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시인 , 본지 편집인
<지난호에 이어서>
동촌 입향조가 된 변온으로부터 불과 40여년 후인 16세 대부터 초계변씨가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변온 이후 14세는 첨사 변효충(卞孝忠)이고 15세는 의부도사 변희손(卞喜孫)이다.
변희손은 효도와 청렴으로 남행(南行)에 의하여 천거된 참봉이었다. (후에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변희손은 16세인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들이 변국형(卞國衡)·변국간(卞國幹)·변국경(卞國經)이다.
이 3형제의 아들(17세), 손자(18세)들이 바로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창의하거나 의병으로 참여하여 대분분이 순절하는 ‘충절(忠節)·절의(節義)’의 정신을 실현하며 장흥의 초계변씨 위명을 세상에 널리 알렸던 것이다.
이들 초계변씨 의사 13인 중 대표적인 의인의 한 사람이 변희손의 둘째인 변국간이다. 물론 변국간은 임진란 직전 해인 1591년에 타계, 임진란‧정유란과는 상관이 없지만, 생전에 일군 업적과 성취가 빼어나, 안양방 동촌의 대표적인 변씨라고 할만하였다. 초계변씨 역시 어느 성씨 못지않게 가학(家學)‧가풍(家風)이 제대로 정립돼 있었고, 그러한 가문의 전통 정신의 전승이 12인 의인을 낳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3남 중 첫째인 변국형(卞國衡)은 남행으로 선전관을 역임했다.
둘째인 변국간(卞國幹)은 명종 조에 붓을 던져버리고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로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칠도병사(七道兵使)를 지냈다.
셋째인 변국경(卞國經)은 첨절제사(僉節制使)을 지냈다.
변국간 『조선왕조실록』 등 史書 등재
이들 3형제 중 가장 현달한 이가 바로 변국간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주요 사서(史書)에 나오는 변국간의 행적에서도 확인이 된다.
∎대신 등이 무사 79인을 아뢰고 우선 7명을 초계하다
대신(大臣)‧비변사‧병조(兵曹)가 쓸 만한 무신(武臣)으로 조수흥(趙守興) 등 79인을 같이 의논해 아뢰고, 또 쓸 만한 무신 중에서 차서에 의하지 않고 발탁하여 쓸 만한 자로 정세필(鄭世弼)‧남언순(南彦純)‧변국간(卞國幹)‧유태수(柳台壽)‧오운(吳沄)‧변양좌(邊良佐)‧장의현(張義賢) 등 7인을 초계(抄啓)하였다.[1573년, 변국간의 나이 47세 때 ‘국가간성 7인’에 선발되었음을 의미한다.] ○大臣、備邊司、兵曹同議, 武臣趙守興等七十九人可用。 又於可用武臣中, 不次擢用者, 鄭世弼、南彦純、卞國斡、柳台壽、吳沄、邊良、張義賢七人抄啓
ⓒ『선조실록』7권/선조 6년 계유(1573) 6월 17일(을축), 2번째 기사.
∎사헌부가 전라 병사 변국간의 집이 진(鎭)과 가깝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라 병사 변국간(卞國幹)은 본집이 장흥(長興)에 있어서 진(鎭)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체직하소서. 최원은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체직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최원은 꼭 파직하고 추고할 것 없다.” 하였다.[변국간은 1580년 전라병사가 되어 강진 병영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司憲府啓: "全羅兵使卞國斡, 家在長興, 距鎭只一息, 請遞。 崔遠先罷後推。" 答曰: "遞事如啓。 崔遠, 不須罷推。"
ⓒ『선조실록』 14권/선조 13년(1580) 9월 19일 병술 2번째 기사.
∎박숭원·김우옹·변국간·정개청·금응협·신응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숭원(朴崇元)을 좌승지로, 김우옹(金宇顒)을 안동 부사로, 변국간(卞國幹)을 충청도 수사로 삼았다. 정개청(鄭介淸)을 곡성 현감(谷城縣監)으로, 금응협(琴應夾)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신응구(申應榘)를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삼았는데, 이 세 사람은 학식과 행실을 구비했다 하여 천거되었고 초서(超敍)하라는 명이 있었다. ○己卯/有都目政。 【吏曹判書李山海, 參判權克禮, 參議丁允福, 吏曹欲用越祿人。 上曰: "越祿者除授, 苟且未穩。"】 以朴崇元爲左承旨, 金宇顒爲安東府使, 卞國幹爲忠淸道水使, 鄭介淸爲谷城, 琴應夾爲河陽, 申應榘爲稷山, 三人以學行俱備薦之, 有招敍之命。
ⓒ『선조실록』 21권/선조 20년 12월 25일 기묘 1번째 기사.
∎봄 2월. 함경도의 번호(藩胡) 니탕개(尼湯介)가 경원(慶源)에 대거 침입하여 경원부사 김수(金鐩)가 죽다. …북병사(北兵使) 변국간(卞國幹)은 여러 차례 전투하였으나 불리했고 (끝내 섬멸),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 립(申砬)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級)의 목을 베자 적병들은 퇴각하여 달아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신립은 니탕개를 유인하여 생포하고, 서예원(徐禮元)은 율보리 등을 유인하여 생포했는데 다 목베다. 서예원은 반드시 변방의 수장이었을 것이나 자세히 알수 없다. 春二月。咸慶道藩胡尼湯介。大擧入寇。慶源府使金鐩死之。…北兵使卞國幹。累戰不利。穩城府使申砬。引兵督戰。斬數百級。賊兵退遁。未幾申砬。誘捕尼湯介。徐禮元。誘捕栗甫里等。並斬之。 徐禮元。必是其邊守將而未詳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계미년 만력 11년, 선조 16년(1583년).
∎【19일】 어제 저녁에 노(奴) 천리(千里)가 종성(鍾城)에서 돌아왔다. 진술하는 말이 종성의 옛 친구들이 천리를 보고 모두 놀라고 기뻐 울었고, 부사 변국간(卞國幹)은 매월 곡식 한 섬씩을 주었으며, 길주 목사(吉州牧使) 박인수(朴麟壽)는 베 한 필을 주었고, 경원 부사(慶源府使)도 양곡을 넉넉하게 주었다고 한다. 十九日。昨夕。奴千里還自鍾城。具陳鍾城故舊見千里。莫不驚喜而泣。府使卞國幹每月給粟一石。吉收朴麟壽給布一匹。慶源府使亦優給糧穀云。
ⓒ『미암집』 제13권/일기(日記) 축약함/병자년(1576) 만력(萬曆) 4년 선조대왕 9년.
∎붓을 던지고 야만의 오랑캐를 이기는 유능한 장수로서 재능을 보였다. 칠도의 병사(兵使)를 역임하다. 아들로 홍달, 홍적, 홍선이 있는데 모두 의롭게 순사하였다. (선정善政)을 칭찬하는 글의 비(선정비)가 세워졌다. 卞國幹。 投筆, 有將才, 捷野胡。 歷七道兵使。 子弘達、弘迪、弘選、孫德馹, 皆死義。 有御筆褒贈。
ⓒ『여지도서』 全羅道/장흥부/인물/본조.
이처럼 변국간의 당대 행적은 『선조실록』, 『난중잡록』, 『미암집』 등에 출전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였다. 변국간의 행적을 보다 확실히 해준 경우는 ‘변국건의 선정비’에서이다.
여수 진남관에 善政碑도 세워지다
‘수사 변국간 선정비(水使 卞國幹 善政碑)’ 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이 선정비는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 진남관 경내에 있다. 창건연도는 1588년, 사액연도는 1935년이다.
이 선정비는 변국간이 전라좌수사(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직(1586∽1587)한 이후 1588년 충청수사로 임명을 받아 떠난 이후 변국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588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선정비는 여수 지역에 남아 있는 임진왜란 이전에 세운 유일한 선정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도 있다.
비석 앞면 중앙에 ‘수사 변공국간 선정비(水使卞公國幹善政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만력십육년유월일(萬曆十六年六月日)’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1588년 6월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석은 단순하게 장식된 지붕돌을 갖춘 형태여서 심하게 마모된 상태인데,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여수 진남관(鎭南館,국보 제304호) 경내에 다른 비석 14기와 함께 비석군(群)을 이루고 있다.
이 선정비의 국역문을 보자.[「초계변씨대종회」(뿌리탐구/유물 및 유적/변국간신정비)(https://www.chogyebyun.com/)]
변국간 행장-善政碑-
-신정희(申正熙) 찬(撰)
[『여수시 주요비석탁본기행』[여수시문화원, 2004)/디지털여수문화대전/변국간]
공의 휘는 국간이며 자는 위경 변씨이며 본관는 초계이다.
시조는 변정실이며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팔계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열이다.
변빈은 정몽주 선생과 성리지학을 강의하며 토론했으며 세상에 추천된 바처럼 충망을 받았다.
변남룡은 호가 정암이며 고려시대 문과로 합격하여 관은 한림원 문하시랑에 이르렀고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이 한성판윤을 제수했으나 고사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는데 국간의 칠대조이다.
변효경은 문과에 합격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고조는 변옥이며 충순위였고 증조는 변온이었으며 동복현감을 역임했다. 조부는 효충으로 첨사를 역임했으며 졸후 참의에 제수되었고 아버지는 희손으로 도사를 역임하고 졸후 참의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공산이씨로 판서 자번의 딸이며 숙덕이 있었다.
변국간은 가정 정해년(1527년)에 장흥군 안양면 동촌에서 태어났다.
공의 자태는 체격이 장대하고 훌륭했다. 타고난 기질은 강직하고 밝았으며 경서와 역사책을 읽어 두루 통했다. 부모님을 섬기는 데는 뜻과 몸을 동시에 돌보았으며, 가정을 다스리는 데는 내외가 모두 화목하였으며, 사람들을 접함에 있어서는 겉과 속이 진실했고, 만사를 대함에 있어서는 그릇됨과 바름을 바르게 판명하여 여러 벗들이 모두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일찍이 삼략을 읽고 말하길, “남자가 세상에 남에 평시를 만나면 글로써 임금을 보필함이 있어야 하고 난세를 만나면 무기를 가지고 준비함으로써 어지러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으로 이치에 맞다. 그런데 어찌 서생으로 산림에서 평생을 늙겠는가?”고 하였다.
명종 조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북병사로 있을 때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여러 번 침입하였다. 공과 그의 아들 변홍달이 적을 막아 크게 승리하여 매번 공을 세웠다. 변방에서 큰 공을 세워 칠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추사비가 세워졌다.
선조조에 전라 병사가 되었으며 임소에서 졸하였는데 육십오 세였다.
부고를 듣고 임금이 장례 용품을 내리고 장흥 안양면 이산(梨山) 묘원에 예장하였다.
(임금이) 전하기를 “장례한 이산 일양토는 나의 충신 변국간의 사패지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길 “이산 일면을 공에게 할양하라. 변공의 빛나고 빛나는 마음은 보배롭게 기록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공의 부인은 숙부인 익산소씨 소경의 딸이며 계비는 영월 엄씨 참봉 엄약동의 딸이다.
부녀자의 규범을 갖추고 있었다.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변홍건, 변홍달, 변홍적, 변홍선이며 홍건의 아들은 변덕일이다. 그 외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의 조리와 행실 문장이 번거롭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데 이는 공이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섬김에 지금 나라 사람들이 흠앙하는 바와 같으니, 역사에 기록되어 민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이 당시 교유했던 사람은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해은(海隱) 문영개(文英凱)와 김성원(金聲遠)등이었다.
아울러 시와 만장이 있었고 공이 남긴 문집에는 의로운 행적들이 기록되었는데 육정신이 꺼려하여 남아있지 않음이 애석하다.
공의 후손 변균민이 가장을 안고서 나에게 불후문을 청하는데 나는 비록 글이 없으나 변국간을 흠모해 온 지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주제넘게 사양하지 못하고 찬하는데 차례는 오른쪽과 같다. 兵使公 行狀 : 公諱國幹字偉卿氏卞系出草溪始祖庭實高麗門下侍中封八溪君諡文烈再傳曰贇與鄭圃隱先生講論性理之學爲世所推重有曰南龍號靜庵麗朝登文科官翰林止門下侍郞入李朝太祖拜漢城判尹固辭罔僕於公七世也有諱孝敬文參判高祖諱玉官忠順衛曾祖諱溫同福縣監祖諱孝忠僉使贈參議考諱喜孫都事贈參議妃貞夫人公山李氏判書自蕃女有淑德嘉靖丁亥生公于長興郡安良面東村第公儀形魁偉性氣剛明讀經史無不通解事親也志體兩兼齊家也內外擁睦接人也表裏眞實應事也邪正明辨儕友多憚之嘗讀三略書曰男子於世遇平時則以文有黼黻王家而遭亂世則用武備以濟艱此其當行底事奚獨以書生終老于林下耶明廟朝登虎榜受北兵使時北虜數侵邊於公與子弘達禦敵大捷屢立邊功以勳歷歇七道兵馬節度使所莅有追思碑宣廟朝以全羅兵使終于任所行年六十五訃聞上賜庀葬制禮葬于長興安良面梨山枕卯原敎曰梨山一壤土葬我忠臣卞國幹賜牌曰梨山一面割與公卞公煌煌寶筆百世無墜配叔夫人益山蘇氏瓊女繼配寧越嚴氏參奉若東女俱有閨範育四男曰弘建弘達弘迪弘選長房男德章次房男德馹與不盡錄嗚乎公之操履與文章無敢仰煩而至若忘身勤事尙今國人之所欽仰史筆之所不泯者也公之當時交游松湖白公振南海隱文公英凱金公聲遠也幷有詩挽公之遺文懿蹟中因六丁灰燼無餘惜矣及公之後孫均珉抱家狀以不朽文請余余雖無文景慕公久矣不敢辭冑越撰次如右. 申正熙 撰
강진 하멜기념관부지에
변국간 숭모비 세워져
한편, 한편, ‘전라병사변국간장군숭모비(全羅兵使卞國幹將軍 崇慕碑)’가 강진군 병영면 하멜기념관 부지 내에 설치돼 있다. 2012년 9월에 변국간장군숭모회에서 세운 이 숭모비에는 전면부에 변국간의 시(詩) ‘전라병영서 읊다’와 후면부에 변국간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전라병영에 부임하며 읊다 再臨全羅兵營吟 | 변국간
팔곤의 으뜸인 칠도 장수를 내리는 윤음인지라 / 七授綸音八閫藩
살아서 임금 은혜 보답할 계획이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워라 / 生慚無計報天恩
만세토록 태평하길 마음 깊이 비노니 / 太平萬歲中心祝
군사들과 이속들은 북 치고 피리 불며 기뻐 환호하네 / 軍吏懽欣鼓角喧
©『금곡지』, 변국간 시/‘초계변씨대종회’ 역
이 시는, 시인이 강진 병영에 있는 전라병영 병사(兵使)로 재임하며 읊은 시다.
병사로서 소임을 다하여 나라를 태평하게 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간절한 시인의 심사가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이 시로 우리는 변공이 충절의 용장(勇將)이요 덕장(德將)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숭모비 후면에는 공의 이력이 새겨졌다.
▶1527년 장흥 안양 동촌 출생 ▶명종조 무과 합격 ▶47세 1573년 국가간성 7인에 선발 ▶ 50세 1576년에는 종성부사 ▶52세 1578년에 경상우수사 ▶54세 1580년 전라병사 ▶57세 1583년 종성북병사 ▶58세 1586년 전라 병사 ▶60세 1586년 전라우수자 ▶62세 1588년 충청수사 ▶65세 1591년 12월 5일 전라우수사 재임 중 영중에서 별세”라고 기록돼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