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호 사설 - 조선 최초 의병장은 기산리 백세례 부장(部將)이었다
제230호 사설 - 조선 최초 의병장은 기산리 백세례 부장(部將)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24.08.2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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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공(部將公) 백세례 의병장 조명, 현창 운동 필요하다

을묘왜변은(乙卯倭變)은 1555년(명종 10) 5월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이다. 이때 왜구는 선박 70여 척으로 일시에 전라도 남해안으로 침입하였다. 그들은 이어 달량포(達梁浦 : 해남 북평면 남창리 일대)로 계속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으며 이어 어란진(於蘭鎭 : 해남 송지면 어란리 수군지)을 비롯, 장흥·영암·강진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 왜구를 토벌하였던 전라병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당시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긴박하게 번져가자 비로소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왜구를 섬멸할 수 있었다.

『호남절의록』에 을묘왜변과 관련, 의사(義士)로 등재된 이는 당시 영암 출신으로 해남 현감이었던 양사달(梁達泗)과 장흥 출신의 백세례(白世禮) 등 2인 뿐이었다.

백세례의 등재 내용을 보자.

“백세례(白世禮) : 자(字)는 화중(和仲). 본관은 수원(水原). 참판(參判) 회(繪)의 증손이며 참봉(參奉) 문기(文麒)의 아들이다. 힘이 세었으며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 벼슬을 받았다. 1555년(명종 12)에 고을 원님(장흥 부사) 한온(韓蘊)과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사를 이끌고 달량(逹梁)의 싸움에 나섰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칼도 부러져 마침내 적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장흥(長興)]”(ⓒ『호남절의록』/권5 하/부록/을묘년사실/441쪽)

백세례 부장에 대한 행적은 지난 2012년 4월에 안양면 동계마을 입구에 세워진 ‘순국열사(殉國㤠士) 부장공(部將公) 백세례(百世禮) 충열비(忠熱碑)’에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 …1555년(명종 10년에 수십 척의 왜적선이 남해안의 여러 고을로 쳐들어오니 관군이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역부족이어서 참패하였고, 해남 남창은 적의 소굴이 되었다. 이때 전라 병사(兵使) 원적(元績)이 “사태가 급하다 백부장이 아니면 남녘 백성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장흥부에 알려왔다. 그리하여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공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공은 급히 장흥부로 들어가 왜적의 정찰 행로를 끊고 적의 대세를 꺾기 위해 정예병 백여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미 광주목사 이모는 패하였고, 강진 현감은 홍모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고, 영암군수 이모는 도망쳤고, 전라병사 원모는 옷을 벗고 항복하였다.

… 공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홀연히 나아가 맨손으로 왜적 수백 명을 때려눕히니 적들이 감히 다시 나서지 못하였다. 공은 밤에 자지도 않고 병사들과 백성들을 위로하였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에 또 왜적이 북을 치며 전투를 재촉하므로 또 다시 나아가 용감히 싸웠다. 이때 장흥부사 한온은 왜적의 창에 맞아 낙마하여 순절하였다. 공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전진하다 화살에 맞았지만, 맞은 화살을 뽑아 적진에 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대파하니 마침내 왜적들은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그런데 아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승전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그날 밤 공은 낮에 맞은 화살독이 몸에 퍼져 끝내 돌아가시니 5월 13일이었다.…”

이상 2건의 기사 중에서 첫 번째 『호남절의록』에서 잘못된 기록이 있다.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백세례 공은 무예 연마에 열중하기는 하였지만, 무과 급제자는 아니었다. 묘막에서 시묘하면서도 육도삼략(六韜三略)을 독송하여 진법(陣法)을 깨쳤고 그런 이유 등으로 “목사와 감사가 공을 장군의 재질이 있다고 하여 지역의 장군벼슬인 부장(部將)으로 천거하니 이를 기꺼이 받았다. 牧伯多以將材薦授部將然非公意也”는 내용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의 행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봉흠(白奉欽,1859∽1909)이 쓴 『수원백씨삼세삼강록(水原白氏三世三剛錄)』의 ‘부장공충렬사실(部將公忠烈事實)’이나 ‘부장공묘갈명(部將公墓碣銘)’에서도 확인인 된다.

백세례의 직위는 지역의 장군, 장수라고 할 수 있는 부장(部將)으로 명예 직위이였다. 관료로서 직책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직위만 명예직 부장(部將)이었으므로 백세례는 실제로 관료가 아닌 양민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을묘왜변 당시 왜구와 전투에 참전하였거나 토벌했던 주역들은 한결같이 현감, 군수, 부사, 전라병사, 도순찰사, 방어사 등 관료들이었다. 또 수많은 병사와 여러 관료들도 순절했지만, 양민으로 의병장이 되어 순절한 이는 오직 백세례뿐이었다. 그러므로 백세례는 을묘왜변 때 왜구 토벌 중 순절했던 조선 조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것이다.

기산리의 수원백씨 내력을 보면, 백장(白莊)의 동생 백회[白薈(繪)]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내고 장흥으로 남하해 장흥 기산리에서 정신재공파 집성촌의 터를 잡으면서 장흥 수원백씨 가문이 일취월장 성세하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회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진사 백맹춘(白孟春)과 현감 백맹하(白孟夏)였다. 백맹춘 아들로 진사였던 백문기(白文麒) 대에서 백세인(白世仁)·백세의(白世義)·백세례(白世禮) 3형제로 이어졌다. 여기서 첫째 백세인에서 백광홍·백광안·백광훈 3형제가 셋째 백세례에서 백광성(白光城) 등 5형제(백광성. 백광위白光衛, 백광정白光庭, 백광희白光熙, 백광문白光門)로 이어진다.

(백회의 또 다른 아들 백맹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정해군貞海君 백수장白壽張이다. 백수장은 동촌에서 세거하여 동촌의 많은 백씨 인물군이 배출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의병장 백세례는 백광홍(백광훈)의 작은 아버지요, 백광성은 사촌 아우가 된다.

그러므로 백맹춘·백문기 가문에서 실로 빛나는 문무(文武) 가문이. 즉 조선조 최초의 의병장 가문이요 당대의 대시인의 가문으로 빛나는 문무가(文武家)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 기산리는 흔히 수원백씨 중심의 팔문장(八文章)을 배출한 문림촌(文林村)이요, 동촌마을은 초계변씨 중심의 팔장사(八壯士)를 배출한 무인촌(武人村)이라고 불렸지만, 기실 동촌마을 동촌 입향조 백수장이 무인이었으며, 팔장사 중에서도 2인이 바로 백수장 후예로 수원백씨 2인이 포함돼 있었다. 즉 벼슬이 선전관이었던 백홍룡(白弘龍), 만호 출신이었던 백봉기(白鳳紀)가 바로 동촌 팔장사에 속했었다.

어쨌든, 임진란·정유란 발발할 당시에도 안양향의 기산마을은 장흥의 대표적인 문무(文武)의 대표적인 고을로서 특히 조선조에 최초의 의병장을 배출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왜 백세례 부장의 의병장으로서 업적이나 위상 등이 조명받지 못했을까. 이점에 대해서 ‘부장공(部將公) 백세례(百世禮) 충열비(忠熱碑)’에서도 “ … 공은 이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순국했으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의 국난이 겹쳐 그 공을 제대로 현창하지 못했던 일이 심히 아쉽다.”고 지적하였다.

일단 역사 속에 묻혔기에 좀처럼, 쉽게 다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백세례 부장공에 대한 업적이며 그 절의(節義) 정신이 조명되어야 마땅하다. 더불어 부장공에 대한 현창 사업도 새롭게 추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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