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역사유산/(2)장흥도호부
■장흥의 역사유산/(2)장흥도호부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4.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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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고려 인종-조선말, 전남 서남부 유일한 부사고을
▲1872년 장흥부지도 장흥읍부분(예양강 서부) - 장흥읍성 부근도와 지명-장흥도호부2
▲1872년 장흥부지도 장흥읍부분(예양강 서부) - 장흥읍성 부근도와 지명-
▲1872년 장흥부지도 장흥읍부분(예양강 동부) - 부동면과 벽사도 부근도와 지명

○ 소재지 : 장흥읍 동동리・남동리·예양리·기양리

1)장흥도호부 연혁

현재의 장흥군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이다. 장흥부(長興府).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다. 당시 치소는 지금의 관산읍이다. ▸757년 오아현(烏兒縣)으로 개칭하고 보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 정안현(定安縣)으로 개칭하고 영암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성종이 정주(定州) 또는 관산(冠山)이라는 별호를 부여하였다. ▸고려 인종이 공예왕후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부(長興府)로 승격시켰다.

*고려 인종 연간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정안현(定安縣)이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되면서 ‘장흥(長興)’이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했고 고을의 격은 ‘부(府)’가 되었다. 이 시기 부의 치소는 현재의 관산읍 천관산 남쪽에 치소가 있었다. 그 후 1265년(고려 원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영암군의 속현인 수령현(遂寧縣), 탐진현(耽津縣)과 보성군의 속현인 회령현(會寧縣), 장택현(長澤縣), 두원현(荳原縣)이 장흥의 속현이 되었다. 뒤에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 도양현(道陽縣)으로 승격되어 6개 속현을 관할하였다._

*1379년에 왜구로 인해 내지(철야현)로 옮겼다가 1392년에 장흥읍 건산리 중령산고성으로 옮겼다.

*1409년(태종 9)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

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장흥부가 관할해 오던 5현과 6향 13소를 장흥부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장흥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이듬해 성이 좁다 하여 옛 수령현의 터에 성을 쌓고 장흥의 치소로 삼았다.

*1417년(태종 17)에 남쪽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전라병영을 광주목(光州牧)에서 장흥 인근 강진현(현재의 병영면 일원)으로 옮겼다. 옛 탐진현이 도강현에 편입되어 강진현이 되었다.

*1441년 옛 두원현과 도양현이 흥양현에 편입되었다.

*1422년 장흥읍 동동리・남동리 일원으로 옮겼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장흥을 비롯하여 해남·강진을 전라도 흥양진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진이 설치되었는데 장흥도 그중 하나이다. 장흥진에는 보성·강진·해남·진도가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599년(선조 32)에 도원수 권율의 계청으로 전라병영을 장흥부로 옮겼다가, 1604년(선조37)에 지형이 불편하다 하여 판관 김여순의 소청에 따라 원래대로 강진으로 다시 이설하였다.

*1654년(효종 5)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5영(營)을 두고 각 군현

을 배속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순천 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653년에는 장흥부가 장흥현(長興縣)으로 강등되었다. 1666년(현종 7)에 감사 민유중의 계청으로 진(鎭)을 따로 두어 장흥부사가 전라도 전영(前營)의 영장을 겸임하였다(『현종개수실록』 7년 2월 24일). 『증보문헌비고』에는 전라도의 병마첨절제사가 4원으로 되었는데, 장흥부사를 비롯하여 나주목사·남원부사·순천부사가 겸임하였다.

*1683년(숙종 9)에 감사 이사명의 계청으로 진을 순천부로 옮겼다. 1688년에 다시 장흥도호부가 된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장흥부에 포군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윤 5월 1일)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장흥부가 폐지되고 나주

부(羅州府) 관할 장흥군(長興郡)이 되었다.(칙령 제98호 地方制度改正件 1895. 5. 26 반포). 1896년(고종33) 8월 4일에 전국 23부를 13도로 개편할 때 전라남도 장흥군이 된다.(칙령 제36호 1896.8.4 반포)

▸속현-군내면, 부서면, 부동면, 대흥면, 내덕면, 남상면, 남하면, 부산면, 용계면, 유치면, 부평면, 고상면, 고하면(이상 2면은 옛 장흥), 장동면, 장서면(이상 2면은 옛 장택현), 안상면, 안하면(이상 2면은 옛 안양향), 회령면(옛 회령현), 웅치면(옛 웅점소), 천포면

*1896년 도서 지역을 신설 완도군에 편입하였다.(칙령 제13호 3군을 두는 안건)

*1896년 8월 4일 전라남도 장흥군 (칙령 제36호 地方制度官制改正件 (1896년 8월 4일)

*1914년 4월 1일 천포면, 회령면, 웅치면을 보성군에 편입하였다.(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년 12월 29일). -노력도 등 육지에 바로 인접한 일부 도서를 완도군에서 반환받았다.

2)관직

장흥 호호부의 부관직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흥부에 종3품 부사(府使) 1인과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장흥부사는 종3품 병마첨절제사를 겸하고 그 밑

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장흥부는 부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장흥부사는 장흥이 바다와 인접한 지역임을 감안하여 주로 무관을 임용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문신이 아닌 무과 출신자를 임명하여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장흥을 비롯하여 순천·보성·낙안·광양·강진·해남 같은 곳은 바다와 가까워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인데도 그곳 수령이 대부분 무신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6년 3월 8일).

명종대 이후에는 무과 출신자를 이 지역 수령으로 꾸준하게 파견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장흥을 비롯하여 순천·영광·강진·해남의 문관 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용하기로 하였다(『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 장흥부사 공무기록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 중심으로

장흥도호부사와 관련 공무와 일상사 기록을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기록을 토대로 살펴보자. 『미암일기』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선조 10년) 5월 13일까지 11년간에 걸친 일기이다. 개인 일기이지만 조정의 공적인 사무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장흥과 관련해서는 장흥부사 조희문의 기록이 처음 나온다. 1567년(선조 즉위녀 정묘) 11월 29일 기록으로 “장흥부사 조희문(趙希文)이 사람을 시켜 백미 열 말, 콩 닷 말, 낙지 두속, 소금 친 전복 50개, 참깨 너 말을 보내왔다”는 내용이다.

이때 유희춘은 담양 집에 있을 때이다.

조희문(1527~1578)은 남원출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범(景范), 호는 월계(月溪)이다. 아버지는 사성 조임(趙琳)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참봉 원동(元童)의 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장흥부사로 있을 때 명륜당에 유생들을 모아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 등을 강의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는 등 문교진흥에 힘썼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기대승(1527~1572)·정철(1536~1593)·백광훈(1537~1582) 등과 교유하였다.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유희춘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1547년 이후 19년 동안 제주, 종성, 은진에서 유배살이를 한다. 1567년에 다시 벼슬길에 나서 10월 12일 직강, 10월 30일 홍문관 교리에 임

명된다. 유희춘은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 한 뒤 상소를 올리고 11월에 고향으로 내려

와 다음해 1월에 한양으로 다시 간다. 담양 집으로 내려 온 때는 11월 25일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장흥부사가 선물을 보낸 것이다. 당시 양반관료의 선물수수 행위는 상당히 보편화된 경제운영 체제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수증(受贈)은 양반 관료가 자신의 정치·사회적 역

량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지방관이나 친인척으로부터 정례적으로 선물 받는 것을 말한다. 정

형화(定形化)된 하나의 경제 형태였다.

조희문 장흥부사는 하서 김인후의 제자이자 사위로서 동문인 유희춘과는 자주 교류를 한다. 아들 유경렴을 장흥부에 보내기도 하고 유희춘 자신도 장흥부에 들러 조희문 부사의 어머니와 부인도 만난 기록이 있다. 장흥에 머무를 때에는 찬 생석화(굴)를 먹고 탈이나 여러 차례 변소에 간 기록이 있고 호초탕(胡椒湯)을 마셔 속을 덥게 했다는 내용도 적고 있다. 호초탕은 후추와 녹두 가루를 내어 모과를 달인 물에 탄 것이다. 그리고 서찰을 보내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 주기를 부사에게 청하기도 한다. 유희춘의 아들 유경렴도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조희문부사가 『하서전집』(김인후 문집)을 유희춘에게 보낸 기록도 있다. 『하서전집』은 문인 조희문이 8년간 수집한 초본(草本)을 백광훈이 초서(抄書)하고 하서의 문인양자징(梁子澂)과 신각(申覺)이 교정과 간역(刊役)을 맡아 전라 감사 송찬(宋贊)의 협조로1568년에 간행하였다. 초간본 서문을 조희문이 썼다.

유희춘이 아버지와 함께 만숙원에 들렀던 일을 회상한 내용도 있다. 조희문의 뒤를 이어 유충정이 장흥부사가 되는데 이에 대한기록도 있다. 『미암일기』의 장흥부 관련 기록을 발췌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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