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14 - 흰 미영배의 강 탐진강
■장흥한담 14 - 흰 미영배의 강 탐진강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1.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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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수필가

물은 강을 품고 흐른다. 푸른 속살을 드러내 놓고 수억만 년 변함없이 한곳을 향해 흐르는 탐진강은 아픔의 역사를 흘려보냈고, 슬픈 삶을 보듬고 서로를 위로하며 너와 나의 아슴아슴한 추억을 흘려보냈다. 이끼처럼 옹기종기 살아온 장흥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흐르고 있는 탐진강. 신라 문무왕 때 탐라국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 등의 형제가 내조할 때 구십포(九十浦)에 상륙하였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탐라국의 ‘즐길 탐(耽)’자와 ‘나루 진(津)’자를 합하여 탐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총연장 56㎞의 길지 않는 강. 모래톱 갈대밭을 기웃거린 추억 하나가 초라해진 모습으로 다가와 화려한 과거와 뼈아픈 현대사의 퍼즐들을 맞춰간다. 탐진강 상류 봉황 귀소 형 자리에 둥지를 틀고 지혜의 등불을 켜온 보림사가 있고, 수많은 문객이 무수한 찬을 쏟아놓은 물 위의 정자들, 동학의 마지막 횃불이 사그라진 석대들의 흰 미영배를 위로하며 오늘도 묵묵히 흐르고 있다. 맑은 물에 멱을 감고 은어 몇 마리 강아지풀에 꿰어 집으로 오던 오래된 흑백사진과 장흥 다리 아래서 동부 고와 서부 고의 우람한 몸짓으로 기상을 뽐내던 젊은 과거는 이제 노인의 머릿속에서 가물거리고 그 자리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여름을 토해내는 물 축제가 정갈하고 가지런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오래전 강물에 몸을 담근 풀등에는 남몰래 몸 푼 물새들의 흔적들이 갈댓잎 사이로 살포시 드러낼 뿐, 아직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모래톱의 비밀은 긴 세월 힘겹게 겨울을 이겨 내고 있다.

용반 보를 지나온 찬바람이 살을 헤집고 들어와 강물에 삶의 찌꺼기를 토해낸다. 지나온 것을 추억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연속적인 단순함에 지쳐 있지만 나를 위로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버거운 짐 내려놓고 긴 숨 토해 놓을 자리 하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 탐진강 둔치는 슬그머니 속살을 내어 줄 뿐이다.

잘 말린 태양초 몇 근을 머리에 이고 새벽길을 재촉하여 장흥 장을 보던 어머니는 시집간 큰딸 동네 사람을 만나 눈물과 한숨을 토해내며 어린 것이 시집살이는 하지 않는지, 서방에게 얻어맞지는 않는지 가슴을 뜯으며 안부를 묻던 어머니의 오래전 뒷모습을 담았던 탐진강에서 어머니의 가슴팍과 흰 미영배 치맛자락 같은 포근함을 느끼며 몸 안에 익숙해진 오래된 과거를 끄집어내고 있다.

해 질 녘, 산그늘을 품고 석양을 밀어내던 강. 강둑에 피다만 꽃송이. 몽근 강자갈. 물웅덩이에 옹이처럼 박힌 돌부리들, 물살을 휘젓고 오르는 은빛 은어 떼들, 할미꽃이 눈을 뜨고 나올 무렵이면 겨울을 밀어내는 강 울음소리까지 이제는 떠도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겨울 강둑에는 피지 못한 노란 국화 한 송이가 바람에 휩쓸려 몸부림치고 있고 듬성듬성 이는 돌부리는 흔적을 감추고 옹골찬 시멘트 속에 몸을 숨기고 말았다. 강줄기를 타고 심어놓은 나무들은 강물과 하나 되지 못하고 낮 설다. 오래전에 함께 했던 버들강아지를 기억하는 걸까. 바다 건너 어느 산밭에서 듬성듬성 뿌리를 자르고 건너와 아픈 상처를 아물며 오래된 강물과 하나 되길 바라는 먼나무 옆 원두막에서 부스스한 삶의 한쪽을 고른다.

오늘도 변함없이 오직 만족하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의 마음을 가지고자 되뇌지만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를,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욕심인 걸까.

사는 것이 힘들거든 추억이 옹이처럼 박힌 정겨운 탐진강에서 단순한 생각과 가벼움으로 찾아와 어렸을 적 새겨둔 순진무구한 노래를 기억하며 빈 마음으로 구하고 성글어진 즐거움으로 위로받으면 어떨까.

넘치지 않고 부족한 대로 살아가자, 허망한 꿈 앞에서 절망을 피워 내지 말고, 지나간 영화를 아쉬워 말자. 바다를 향해서 가는 강물도 굴곡지고 떨어지다가 부족함을 채우고서야 넓은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듯 우리도 굴곡진 삶을 억척스럽게 채우면서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장원사의 범종 소리가 사그라진 흰 미영배의 역사와 흘러간 전설들을 위로하는 시간. 오늘도 나는 태산처럼 밀려드는 부족함 앞에서 초라해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졸∼졸∼졸 흐르는 탐진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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