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13-수수께끼의 성, 만리성(萬里城)
■역사산책13-수수께끼의 성, 만리성(萬里城)
  • 김선욱
  • 승인 2019.01.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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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

본지 논설위원. 장흥향토사연구회장.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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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았는지 알 수 없지만 “만리성(萬里城)” “고장성(古長城)” “마류성(馬留城)”“마류장성(馬留長城)” “고석성(古石城)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성이 장흥군 대덕읍과 강진군 대구면에 걸쳐 있다.

지금은 깊은 산 인적이 드믄 곳에서나 성의 형태를 찾을 수 있으나 장흥에서는 흔히 ‘만리성(萬里城)’ 또는 ‘고장성(古長城)’이라 불리는 성이다. 90년 전만해도 지금의 대덕읍사무소 뒤편으로 원형에 가까운 성의 형태가 남아 있었고, 지금의 대덕초등학교 담장도 성곽의 일부였다 전하니 그 규모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 큰 성이다.

이 성이 허물어지고 훼손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인 훼손도 있었겠지만, 근세에 이르러 더욱 훼손이 심해졌다는 전한다. 조국근대화라는 명분아래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보다는 한 톨의 쌀이 중요했던 시절, 덕촌간척사업장 등이 그 중요 원인이었다 하니 애석한 일이다. 무엇보다 선현들이 남긴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족함에 있었다. 이제라도 그 성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만이라도 살펴보고자 하지만 미약한 필자로서 이를 밝히지 못하고 지역사(地域史)에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밝혀보고자 하는 뜻에서 소개를 한다.

‘만리성’에 대한 문헌과 구전이나 설화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한 설화에 의하면, “옛날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고 의좋은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는 오누이는 어느 날 두 사람이 시합을 했다 한다. 누나는 하룻밤 사이에 한복을 한 벌 만드는 것이었고, 동생은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는 일로 누가 빨리 마치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드는 누나는 옷을 거의 만들어 동전만을 달지 않고 있으면서 동생이 성을 얼마나 쌓았는지를 알아보았다. 동생은 온갖 힘을 다하여 성을 쌓는데 자신보다는 늦게 마칠 것 같아 누나는 동생의 의기를 꺾을 수 없어 동생이 성을 모두 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전을 달아 옷을 마무리 지었다 한다.” 그러니까 누나가 일부러 동생의 사기를 위해 져주었다는 얘기다. 그 외 구전되는 얘기로는 “성벽에 제주(濟州)라고 새겨진 글자와 보성(寶城)이라고 새겨진 돌을 보았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그 외에 문헌기록으로 장흥에서 가장 오랜 기록으로 1747년에 간행된 장흥읍지(丁卯誌) 대흥방 고적조를 보면 “고장성(古長成)”이라 하여 “진목(眞木) 뒤에서 시작하여 평원을 가로 걸쳐 계치(戒峙)를 넘어 강진경계에 이른다. 석축면은 모두가 안쪽으로 향했다. 연대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웃 강진군에 전하는 기록으로는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은 성의 이름을 “마류장성(馬留長成)이라 하여 말이 머무는 긴 성이 있다”고 소개하였고, 다산 정약용선생의 외손자인 윤정기(尹珽崎, 1814∼1879)는 동환록(東寰錄,1859년刊)의 강역편 진도조에 “고석성(古石成), 옛 석성이 진도(珍島)에서 시작하여 강진군 대구면의 바닷가를 지나 장흥군 대흥면에 거치고 바다를 건너 흥양(興陽, 현 고흥군)의 바닷가까지 뻗치며 경상도 바닷가까지 연결된다. 지금도 성의 형태가 원만하게 남아 있으나 어느 때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 되어있다. 이상은 지방의 기록이다.

그리고 중앙기록으로 ‘고려사(高麗史)’ 문종 왕조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卷4) 에 보면 “문종 즉위년(1046년) 병부낭중(兵部郎中: 고려시대 병부에 소속된 무신의 관직) 김경(金瓊)을 파견하여 동해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연변에 성보농장(城堡農場)을 쌓았다.” 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구전과 기록물을 종합해 보았을 때 몇 가지 의문점을 낳게 하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구전설화에서 하룻밤 사이에 쌓았다는 건 굉장히 성을 빠르게 축조했다는 것이고,

둘째, 고려사에서 보이는 기록으로 보면, 성은 왜구의 칩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꽤나 길게 쌓았다고 볼 수 있으며,

셋째, 지방지 기록에는 축성 년대에 대한 기록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여 축성 년대가 상당히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은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성이라면 마땅히 바다 쪽을 향해 쌓아졌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내륙을 향해 쌓았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있는 축성 상태를 보면 대덕읍 쪽에서 성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계치(戒峙)로 기록하는 기잿재 부근에서 남쪽으로 약 300m정도를 오르면 관찰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 북쪽에 일곱단의 기단석을 볼 수 있다.

축성방법은 면장석으로 잘 다듬어져 엇물림으로 쌓았으며 35×7cm 정도의 돌들이다. 또한 성의 연장은 관찰봉에서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남호마을 성머리까지 약 16km에 달하고 대덕 쪽으로는 약 2km정도가 남아있다. 인가와 전답이 있는 곳은 훼손이 심하다. 역시 성이 남아있는 상태는 내륙 쪽인 북면을 향해 축성하였고, 바다 쪽인 남면을 잡석으로 쌓았기 때문에 이는 내륙 쪽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성임에 틀림없다.

만리성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축성을 할 만한 커다란 사건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고려 문종(1047∼1083) 이후 왜구의 침입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나 왜구들이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는데 왜 내륙을 향해 쌓았단 말인가? 또 왜구들이 들어 와 그들의 은신을 위해 쌓았다면 왜구 그들만의 힘으로 쉽게 이 긴 성을 축성하였겠느냐? 하는 의구심 때문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만리성의 축성은 우리 지방민의 힘으로 쌓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장 크게 공감해 볼 수 있는 이 지방의 사건으로 왜구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1270년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군(三別抄軍)을 이끌고 진도에 용장성(龍藏城)을 쌓아 이를 근거지로 삼고 육지를 공략한 사건을 볼 수 있다. 당시 지금의 강진인 탐진현(耽津縣)을 침략하였고, 심하게는 장흥의 장평면까지 침략하였으니 그 기세는 매우 컸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겨우 3∼4년만의 항거였음을 보면, 이 또한 축성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보다 앞선 기록을 돌이켜 볼 수 있다. 이는 청해진(淸海鎭)을 근거지로 남해안 일대를 장악했던 장보고(張保皐)대사의 활약이 상당히 주목된다.

장보고는 828년 4월 당나라 해적들이 서남해안에 나타나 우리나라 사람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당(唐)과 일본, 우리나라의 해상 무역을 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때 장보고는 신라 조정의 왕권다툼에도 관계하여 우징(祐徵:神武王)이 장보고에게로 피신해 와 보호를 받았다. 당시 우징(신무왕)과 장보고 사이에는 굳은 약조가 있었다. 우징의 아들(文聖王)에게 장보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아 줄 것을 확약한 것이다. 그러나 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고 난 다음 문성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드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의 반발로 받아드리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삼국사기(三國史記) 문성왕 8년(846년)조를 보면 “처음에 신무왕이 청해진에 의지해 있을 적에 장보고 장군에게 만일 원수를 갚게 된다면 마땅히 경의 딸로서 아들의 배필을 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그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간(諫)하여 반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는 이에 분개하여 당시 신라 조정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하로 있던 염장(閻長)으로부터 장보고는 살해당하게 되고, 장보고를 추종했던 장졸과 주민들은 전북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로 강제 이주 당하여 노역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장보고가 국내에서 활동한 시기가 828년부터 851년으로 23년간 이다.

이는 곧 장보고의 세력이 신라 조정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세력이었고, 왕권 다툼에서 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기 까지 많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이들이 생활할 장소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막강한 군사력이라 하지만 불시 침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분명 축성 방비를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다. 해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보고로서는 내륙의 침공을 방비하지면 육지부에

그들의 세력을 보호할 수 있는 성을 1차적으로 육지부에 구축하고, 2차적으로 해상전을 벌인 후, 제3단계로 청해진을 비롯한 섬에서 전쟁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만리성이 청해진을 방비하는 제1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하는 설화가 전한다.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장졸과 백성들이 거주했던 촌락으로 지금의 대덕읍 부곡산(富谷山; 御登山이라고도 한다) 동쪽의 신월리 초당마을과 ‘한국말산업고등학교’에서부터 도청리 도서마을 뒤뜰까지이다. 이곳 뜰의 이름이 “만가촌(萬家村)” 또는 “망가촌(亡家村)”으로 불리는데 전하는 바로는 만가(萬家)는 많은 가구가 있어 ‘만가촌’이라 했다하고, 망가(亡家)는 왜구의 침입으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마을이라 하여 ‘망가촌’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한 대덕읍 연지리 연동마을에는 왕비사당(王妃祠堂)이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이 전하는 기록과 설화 또한 만리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왕비사당에 대한 기록은 1747년에 기록한 장흥읍지(丁卯誌) 고적조로 “연지대 석상(蓮池臺 石像)” 이라는 기록으로 “연방죽 곁에는 연지각시라 불리는 상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오랑캐 왕비의 상이라 한다 (在蓮池堤傍 號燕支閣氏 諺傳爲胡奠閼氏像)”고 기록되어 있고, 후대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을 보면, “대덕 연동리에 있는 낡은 사당이다. 시대는 알 수 없어도 왜구의 침입으로 괴로움을 당한 남부지방의 민심을 살피려고 왕이 친히 이곳까지 행차하셨다. 연동마을 허씨 가문에 인물이 특출한 규수가 있어 후궁으로 맞았다. 왕은 서울로 환궁하고 규수는 그곳에 살다 그대로 수절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사당을 짓고 왕비사당이라 부르며 정월보름이면 그 넋을 위로하고 재를 지내며 풍년과 마을 복을 빌고 있다.” 전하고 “고려 때 연지라는 예쁜 처녀가 이곳에 살았다하여 연지태, 연지 또는 연지대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동’ ‘산동’ ‘오산마을’ 합하여 ‘연지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고려 때 허연지라는 처녀가 원(元)나라 임금의 후궁으로 뽑혔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죽으니 그 원혼을 풀어 주려고 대를 쌓은 그 위에다 처녀의 석상(石像)을 들여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데 매우영험하다” 하다는 구전이 전한다.

그런데다 우징(祐徵:神武王)이 장보고(張保皐)의 휘하에 있을 당시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이 아니라, 이곳 장흥 천관산에 머물러 기도했다는 기록이 ‘동문선(東文選)’과 ‘지제지사적(支提誌事跡)’에 “신라 신호왕(신무왕: 김우징)이 태자였을 때 마침 임금의 견책을 당하여 산의 남쪽 완도로 귀양 갔는데, 화엄 홍진대사(華嚴 洪震大師)와 태자와는 원래 좋은 사이라 동궁의 일이 급함을 듣고 달려가 이 절에 의지케 하면서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불렀다. 신중은 예에 감응하여 모든 신중이 부름에 응하니 절의 남쪽 봉우리에 나란히 늘어서니 지금의 신중암(神衆巖)이다.”라 전한다.

이로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완도 장좌리 일대는 수군 전진 기지로서의 근거지이고 장보고 휘하의 장졸과 백성들은 장좌리 일대의 한정적인 곳과 섬만이 아니라, 장흥의 천관산 남사면과 강진의 천태산 남사면에도 장보고의 휘하의 장졸과 백성들이 거주하면서 보다 안정한 삶을 위해 만리성을 쌓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장보고의 딸은 이미 우징(신무왕)과의 대면하였었고, 차기 왕비로 추앙 받을 몸으로 이곳 지역 주민들 역시 추앙했을 것이며, 또한 차기 왕비의 몸으로 옮겨 갈 장보고의 딸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면서 수절했을 것이지만, 당시 조정의 반역자로 종말을 맺은 장보고의 비련설은 후에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이 사장되거나 약화되고 왜곡되어 그 실체마져 헤아리지 못하게 되고 다만 만리성(萬里城)의 흔적만이 남게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는 너무 추상적인 비정이라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실증적인 근거로 허무러진 성벽만이 있을 뿐이니 지역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하는 자로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깝고 애석할 뿐이다. 다만 먼 옛날 오늘을 위해 이곳을 일구었을 선현들이 남긴 유물들을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더 이상 훼손됨을 막고, 그 성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만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라면 결코 나의 추정이 무리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이를 잊지 않고 좀 더 시간을 두고 밝혀 볼 것을 기대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생활이 개인적으로 힘들고 고단하거나, 조금은 여유있는 생활이라 할지라도

이를 기록하여 후인들이 오늘의 삶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면서 보다나은 내일을 꿈꾸고 발전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근본적인 목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삶.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독자 여러분께서도 비단 ‘만리성(萬里城)’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한 삶의 흔적과 우리의 선현들이 남긴 역사유물유적에 대한 많은 애정과 관심을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小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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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덕읍 도청리 皇甫 仁(1988년 조사 당시 81) 구술

2) 주1)과 동일

3)주1)과 동일

4) 長興郡鄕土誌” [8편 전설 제1장 설화 왕비사당] 1975 장흥군향토지편찬위원회

5)韓國地名總攬”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1983 한글학회

6)“東文選68天冠山記支提山事跡효종10天冠寺開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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