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과 장흥 지포전투(6) - 변홍달, 초계변씨 12인 중 가장 현달(1)
정유재란과 장흥 지포전투(6) - 변홍달, 초계변씨 12인 중 가장 현달(1)
  • 김선욱
  • 승인 2024.10.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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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지난 호에 이어>

∎변홍달(卞弘達) : 자(字)는 경민(景敏). 본관은 초계(草溪). 참판(參判) 효경(孝敬)의 후손이고 병사(兵使) 국간(國幹)의 아들이다. 임진란 때 군사를 이끌고 적(賊)의 선봉을 추격하여 모두 무찔러 죽였다. 왜적들이 놀라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길 “흑면장군(黑面將軍)을 피하라.”고 하였다. 팔장사(八壯士)에 뽑혔는데 관군(官軍)의 선봉이 되어 이르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특별히 부사(府使)를 제수 받았고, 병사(兵使)로 승진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주 : 아들 덕일(德馹)은 요동백(遼東伯)의 편장(褊將)이 되어 심하(深河)에서 함께 죽었다. 동생 홍적(弘迪)·홍선(弘選)은 정유란(1597) 때 공(公)과 함께 적에게 포위되었으나 적들을 무수히 죽였다. 적이 말하기를 “이 어찌 흑면장군(黑面將軍)의 형제가 아닌가.”하고 마침내 그들을 죽였다. 아들 덕장(德章)·무장(武章)·무용(武勇)은 임진란 때 많은 군공을 세워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장흥(長興)] 卞弘達字景敏草溪人參判孝敬後兵使國幹子壬辰仗劍追賊逢輒鏖殺倭駭懼相戒避黑面將軍入八壯士之選爲官軍前鋒所向無前持除府使陞兵使錄宣武原從勳子德馹爲遼東伯褊將同死深河弟弘迪弘選丁酉與公爲賊所圍搏殺甚衆賊曰此豈非黑面將軍兄弟耶遂害之子德章武章武勇壬辰多有軍功俱錄宣武原從勳長興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절의록』권2 하/임진의적/일도거의제공사실/184쪽.

∎변홍달 : … 을묘년(乙卯年) 1555년에 태어났다. 얼굴 모양이 준엄하고 뛰어나게 총명하여 말 소리가 마치 북을 울리는 것처럼 우렁찼고 눈동자는 별처럼 번쩍거렸다. 지모(智謀)와 용략(勇略)에 있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경륜이 있었으므로 같은 연배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개(변홍달)은 실로 투사(鬪士)가 될 만한 재주가 있고 한 시골의 속(俗)된 무리가 아니다”하고 하면서 두려워하였으며 가볍게 사귀지 않았다.

나이 17세에, 그의 아버지가 북병사(北兵使)로 있을 때 부임지에서 부친을 모시고 따라갔다. 그때 북쪽의 오랑캐들(니탕개)이 크게 침입해 진영으로 뛰어들어 아버지가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홍달은 분연히 적의 진영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를 구출하고 말을 채찍질하면서 수많은 칼날 사이를 빠져나와 군막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맹세하고 독전하여 북의 오랑캐들이 패하며 달아나고 말아 변방 주위에는 적으로부터 가정이 없어졌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임금께서 공의 두 손을 쓰다듬고 칭찬하면서 “국가의 위급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 생령을 보호하고 우리 종사를 편안케 하였으니 실로 간성의 재목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했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향일규화(向日葵花 : 해바라기) 씨를 포상으로 하사하였다. (특별히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제수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아 바다의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와 어가는 서쪽으로 몽진(蒙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탄식하기를, “군부(君父)가 몽진하는 처지에 의(義)로써 어찌 좌시하고만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바로 창의(倡義)하여 형제들과 함께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로 나아갔다.

이공(이원익)이 공의 장략(壯略)을 듣고 전모(前茅 : 참모參謀)로 삼았다.

매양 권율(權慄) 원수(元帥)와 정세에 띠라 서로 의지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홍달은 더욱 분심(憤心) 용략(勇略)하여 즉시 관군(官軍)의 선봉이 되었으며, 이충무공 막하로 들어가 피를 마시고 맹세하며 말하기를, “왜적을 소탕함에 있어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돕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지포(芝捕 : 장흥 안양향 지천포)의 왜적을 막고 또 남포(南浦 : 장흥부 남면 남포)에 이르러 피나게 싸우며 돌진하다가 도리어 포위되며 군마와 병기를 모두 적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대세가 이같이 매우 위급해졌지만 홍달은 기운을 내어 창을 뽑아들고 말을 채찍질하여 힘껏 달려서 포위망을 빠져나온 후 적병을 크게 무찌르고 승세를 타 왜적을 모조리 죽였다. 이에 왜장이 크게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발하기를 “저이가 바로 바로 흑면비아(黑冕飛將)이다”라고 말했다.

(이후의 이어지는 기록에서, 이충무공이 당포(唐浦 : 당랑포)에 있었을 때, 홍달이 형제들과 함께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순절했다며 내용으로 이충무공 하의 당포전 순절 기록을 기록했는데, 홍달은 이충무공이 전사한 후 ‘가리포 첨사’ 자격으로 이충무공 사당 건립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어, 홍달은 당포전 전투와 순절 내용은 잘못된 기록으로 추정 되어, 이 관련 기록인 당포전 순절 운운의 기록은 생략한다.)

…홍달의 아들 변덕일(卞德馹)은 아버지 전사하게 된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통곡하며 이르기를 “만약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맹세코 홀로 살아남지 않을 것이다.”하고 맹세하였다. 또 노홍(魯鴻) 장군과 더불어 요동의 장관 김응하(金應河) 장군을 따랐다. 요동으로 떠나는 세 장수와 작별하면서 임금은 김응하, 노홍 장군과 변덕일에게 편지를 친히 써서 보냈다. 심하의 진영에 이르러 적군을 맞아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며 덕일은 김응하, 노홍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함께 전사허였다. 『호남절의록』과 「산서조경남록(山西趙慶男錄)」에 그 사적이 실려 있다.

ⓒ『李忠武公全書』(증보판)권16, 附錄 「同義錄」 ‘변홍달’조. 

변홍달은 힘이 쎄 일찍이 팔역사에 선발된 인물이었다.

또 1589년, 정유년 이듬해에 31세로 나이로 무과에 금제한 무인이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제들과 함께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이치전투, 서울 수복전투에 참전했으며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권율의 전봉장이 되어 활약했다. 이충무공이 투옥되었을 때 1597년 당시에는 권율의 중군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특히 이충무공이 한양의 감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하며 진주로 내려오던 중 많은 사람들이 충무공을 방문하고 만났는데, 그중 가장 많이 조우했던 사람들이 바로 초계변씨들이었다. 이것으로 당시 백의종군하며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충무공을 돕고 지원하기 위해 충무공 모친 쪽의 초계변씨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들 초계변씨 중에 장흥 출신의 초계변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변홍달(卞弘達)과 변덕(卞德章)이 그 주인공들이다.

특히 변홍달의 경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이던 1594년 4월에 충무공을 만나기도 해서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94년부터 당시 1597년에도 도원수 권율의 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변홍달은 이충무공이 수군통제사로 재신임을 받기 2개월 전에 3회에 걸쳐 백의종군 중이던 이충무공을 찾아가 권율의 군관 자격으로 만난 것이다. 이때 변홍달은 최초로 칠천량 해전 대패를 이충무공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3회를 만나는 중에 변홍달은 이충무공에게 임진란을 맞아 장흥 초계변씨들이 창의하여 권율 원수 휘하에서 참전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디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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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동백 김응하(金應河),15801619) : 자는 경희(景義). 철원 출신. 1604(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 김응하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광해군 11).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다.

2) 여기서는 변홍달의 생년도가 1555년으로 돼 있지만 변홍달의 과시 합격을 기록한 무과방목에는 기미년(1559)으로 돼 있다. 공은 나이 31세 때인 1589(선조 22)에 증광시(增廣試)를 치러 갑과(甲科) 2(2/28)의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기축 4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149]). 따라서 무과방목의 신뢰성이 높기 때문에 공의 생년도를 1999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일이다.

3) 이때의 니탕개의 난은 1583년에 일어난 난이었다. 이때 아버진 변국간을 배종한 홍달(1589년생)의 나이는 17세가 아니라 24세가 된다. ⓒ『초계변씨이조참판공파 선적지1992.

4) 이때의 난은 니탕개의 난(尼湯介 亂)’으로 불린다. 이 난은 1583년 조선 6진 회령 지방에서 야인여진의 니탕개가 일으킨 난이다. 이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직면한 최대 규모의 전란이었으며, 조선은 이 이후 문제로 거론된 여러 방위 체제를 재검토하여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해바라기(Helianthus 또는 sunflower)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한해살이풀로 국화과에 속하는 일 년생 식물. 꽃은 두상화(頭狀花)이다. 해바리기를 한자로 규곽(葵藿), 규화(葵花), 향일화(向日花)라고 한다.

6) 노홍(魯鴻 1561~1619) :호는 관암, 시호는 충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휘하에서 황진, 위대기와 함께 금산 이치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부정(副正)으로 활약해 선무원종이등공신에 녹훈됐다. 벼슬은 남도포만호, 임치진첨사, 훈련부정을 역임했다. 1604년 당포 앞바다에 출몰한 왜의 무장선단을 나포해 승전고를 울리고 선조로부터 당포앞바다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전남유형문화재 제25)를 하사받았다. 그는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명·후금 전쟁에 파병됐다가 1619년 만주의 부차전투에서 순국해 순충적덕보작공신에 올랐다. 나주 거평사에서 추모하고 있다.

7) 변종헌, 淸溪世槁吳駿善, 행장, 120.

8) 기축4월 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 日增廣龍虎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149]).

9) 난중일기1597,8.8 “저녁나절에 중군장(권율) 등이 와서 봤다.”

10) 619: 변덕기(卞德基), 변덕장(卞德章), 변경완(卞慶琬)변경남(卞敬男)이 와서 봤다. [丁酉]六月 十九日戊寅。…卞德基德章右營吏 卞慶琬老除吏 卞慶男 年十八 來見進士李日章 進士信吉子 亦來©李忠武公全書卷之八/亂中日記四/[丁酉]六月/1795.

11) 갑오년(1594) 44. 날씨가 흐리다. 원수군관(元帥軍官) 송홍득(宋弘得), 변홍달(卞弘達)이 새로 급제한 사람과 홍패(紅牌)를 가지고 오다. [甲午] 四月 初四日 壬子元帥軍官宋弘得卞弘達持新及第紅牌來©李忠武公全書卷之八/亂中日記四/[丁酉]四月/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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