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18 -봄볕이 흐르는 암천마을
■장흥한담 18 -봄볕이 흐르는 암천마을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0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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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사월 꽃이 피고 지는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연초록 잎사귀를 보고 있다. 생명의 오묘함과 자연의 순환을 귀 기울이며 듣는다. 자연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투어 돋아나고, 걸치고 있는 두꺼운 웃옷 하나를 벗어 놓고 뒤돌아보면 어느새 여름의 진한 녹음이 앞서고 있을 것 같은 해맑은 날, 산 밑 낮은 곳에는 광대나물이 자주빛 꽃을 피워 이 자리가 옛사람들이 오갔던 길이라고 반갑게 형체를 나타내더니 몇 발자국 따라가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찾을 수 없도록 옛길은 산으로 돌아갔다.

지역사학에 해박한 선배가 들려주는 유치면의 현대사를 들으며 바람도 휘돌아 가야하고 구름과 달도 내려와야 한다는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암천마을을 더듬고 있다. 따스한 봄볕이 소담스럽게 내려앉아 행복감에 만취된 마을이지만 굴곡진 현대사의 아픔 하나를 건들면 붉은 피 뚝뚝 떨어지며 산자의 쓰라림이 깃든 마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깊은 골에서 내려오는 봄물이 마을을 위로라도 하는 듯 순하게 흐른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촌을 이루고 있는 암천마을에 유치북국민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1940. 3 대천간이 학교로 승인받아 1945.10 유치북국민학교로 개교하여 1997. 3 유치국민학교와 통폐합되기까지 50여년간 코흘리개 어린이에게 꿈을 키워주던 학교가 터조차 사라진 자리에서 묻힌 교가를 듣고 있다

「국사봉 기슭에 터전을 잡고 / 높은 산 흰 물줄기 정기를 받아

슬기와 굳센 체력 길러나가는 / 우리는 대한의 유치 북교어린이

보아라 저 바위는 우리의 기상/ 나간다 대한의 등불 유치 북교 어린이」

(작사자 :류규현 / 작곡자 : 김치국)

학교의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에만 남아 있다. 이 자리는 3월에 입학한 1학년 어린이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발맞춰 하나, 둘, 셋, 넷 하며 걸어가던 넓은 운동장이고, 이 자리는 허름한 6학년 교실이고, 저 쪽은 귀신이 나온다는 화장실 자리를 더듬다가 설핏, 속살에 박힌 슬픈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암천리는 장흥의 현대사가 넘어가는 질곡의 길목이었다. 학교가 남로당 전남도당 임시본부로 사용되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토박이로 살던 암천주민들이 떠나는 비운의 마을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의병을 뒤 쫒아 왔을 때도 이곳은 암반이 천리요(암천마을) 강이 만리(강만리)라며 지형이 숨을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여 화를 면했다는 구전을 전해주는 사람도 이제는 없을 것 같다. 목탁봉과 흠골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을을 더듬고 흐르다가 큰 물천이와 작은 물천이에서 머뭇거리며 나긋하게 봄물을 모으고 있을 즈음, 휘돌아 가는 바람 한 줄기가 앞산을 지나갔나 보다. 흔들리는 연초록 잎사귀들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다정한 손짓처럼 정겹고, 다랑이 밭둑에 돋아난 쑥은 청정바람이 키워내서 일까. 서울댁 며느리가 시아버지 제사 때 내려와 한 움큼 뜯어 새싹보리와 바지락 몇 개를 넣고 끓인 된장국을 맛보고 가고, 고향을 떠났던 옛사람들이 몇 주먹 뜯어가는 것은 암천리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젖무덤이기 때문이리라. 숲이 흔들림을 멈추자 산새 소리도 멈추었다. 숲은 낯선 자의 모습에 경직된 모습이다. 숨이 멎을듯한 적막함과 우람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흔적들 사이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 노모의 모습을 보면서 잊힌 우리들의 옛 모습을 더듬고 있을 때, 나주 세지로 가는 지방도 820호선의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 흙냄새가 몸 안에 잠복해 있던 기억의 세포를 깨우고 있다.

오늘은 나를 점검한 하루다. 옛길을 따라 켜켜이 쌓인 회색빛의 우울한 마음과 불편한 파편들을 연초록 바람에 털어내며, 오늘 하루만이라도 가슴에 날 선 가시가 돋아나지 않기를 바라고, 비루한 지식으로 남에게 충고하는 경솔함과 어리석은 행동이 없기를 바라고, 삶의 본능을 탐하기보다는 따뜻한 햇볕 한 줌이 산밭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하루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갈증을 느끼는 삶에 목마른 밤을 지새웠다면 가벼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암천리 마을을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목탁봉과 흠골물이 넘실거리는 큰 물천이와 작은 물천이 앞에서 조각난 돌조각 하나를 던지며 가난한 어린 시절 속으로 들어가 눈물 한 방울 쏟고 나면 소유하지 못함에 발버둥치는 헛된 욕심과, 꼭 내 자식에게만 풀리지 않는 듯한 불편한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술술 풀릴 것이라는 여유로움을 되찾을 것이리라.

혹여, 뒤 돌아볼 여유조차도 없거든 비 오는 날 짬을 내어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산새도 떠나고 사람도 움직이지 않는 적막한 고요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 될 때, 힘들게 살아온 삶의 껍데기가 뚝뚝 떨어 질것이다. 오늘같이 맑은 날, 커피 한잔 들고 암천마을 다리교각에 걸터앉아 발산마을에서 불어오는 달디단 바람을 맛보길 바란다. 암천마을은 우리들의 모습이 왠지 슬퍼 보일 때 어머니 품에서 돋아나는 비릿한 젖내음을 풍기며 살포시 안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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