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16- 장흥군 시장의 변화와 정남진토요시장(2)
■역사산책 16- 장흥군 시장의 변화와 정남진토요시장(2)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4.0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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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

/시인, 본지 논설위원, 장흥 향토사학연구회장

장흥의 장은 1700년 초부터 서기 시작했다
장흥도호부의 중심인 지금의 장흥읍 ‘부내장’이 2·7일장으로,
장흥도호부 곡물 대여기관 및 민간빈민구호기관의 역할을 하던
사창(社倉)이 있던 장평면 ‘사창장’이 1·6일장으로
장흥도호부와 인접한 항구였던 안양 ‘안양장’이 4·9일장이
이 당시 5일장으로 정착하여 열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외 관산읍 ‘죽천장’(3·8), 대덕읍 ‘대흥장’(1·5)
유치면 ‘월천장’(4·9)이 부정기적으로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시장은 단순한 상거래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시장은 농촌의 발전과 농민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곳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지역간 잉여생산물의 거래를 수평적으로 교환하는 기능을 가진 곳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시장은 소식 및 정보교환, 사교, 오락, 정치 등의 기능도 강하게 수행하였고, 농민들이 폐쇄된 단조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다음 기사는 황성신문 1906년 11월29일자에 실린 장흥지역과 관련된 보도 내용이다.  “순천 구례 여수 동북 옥과 창평 장흥 등 7개 군에서는 의병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수십에 이르러 흰 수건을 두르고 창검이나 도끼를 들고 민가를 드나들며 재물을 빼앗고 시장에 나타나 화물을 약탈하여 장사를 할 수 없어 백성들이 불안하므로 해당 도 관찰사에서 해당 군에 보내어 살피어 체포 중이다”라는 보도와  1919년 3월15일 대덕시장에서 천도교도인 김재계(金在桂) 김재반(金在班) 황생주(黃生周) 등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사실 등은 당시의 시장이 간헐적이지만 정치적 집회기능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당시 조선 말엽 전국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민란 또는 농민운동에서 장날, 장터가 집회일 및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1930년 5월2일자 매일신보(每日新報)의 지방단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소방협회 장흥지부에서는 5월9일 오전 11시부터 장흥시장에서 개회식을 거행하고 식이 종료한 후에는 연습을 행할 터인데 참가 소방수는 270여명으로서 분열식(分列式), 폼푸의 조작, 방수 경기인데 당일에는 본 도청으로부터 지사, 경찰부장, 보안과장이 열석(列席)할터이라 한다”라고 게재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인 시장을 통하여 중앙정부의 시책홍보나 주민들을 계도하는 사업장으로 시장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6년대 장흥시장과 탐진강
1976년대 장흥시장과 탐진강
회진시장의 개장장면
회진시장의 개장장면

그 밖에 장흥군에서 전하는 시장에 관한 기록은 아주 미흡하고 장흥군에 관한 기록 또한 많이 부족하다. 현재 가장 빠른 기록으로 장흥향교에서 1747년도에 발간한 ‘장흥읍지(정묘지)’에 의하면 부내(府內), 안양(安壤), 고읍(古邑), 장동(長東:후에 웅치장으로 불림), 장서(長西)방에 각각 장임(掌任)으로 시감(市監)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장흥군 관내에 장이 열렸던 것으로 여겨지나 장이 선 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때문에 5일장이었는지 아니면 특별한 장이었는지에 대하여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조선 영조 때 홍봉한(洪鳳漢)이 조선의 문물제도 전반에 걸쳐 1770년도에 기록한 오늘날 백과사전과 같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기록을 보면, 사창장(社倉場)(장평 1·6일. 월6회), 장흥장(長興場. 2·7일. 월6회), 대흥장(대덕 大興場.1·5일 월6회), 월천장(유치 月川場. 4일. 월3회), 안양장(安壤場. 4·9일. 월6회), 수문포장(안양 水門浦場. 1·6일. 월6회)이 열렸음이 나타난다.
  이후 1808년의 기록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죽천장(관산 竹川場. 3·8일. 월6회), 장서장(장평 長西場. 2·7일 월6회)이 섯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조선 후기 순조(1800-1834)의 기록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대흥장’과 ‘월천장의 장날이 ’대흥장‘은 1·6로 월 6회 ’월천장‘의 경우는 당초 4일로 월3회 열리던 장이 4·9일로 월6회 열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규장각에 보관된 전라도 장흥부 지도(奎 10489, 118×74cm, 1872년경)를 보면 부내(장흥), 고읍(관산), 대흥(대덕), 안양, 장서(장평), 유치 그리고 당시 장흥부의 관할이었던 웅치(熊峙)와 회천(會川)에 장시(場市)라 하여 장이 열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장흥군내의 장은 1700년 초부터 서기 시작했고, 장흥도호부의 중심인 지금의 장흥읍인 ‘부내장’이 2·7일장으로, 장흥도호부의 곡물 대여기관이자 민간의 빈민구호기관의 역할을 하던 사창(社倉)이 있던 장평면의 ‘사창장’이 1·6일장으로 열렸음을 알 수 있고, 장흥도호부와 인접한 항구가 있었던 안양면의 ‘안양장’이 4·9일장이 이 당시 5일장으로 정착하여 열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외의 관산읍의 ‘죽천장’(3·8)과 대덕읍의 ‘대흥장’(1·5) 그리고 유치면의 ‘월천장’(4·9)이 부정기적으로 열렸음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특히 ‘월천장’ 의 경우는 4일장으로 월3회 열리다가 후에 5일장으로 정착된 것으로 나타나 장흥군의 경우는 1900년 이전에 5일 장이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근·현대의 시장과 장흥시장의 변화

  1900년대에 들어 시장은 일본이 1910년 한일 합방 후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우리의 시장에 대한 감독과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시장의 운영권을 장악한 일본은 당시 조선인의 유일한 상품교환의 장소인 시장의 유용성을 그들의 경제적 침략정책에 활용하기 위하여 재래정기시장에 대해 장려정책을 강구하고 시행하였다.
  일본의 재래시장 설치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인해 1909년과 1916년간의 7년 동안 재래시장이 326곳이나 인위적으로 증설되었으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종전까지 시장이 전혀 서지 않았으나 이 기간 동안 8곳에 시장이 들어서게 하였으며, 1914년 9월에는 총독부령으로 “시장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시장을 제1, 2 ,3호 시장으로 시장을 확대구분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3호 시장을 제외하고는 공공단체 또는 이에 준하는 자가 아니면 시장을 개설할 수 없도록 정하여 놓음으로써 일제가 시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제1호시장이란 장옥이 설치된 일정 장소에서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다수의 수요 공급자가 모여 화물의 매매교환을 행하는 시장을 말한다. 당시의 정기시장은 모두 1호 시장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까지 사용되어 오던 장시(場市)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시장(市場)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이다.
  제2호시장은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한 장옥에서 주로 곡물과 식료품의 판매를 행하는 장소였다. 서울, 평양, 대구, 부산, 인천, 목표, 군산, 원산 등의 도시에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발달된 일반상가 및 일본인이 거주하는 시가에 있었던 공설 식료품 시장은 제2시장에 해당되었다
  제3호시장은 위탁을 받아 경매방법에 의해 화물을 판매하는 장소로서 회사조직 형태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산물 시장과 청과물 시장이 이에 해당된다.
  그 후 1920년에는 시장규칙을 개정하여 유가증권을 매매 거래하는 장소를 제4호시장으로 하고 이를 신설하였다.
  일제시대의 시장은 경제적 거래비중이나 시장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심지였다. 이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시장을 통해 우리의 농수산물을 수집하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교환기능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시장의 거래품목은 조선시대에 비해 각종 공산품이 다양하게 등장하였다. 이는 일제가 공산품 수출시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시장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시장에서는 조선시대에 비해 농촌과 도시 간 또는 서로 다른 지역 간의 수평적 교환기능이 강화되었고, 이는 시장의 규모가 클수록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장흥읍의 5일장이 최초에 열린 장소는 현재 장흥읍사무소가 있는 강변 쪽인 “동교(東橋=현 장흥교)”의 위쪽 ‘청우빌라’가 있는 강변이었던 곳으로 1872년도에 간행한 “전라도 장흥부지도”에 나타난다. 여기에 위치하던 시장이 “동교천이 범람하여 시장건물 62좌(座)와 그곳에서 묵고 자던 3명이 행불되었다”는 1908년 8월4일 황성신문(皇城新聞)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동교” 아래쪽으로 시장을 옮겨 운영되고 있었음이 1910년 당시의 사진에 보인다. 이 시장 또한 1930년 8월26일 대홍수로 기양리와 예양리 시장이 침수되어 가옥 2백여 호가 침수되고 30여 채가 유실되는 피해가 있자 당시 장흥면장인 손영(孫英)이라는 분의 노력으로 1933년 4월 전남도에 승인을 얻어 ‘춘궁기 빈민구제 사업’이라 하여 요즘 같으면 취로사업을 실시하여 현재의 시장 위치에 ‘탐진강 시장매축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착공 전후로 각각 보도 되는데 준공 무렵에는 시장의 사진까지 실어 보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내용 원문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四萬二千圓 工費로 長興市場을 埋築
면내에 산재한 궁민에게 출역토록 春窮期에 貧民救濟
[장흥] 전남 장흥군 읍내(長興邑內) 시장은 작년 하천공사로 인하여 임시 시장을 사용하던바 작년 봄까지 하천공사가 끝난 후부터 시장 이전문제로 일반 시민과 면 당국에서 군 당국과 교섭한 결과 이전 시장을 매축하여 사용키로 작정되어 도 당국에 인가를 제출한 바 근일에 허가가 되었으므로 十二일부터 공사에 착수한다. 그런데 공사비 四萬二千圓은 면에서 기채하며 공사인부는 장흥천변에 산재한 주민으로 출역케 한다는데 이 공사로 인하여 춘궁을 당한 일반 궁민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하며 이번 공사에 있어서 현 장흥면장 손영(孫英) 씨의 활동이 많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3. 4. 18자>

▲全南 唯一의 市場인 長興市場을 埋築, 매일 남녀 평균 一천二백 명 공사,
     工費는 五萬四千圓

[兵營] 전남 장흥(長興)에는 시가 옆에 있는 하천의 정리공사는 이미 작년도에 끝나고 시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려고 무수히 활동하여 시장 매축은 이미 끝났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매축비는 一萬二千원이 들었다 한다. 매일 남녀 평균 一千二百여 명 인부가 들었다는데 남자는 연인원(延人員) 三萬五千 명이며 여자는 연인원 二萬二千七百五十 명이 들었다는데 남자는 매인 평균수당이 三十五전이며 여자는 十五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장 공사는 불원간에 공사비 四萬 二千원을 들여 착수하리라는데 장흥시장은 현재에도 전남적으로 보아 굴지되는 시장으로 앞으로 일층 확장하면 전남 유일의 시장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동아일보1933. 7. 5 자>
  이 매축공사를 하는 동안 5일장의 개설은 지금의 신남외리 쪽에서 개장되었다가 매축공사가 완료되자 지금의 시장 위치로 옮겨 오는데 개장을 알리고 축하하기 위해 씨름판을 벌이는 등 3일간 난장을 텃다고 원로들이 전한다.
  이렇게 시장을 개장하면서 관주도로 특별행사를 벌림은 해당 지역사람은 물론 인근 주민들에게도 시장이 개장되었음을 기억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적인 언론매체와의 접촉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문맹률이 약 80%를 상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당시 시장은 우리 군민들에게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문화오락을 즐기기 위한 장소로서 그리고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장소로서 시장이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남사당, 신파극, 영화, 곡마단 등의 공연을 시장부지에서 펼쳐 지역민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장흥장이 개장한 이후 장흥장은 인근 강진 해남장보다 거래물량이 많고 물건이 잘 팔려 ‘허천난 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한다. 그런데다 장흥장의 ‘우(牛)시장’이 지역 경제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흥군에서 가축만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가축시장은 1927년 3월20일 장평가축시장이 맨 먼저 개장허가를 얻어 양촌리 194-6번지(현 장평시장에서 장평천변)에 개장하였고, 다음으로 대덕가축시장이 신월리 1091-4번지(현 평촌다리 입구의 대덕천변)에 1935년 1월5일 개장하였으며, 장흥가축시장은 1939년 3월2일자로 지금의 토요시장 홍보관과 공연무대 앞쪽(예양리 195번지)에 약 570평의 부지의 가축시장을 개장하였다. 이에 따라 장흥읍의 가축시장이던 “장흥우시장”이 당시 일본인의 전용학교인 “장흥아시히고등소학교(長興旭高等小學校, 현 장흥서초등학교)”의 교정과 인접한 관계로 당시 학교를 비하하여 “소전머리학교”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축 전용시장인 ‘우시장’ 또한 5일 시장의 개장과 동시에 개장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가축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장흥군내 가축시장이 장평·대덕·장흥 외에 관산과 유치면에도 가축 시장이 형성되었음을 ‘장흥군 가축시장 허가대장’에는 기록이 되어있으나 장평, 대덕, 장흥과는 달리 개장 허가일이 허가 대장에 기록이 되지 않고 운영되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흥 우시장이 다른 고을의 가축시장보다 번성했음을 반증하는 자료가 1921년 2월1일자 매일신보(每日新報)를 보인다. 당시 매일신보에 의하면 ‘장흥우시장’과 나주 ‘남평우시장’에서 거래한 생우의 연령별 출두수와 거래숫자 그리고 가격을 비교하여 보도하면서 장흥우시장이 남평우시장 보다 거래 두수가 많고 그 값 또한 싸게 거래 되어 활기를 얻고 있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시장까지 매축하여 새롭게 단장된 시장에서의 거래로 매매의 효과가 좋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관산, 대덕, 유치의 가축시장은 1983년 8월에 폐쇄하였으며 장흥읍의 가축시장은 2004년 4월7일 폐쇄하였다가 2006년도에 현 위치인 장흥남초등학교가 위치한 순지리 111 번지 선으로 옮겨 현재 운영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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