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16-정남진 봄 길을 따라 걷다
■장흥한담 16-정남진 봄 길을 따라 걷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3.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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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오래된 느티나무에서 직박구리가 회를 친다.

봄바람이 바다를 빠져나와 산언덕을 덮치고 아지랑이를 뿌려놓았다. 엊그제 새 달력을 벽에 붙여 놓은 것 같은데 스멀스멀 땅속을 기어오던 봄을 미처 알지 못했나 보다. 비바람이 다도해를 할퀴던 밤, 겨울비 한 방울이 가지에 초롬히 맺혀 봄을 재촉하는 정남진 끝자락, 회진면 덕산리 한재 공원 10만여㎡에는 흰털을 뒤집어쓰고 꽃대를 올리는 늙은 할미꽃이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고 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어린 두 손녀만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할머니가 손녀들을 키워서 시집을 보냈다. 언니는 얼굴이 예쁜 덕에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동생은 아주 먼,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가까이 사는 큰 손녀는 할머니를 늘 구박하고 소홀히 대했다. 할머니는 마음씨 착한 작은 손녀가 그리워해 짧은 겨울 길을 나섰다가 손녀가 사는 마을이 가물가물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허기와 추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작은 손녀는 자기 집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할머니를 고이 묻었는데 이듬해 봄,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가 나와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처럼 땅을 딛고 진홍빛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 「한재 공원 홈페이지 참조」

주기만 하고 바라지 않는 슬픈 꽃이 누런 풀잎 속에서 한쪽 잎을 구부리고 검은 자주색 꽃대를 올린 할미꽃 향기가 선학동 청보리와 유채밭에 얼마나 머물러야 노란 꽃으로 뒤덮을까. 봄은 이청준 선생 눈길을 지나 해산 한승원 선생의 목선을 타고 이승우 선생의 식물들의 속삭임을 엿들으며 지나 올 것이다.

봄은 힘겹게 천관산을 넘는다.

푸른 꽃대 위에 하얀 속살을 보여주고 고개 숙인 춘란을 피워놓았고, 물오른 버들강아지에 노랑 물을 살짝 찍어놓은 햇볕과 봄바람이 대덕 청교 저수지 푸른 물에 잔잔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천관산 맑은 물을 가둔 청교 저수지 산길에서 화엄경의 천관 보살 신앙이 전래하는 천관산 바라본다. 담무갈 보살이 상주하는 금강산.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교 영산인 천관산에 가부좌를 틀고 다도해를 바라보며 부처의 가피를 전하는 저 위대하고 우람한 부처를 바라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신라와 당, 일본 등을 오가며 해상 무역활동에 종사했던 해상왕 장보고가 천관 보살 상주처인 천관산에 풍랑과 질병으로부터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청해진에서 삼배를 올리던 역사의 흔적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봄은 호남5대 명산인 천관산(지리산, 월출산, 변산, 내장산)을 할퀴고 나서야 농안리 동백 숲으로 모여든다.

산허리를 휘감은 삼백여 년 된 동백나무에 춘백 한 송이가 농염하게 봄을 타고 있다. 땅에 핀 붉은 꽃들도 화려하고 나뭇가지를 오가는 동박새도 꽃바람에 몸을 씻는다. 휘도는 산길에 봄이 머물고, 산 아래 펼쳐진 마을에도 봄 향기가 내려앉아 포근하다. 하늘을 가린 동백 숲에서 동박새가 재잘대는 곳으로 눈을 돌리며 빠져나온다. 굽은 산길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봄을 뒤쫓다가 응달진 곳에 우뚝 선 느티나무에 봄물이 오르는 가지에 힘이 들어있다.

봄비에 쫓겨 가던 겨울이 침묵을 걷어내며 파릇한 보리밭으로 안내한다.

앙칼진 겨울바람이 순한 햇살에 녹여내자 탐진강에서는 봄 오는 소리가 들린다. 탐진강 둔치에 눈을 뜬 잔디가 파릇 거리며 누런 풀밭 사이를 뚫고 있다. 무거운 옷을 벗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강가로 나온 사람들. 물은 내려오고 봄은 오르고 있다. 물처럼 맑은 봄이 몸에 스며든다. 조금 더 느리게 걸으며 몸에 묻은 찌든 때를 벗어낸다. 일상에 흐트러진 삶의 한 부분을 곧추세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정남진 장흥사람들. 둔치에 돋아난 민들레처럼, 강물을 넘나드는 새처럼,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으로 조용히 존재되고 싶어 하는 맑은 품성을 지닌 장흥사람들. 덥혀진 찻물 한잔을 마시며 편해진 마음으로 탐진강에서 봄을 맞이하고 있다.

탐진강 징검다리를 빠져나가는 물소리가 좀 더 맑아지면 산 밭둑에 쑥을 캐는 늙은 아짐과 젊디젊은 서울댁 며느리가 쑥 한 바구니를 캐어 담을 것이고, 평화마을 돌담에 기댄 목련도 활짝 필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 조금 더 기울어지면 남산공원 벚꽃이 터지고, 삐삐정 주변에 벚꽃도 피어나고, 억불산 진달래는 꽃망울이 맺히고, 제암산 철쭉이 눈을 뜨고, 시집간 내 누이도 아른거릴 것이고, 어릴 때 뛰놀던 잊혀진 친구도 어렴풋이 기억나겠지.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과 봄을 찾는 사람들이 뒤섞인 해맑은 정남진 장흥사람들에게 봄은 양지바른 곳으로 찾아와 자애롭고 평화롭게 감싸줄 것이다. 오늘도 강물은 물속에 잠긴 고향 골목길과 돌담을 끌어내어 맑게 흐른다. 직박구리가 또 한 번 회를 치며 지나간다.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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