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포에서 판옥선 12척을 수리, 개조하긴 했다. 그런데 이분은 『행록』에서 귀함(龜艦), 즉 거북선으로 개조했다고 적시했는데, 실제로 임란 때 그 위용을 과시했던 그 거북선으로 수선‧개조가 이루어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인원과 장비 부족, 시간 부족 등으로 이전의 거북선으로 개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행록』의 ‘거북선[귀함龜艦]으로 개조’ 운운은 후대의 가공, 또는 과장 기록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항복 ‘충민사기(忠愍祠記)’의 ‘전함(戰艦 : 판옥선)으로 장작(粧作)’, 즉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판옥선으로 개조했을 수 있고 또는 판옥선과 거북선의 절충형의 전함(戰艦)으로 개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이충무공이 병선 12척을 확보하였지만, 왜구와 전투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수군 전력의 전부라고 할 수 병선 12척을 보다 효율적인 전투용 판옥선으로 개조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옥선 수선에 장흥출신의 김세호[金世浩 : … 지략과 용기가 뛰어났다. 임진란 때 이충무공을 좇아 조선감造船監으로서 몸소 도끼질을 하여 큰 배 8척을 만들었다. 명량鳴梁 싸움에서 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주 : 아들 축軸은 군공으로 만호萬戶 벼슬을 받았다. (©『호남절의록』권3 상/임진의적/이순신동순제공사실/225쪽.]도 적극 참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절의록』의 김세호 행적에서, 그는 임란 때 큰 병선 8척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배의 수선‧개조에 경험이 많았다고 볼 수 있고, 특히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회령포에서 이충무공의 막하에 있었을 테고 그래서 당연히 판옥선 수선‧개조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판옥선 수선‧개조에 김세호 외에도 변홍주를 중심으로 한 초계변씨 의사들과 초계변씨가 대동해 온 300여 명의 장흥 의병들도 적극 판옥선 개조 적업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당시 판옥선의 수선‧개조 작업은 어디서 하였을까. 당연히 회령포진 선소(船所)에서 추진했을 것이다.
당시 회령포에는 선소가 존치돼 있었다.
조선시대 전국에 연안의 군사 중요지에는 많은 항만에 선소(船所)들이 설립됐다. 이 선소는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군선(軍船)의 건조·수리나 정박처로서 기능 외에도 수군 보급품을 보관·지급하는 공간이요 조운선(漕運船)·상선(商船)의 정박이나 점검·수리도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1457년(세조 3)이후 국방체제의 근간이 된 진관체제(鎭管體制)는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을 전후로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바꿔지면 진관체제에 예속되었던 종래의 수군은 행정구역과 관련 없이 연해 요해지에 해지에 설치된 수군진을 묶어 진관조직으로 편제되면서 전라도에는 수영이 좌·우로 분리되었고 이에 따라 전라 좌·우수영 관하에 수군진이 창설되고 더불어 관할 읍(부) 수군이 주둔도 하고 군선도 건조·수리도 하고 계류시킬 수 있는 장소와 공간으로 선소(船所)가 들어섰다. 이 시기에 전라좌수영 관할로 편입된 순천도호부·장흥도호부·보성군·낙안군·흥양현·광양현 등지에 선소가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장흥부에도 회령포와 해창 두 군데에 수군진과 선소가 설치되었다. 회령포진 선소는 현재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일대이고, 해창의 선소는 현재의 안양면 해창리 일대였다. 이 회령포만호진은 본래 1422년(세종 4) 장흥의 회령포(회천면 군학리 일대)에 설치되었다가 1425년(세종 7)에 주포(周浦 회진면 회령포)로 이전되어 이후 계속 만호진으로 운영되었다. 이 회령포진에 비로소 선소가 설치된 것이다. 이때의 선소는 병선(판옥선)도 건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선소였다.
“삼가 진으로 돌아가는 일을 아룁니다. … 본영에 소속된 수군은 다섯 고을로써 순천은 원래의 책임 수량과 더 만드는 수량을 아울러 전선 10척, 흥양이 10척, 보성이 8척, 광양이 4척 낙안의 3척 등은 벌써 다 만들었으나 … 謹啓爲還陣事。…屬舟師五官順天戰船十隻。興陽十隻。寶城八隻。光陽四隻。樂安三隻。已爲畢造。(『이충무공전서』권4, 장계3, 還陳狀)
상기 기록은 임진란 당시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는 읍에서 전선(판옥선)을 만들었다는 이충무공의 장계 내용이다.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읍은 순천도호부·보성군·낙안군·흥양현·광양현 등이었다.[임란 이후 전라좌수영 관할 소속이었던 장흥도호부는 1522년(중종 17)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잠시 전라우수영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즉 당시 좌·우수영 관할 읍에 소재한 선소에서 전선을 만들었다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곧 판옥선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이었다. 판옥선은 아무데서 만들있는 전선이 아니다. 전선을 건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이 갖추어진 선소에서만이 축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읍에는 이처럼 전선을 건조할 수 있는 선소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라우수영 관할 읍, 즉 장흥부 소속의 회령포·해창의 선소는 어땠을까. 당연히 회령포·해창 선소도 다른 데의 선소처럼 판옥선을 만들 수 있는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충무공이 해창의 군영구미를 거쳐 당도한 회령포에는 판옥선도 건조할 수 있는 선소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남문화관광재단은 장흥군과 공동으로 2019년 11월 27일부터 2020년 6월 14일까지 6개월 동안 장흥 회령진성(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44호) 구조 파악을 위한 학술 발굴조사(회진면 회진리 929번지 일원)를 했다. 1872년에 제작된 ‘회령포진지도(奎10443)’에는 남문·북문·동문이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성 안에 동헌(관청), 객사(관사), 장교청(상급직 집무실), 사령청(하급직 집무실), 군기고(무기 보관고), 성 밖의 선소, 군 정박지가 묘사돼있는데, 이때 발굴 조사로 선소를 비롯한 모든 시설물의 흔적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당시 회령포진에는 판옥선도 건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선소가 존치돼 있었고, 바로 이곳 선소를 중심으로 덕산리 부선소에서 배설 등으로부터 인수받은 판옥선(거의 난파직전이었을 판옥선) 12척을 수리, 정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부선소가 위치해 있었던 덕산 일대의 선소에 대한 그 위치가 『회진면지』에 나온다. “(회진면은)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회진면)에서 전함을 정비하고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확보하여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회진면지』(2007년) 61쪽. /(이순신은) … 8월 18일 회령포진에 당도하여 경상우수사 배설이 끌고 온 전함 12척을 점고하고 파손된 배들을 이곳 내덕도(來德島) 덕산(德山) 해안에서 정비하였다. ⓒ『회진면지』(2007년) 84쪽.”
당시 회령포에는 내덕도(內德島) 덕산(德山) 해안(현재 전남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땅재 끝)에 위치한 조선병창(造船兵蒼)이 있었다. 이 조선병창은 부선소였던 것이다. 이충무공이 회령포에 머문 기간은 8월 18일부터 8월 20일까지 고작 사흘간이었다. 기간이 짧아 판옥선 개조·수선이 미비했다면 어땠을까. 완벽주의자였던 이충무공의 성격에 의한다면, 이미 회령포에서 판옥선 개조작업이 추진되었기에 이진, 어란진에 도착해서도 병선 개조 작업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령포에서 병선 수선 자재며, 장비며 수선 작업자들이 모두 동원되어 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