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20-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화(電話) (1)
■역사산책 20-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화(電話) (1)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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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시인, 본지논설위원. 장흥 향토사연구회장

전화기의 발명

전화기는 유선이나 무선 전파를 통해서 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 기계이다.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는 편리성과 매력 때문에 많은 발전으로 오늘 날은 개인 필수품이 되어 초등학생들까지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는 문명의 기기가 되었다.

그럼 이 전화기는 언제 만들어져 대중화 되어 없으면 안될 만큼 긴요한 물건이 되었을까? 분명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리 길지 않은 역시 속에 그 발달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렵게 빠르게 발전하여 왔음만을 기억할 뿐이다.

정보를 전달하고 습득하는 수단 중에 음성은 가장 편리한 수단이지만 도달거리가 짧다는 약점이 있다. 때문에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음성을 멀리까지 전달하고자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왔다.

1845년 모스(Morse,S.F.B.)가 전신을 발명한 다음해 영국에서 나팔모양의 확성기에 압축공기를 불어넣어 음을 내는 일종의 기적(汽笛) 장치가 고안되었다. 이 장치를 그리스어의 텔(tel:먼 곳에)과 폰(phon:音)의 합성어인 텔레폰(telephone)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전화는 전기현상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멀리 떨어진 곳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계를 말하지만, 지금은 전기현상을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되었다.

지금과 같은 전화기는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A.G.)이 발명하여 그 해 4월3일 보스턴∼뉴욕 사이에 최초로 실용화되었다. 그 후 2년 뒤인 1878년 에디슨(Edison,T.A.)에 의하여 송화기(送話機)가 개량되자 전화보급은 한층 더 진전되었고 현재의 전화기의 기본 원리가 정립되었다.

이와 같은 발명과 실용화의 노력은 전기를 이용한 음성통신의 시대를 열어가게 하였고, 전신과 함께 전기통신시대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전화가 실용화되어 보급된 이듬해 미국 보스턴(Boston)시에서 전화교환업무가 처음 시작되었다.

벨의 전화기
벨의 전화기

이때의 교환방식은 수화기를 걸어놓고 핸들을 돌리는 자석식 방식에서 오늘날 ‘전화를 건다.’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그 뒤 핸들을 돌려 전류를 발생시키는 자석식 전화기 이후 1908년에는 교환기와 전기를 공유하는 공전식 전화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당시 전화는 전화기를 들면 회선에 전류가 흘러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가 켜져 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동이라는 점에서 불편함은 여전하였다.

이후 1889년 미국의 알몬 스트로저(Almon Strowger)에 의하여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 방식의 자동교환기가 1896년도에 발명된다.

이 방식은 다이얼 숫자 한 자리마다 전자계전기가 작동하여 차례로 선택기와 접속기의 스위치를 자동으로 연결하여 상대에게 접속하는 방식으로 이 교환기에 의해 드디어 상대방의 번호를 직접 돌리는 다이얼 전화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자동전화기는 1876년 알렐산더 그레이엄 벨(Bell,A.G.)이 최초의 전화기를 선보인지 딱 20년이 되는 해였지만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35년이고 전자식(MFC) 교환기가 도입된 시기는 1979년이다,

 

우리 나라의 첫 전화기설치와 개통

1900년대 남자 교환수-작은 연못 브리그에서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와 사용된 시기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 A. G)이 전화기를 발명하고 나서 20년이 지난 1896년 10월에 개통된 궁내부 행정전화가 그 효시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화가설은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을 중심으로 궁중에 석 대, 각 부(部)에 한 대씩 모두 열 대의 전화기를 설치했다.

당시 전화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텔레폰’(telephone)의 영어발음을 음역하여 ‘다리풍’(爹釐風) ‘덕율풍’(德律風)이라 불렀고, 또 이를 의역하여 ‘전어통(傳語筒)’ ‘전어기’(傳語機) 또는 ‘어화통’(語話筒)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첫 통화는 궁중에서 지금의 외무부(外務部)에 해당하는 외부(外部)에 전화하여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라.”고 하달한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첫 통화치고는 내용이 조금은 싱겁다.

또한 궁중과 각 부(各 衙門) 외 전화는 조선의 대표적 개항장인 인천과 궁중전용간의 직통전화였다. 이 전화 역시 공무용으로 이용되었다. 궁중과 인천간의 전화 역시 1896년에 개통된 전화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 ; 1876~1949)선생의 생명을 건지게 된 일화가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1896년 2월 백범 김구(金九)의 나이 20살 때이다. 당시 선생은 일본인에게 피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고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黃海道 安岳郡 鵄河浦)에서 한복차림으로 변장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뒤, 살해범으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이 사실을 알고, 인천 감리사 겸 인천부윤(仁川監理使 兼 仁川府尹)인 이재정(李在正 ; 1846~1921)을 직접 전화로 불러 사형집행 취소를 지시했다. 그때가 1896년 음력 윤 8월26일로 전화가 가설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만약 전화기가 없었다면 김구 선생의 명운이 다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신문물의 도입으로 김구 선생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전화가 궁중에 처음 설치되자 당시 궁중에서 전화를 걸만한 사람은 고종황제 밖에 없었다. 때문에 대신들은 전화기의 벨이 울리면 고종황제를 뵙는 듯 의관을 정제하고 사은숙배를 한 다음 엎드려 전화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전화가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전화에 얽힌 애환하나가 전한다. 1919년 1월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덕수궁으로 달려간 순종이 함녕전(咸寧殿)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종은 흰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향년 68세,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이 망국(亡國) 9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종이 갑자기 떠나게 됨은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개화파 인사 윤치호(尹致昊)의 일기에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아무튼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순종에게 일본식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하고 각종 행사나 제사까지도 일본식으로 치룰 것을 강요했다. 고종의 묘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안장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洪陵)에 모셨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통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喪)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부모님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은 일본의 감시와 강요 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묘책을 내었다. 궁궐 전화선을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안장된 홍릉묘역에 연결시켜 놓고 능지기가 수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송화기를 통해 오열을 터트리며 애끓는 곡성을 내보냈다고 한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마지막 임금 순종이 불운한 역사 속에서 전화 3년상은 나라를 잃는 슬픔 속에서도 아버지를 모시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과 우리의 전통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순종의 효성에 의한 묘책이 아니었나 싶다.

민간의 전화설치와 보급

1900년대- 전남 백년사에서
1900년대- 전남 백년사에서

민간인이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화가 최초 개설된 때는 1902년 3월20일 한성(서울)-제물포(인천) 구간이다. 그해 6월에는 한성에서 시내 전화도 개통되었다. 당시의 전화는 교환원을 거쳐 상대방과 연결하는 방식이었고, 요금은 시외 시내 전화 구분없이 5분 한 통화에 50전이었다. 1903년에는 공중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소”도 생겼다. 전화소에는 개인전화와 교환업무를 함께 수행하는 장리(掌吏)가 있었다. 장리는 전화로 소통되는 내용을 간단히 기록을 하였을 뿐 아니라, 통화자가 불온한 말이나 저속한 말을 주고받거나 말싸움을 하면 통화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전화 규칙을 집행하는 관리였다. 전화 받을 사람을 불러와야 할 경우에는 거리를 계산해 1리에 2전씩 요금을 더 받았다고 한다.

이 시절 민간 최초 전화 가입자는 2개소로 우리나라 근대 대표 금융기관인 “대한천일은행” 본 점과 제물포지점이었다. 이렇게 민간 전화 사업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전화가입자수는 크게 늘지는 않았다 한다. 이는 당시의 도시생활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봉건적 사회체제 아래에서 전화를 설치할 만한 상류계층에서 의사의 전달이나 연락을 위해 하인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전화설치비가 600원으로 당시 쌀 한 섬이 8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일반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매우 비싼 값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울의 경우는 매우 부유한 가정집에서 설치하였고, 지방의 경우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기업이나 조계지(租界地) 내의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보급되기 시작했던 전화 사업은 처음엔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관장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약 6개월 전 한일통신협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통신주권을 일본에 빼앗겨 사업권이 일본계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 일본인이 전기통신사업을 시행하였다. 처음 인천, 서울, 평양에 머물던 전화선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자동전화교환 기술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전화선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발전한 듯하였으나 일본-조선-만주 연결에 초점을 맞추거나 반일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경비통신에 치중된 것이어서 한반도를 아우르지 못했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기통신사업은 일본의 식민지통치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주로 일반대중의 통제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1941년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한반도 대부분의 통신시설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었다. 그 결과 일반대중을 위한 통신설비의 확충은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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