(將士)로 종군하여 요동백[遼東伯 : 김응하(金應河)]과 함께 대수(大樹 : 큰 나무)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 『연산군실록』에 의하면, 1616년 만주의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그해 명나라가 후금을 치려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1619년 2월 도원수 강홍립, 좌영장 김응하(金應河) 등에게 병사 13,000명을 주어 명나라의 원군으로 보냈다. 이때 사르후 전투에서 김응하가 전사했다. 이에 1620년 명나라 신종황제가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 : 요동의 태수)로 봉하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했다. 그러므로 변덕일이 요동백과 함께 전사한 때는 광해군 때가 아닌 연산군때이므로 광해군 때 전사는 오기로 보인다. 또 여기서 말한 대수(大樹)는 지명이 아니고 버드나무를 등지고 단신으로 싸우다 창에 맞아 장렬히 전서하였다고 하니, 대수는 버드나무를 말한다.
효자(孝子)
변삼계(卞三戒) : 나이 17세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공급하여 소생시켰다. 그의 형님이 병을 치료하다가 죽자, 집안사람들은 병을 피해 나가게 하고 혼자 들어 와 장례를 치르다가 이로 인해 병이 전염되어 결혼도 못하고 죽었다.
우애(友愛)
변홍적(卞弘迪) : 국간(國幹)의 아들. 정유재란 때 홍달·홍적·홍건 3형제가 참전했다. 형 홍달(弘達)이 적에게 포위되자, 홍적이 동생 홍건(弘建)에게 말하기를, “형이 이미 죽음에 이르렀는데, 동생이 어찌 홀로 살아남겠는가?” 하며 칼을 뽑아들고 곧바로 적들에게 쳐들어가 형을 껴안고 죽기를 다투어 청하자, 적들이 놀라 감탄하며 풀어 보내 주었다. 그런데 한 왜적이 말하길, “이 사람의 용력은 남들보다 넘치는 흑면장군이다” 하면서 후환이 남을까 봐 모두 살해하니 세 사람이 서로 껴안고 죽었다.
2. 『장흥군지』와 초계변씨
『장흥군지』(1990) ‘인물’편에도 초계변씨들이 다수 등재돼 있어, 과거 안양면 동촌리에서 초게변시 위상을 기늠케 해준다.
사마(司馬)
변온(卞溫) : 초계인. 진사다.
변효인(卞孝仁) : 초계인. 온의 자로 생원이다.
변대손(卞大孫) : 초계인. 온의 손(孫)이다.
변국량(卞國良) : 초계인. 진사 대손의 자요, 진사다.
무과(武科)
변효충(卞孝忠) : 초계인. 온(溫)의 자. 첨사다. 증 병조참의(兵曹參議).
변국간(卞國幹) : 초계인. 희손(喜孫)의 자. 명조조에 등과, 7도병사 역임하고 예장(禮葬).
변국경(卞國經) : 초계인. 국간(國幹)국간의 자. 첨사(僉使).
변손심(卞孫璕) : 초계인. 효인(孝仁)의 자. 훈련주부(訓鍊主簿).
변공의(卞公懿) : 초계인. 손심(孫璕)의 손자. 훈련판관(訓鍊判官). 록원종공훈(錄從功勳).
변상홍(卞尙弘) : 초계인. 공의(公懿)의 자. 부장(部長).
변경남(卞京南) : 초계인. 국형(國衡)의 손자. 벼슬은 수문장(守門將).
변홍달(卞弘達) : 초계인. 국간(國幹)의 자. 부친이 호인(胡人)에게 포위되었을 때 혈전으로 돌입하여 크게 이겨, 조정으로부터 과거를 허락받음.
변덕일(卞德駐) : 초계인. 홍달(弘達)의 자. 아버지의 기풍[氣質]이 있었음.
변덕장(卞德章) : 초계인. 국간(國幹)의 손자. 수문장(守門將). 록선무진무훈(錄宣武振武勳).
변복창(卞復昌) : 초계인. 국경(國經)의 손자.
변이뢰(卞爾賚) : 초계인. 국간(國幹)의 현손. 수문장(守門將).
남행(南行)
변희손(卞喜孫) : 초계인. 효충(孝忠)의 자. 참봉.
변국형(卞國衡) : 초계인. 길손(吉孫)의 자. 선전관(宣傳官).
변건손(卞建孫) : 초계인. 온(溫)의 손자. 참봉.
변성남(卞星南) : 초계인. 국형(國衡)의 손자. 참봉.
변화(卞和) : 참봉이다.
절의(節義)
변공의(卞公毅) : 초계인. 자 야무(若武). 옥포전(玉浦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변연수(卞延壽) : 초계인. 자 경심(景深). 호 월계(月溪). 통정(通政). 명량해전 사(死).
변홍주(卞弘州) : 초계인. 호 송천(松川). 남해 운대 전사.
변홍달(卞弘達) : 초계인. 자 경민(景敏). 증 북병사(北兵使). 당포해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변홍적(卞弘迪) : 초계인. 자 경명(景明). 봉사(奉事). 정유란(丁酉亂).
변홍선(卞弘選) : 초계인. 자 경열景說). 사복시정(司僕寺正). 회령전 참전, 정유재란 전사.
변홍량(卞弘亮) : 초계인. 자 향명(享明). 증 병조참판. 금산사(錦山祠 宇)산은산금산사 팜판 변립(卞笠) : 초계인. 정(定)숙(肅). 좌승지(左承旨). 당포해전사.
변덕황(卞德璜) : 초계인. 증 통훈(通訓). 노량해전 참전.
변덕장(卞德章) : 초계인. 자 여문(汝文).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
변덕일(卞德馹) : 초계인. 자 이원(而遠). 심하전사(深河戰死).
변국간(卞國幹) : 초계인. 자 위경(偉卿). 수사(水使). 여수 진남관 내 선정비(善政碑) 세워짐.
3. 『호남절의록』과 초계변씨 3인
『호남절의록』에는 초계변씨로 변홍달(卞弘達), 변홍원, 변공의 3인이 등재되었다.
다음은 이들 3인에 대한 『호남절의록』의 소개 내용이다.
변홍달(卞弘達)
자(字)는 경민(景敏). 본관은 초계(草溪). 참판(參判) 효경(孝敬)의 후손이고 병사(兵使) 국간(國幹)의 아들이다. 임진란 때 군사를 이끌고 적(賊)의 선봉을 추격하여 모두 무찔러 죽였다. 왜적들이 놀라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길 “흑면장군(黑面將軍)을 피하라.”고 하였다. 팔장사(八壯士)에 뽑혔는데 관군(官軍)의 선봉이 되어 이르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특별히 부사(府使)를 제수 받았고, 병사(兵使)로 승진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주: 아들 덕일(德馹)은 요동백(遼東伯)의 편장(褊將)이 되어 심하(深河)에서 함께 죽었다. 동생 홍적(弘迪)·홍선(弘選)은 정유란(1597) 때 공(公)과 함께 적에게 포위되었으나 적들을 무수히 죽였다. 적이 말하기를 “이 어찌 흑면장군(黑面將軍)의 형제가 아닌가.”하고 마침내 그들을 죽였다. 아들 덕장(德章)·무장(武章)·무용(武勇)은 임진란 때 많은 군공을 세워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장흥(長興)]
(요동백에 부름에 장흥 출신으로 변홍달과 함께 참전한 사람으로 노홍(魯鴻)도 있었다.
변홍원(卞弘源)
자(字)는 경원(景源). 본관은 초계(草溪). 이조참판(吏曹參判) 효경(孝敬)의 후손이고 수사(水使) 국형(國衡)의 아들이다. 정유란(1597) 때 고을 사람 정명렬(丁鳴說)·마하수(馬河秀)·김성원(金成遠) 등 수십여 명과 함께 배를 모아서 명량(鳴梁)전투에 나아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후원하였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 받았다. [장흥(長興)]
-©『호남절의록』권2하/임진의적/일도거의제공사실/187쪽.
변공의(卞公毅)
자(字)는 약무(若武). 본관은 초계(草溪). 한성판윤(漢城判尹) 남룡(南龍)의
후손이고 사정(司正) 종영(宗英)의 아들이다.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훈련판관(訓鍊判官)을 지냈다. 계의병장(繼義兵將 : 최경장)을 따라 임진란 때 승첩을 이룬 공이 많았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장흥(長興)]
©『호남절의록』 권1하/임진의적/최경장동창제공사실/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