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인물편(1)/무계 고영완③ - 정치 마감 후 귀향-고향을 위해 나눔 운동에 앞장
■근현대 인물편(1)/무계 고영완③ - 정치 마감 후 귀향-고향을 위해 나눔 운동에 앞장
  • 김선욱
  • 승인 2018.06.20 1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흥중 설립 크게 기여- 미진학자 위해 장흥농업기술고등학교 설립

지역사회 발전 위해 전답 6백평 기부등 나눔운동 선도적으로 펼쳐
무계 고택에 오르는 계단길-  무계 고택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무계 고택에 오르는 계단길- 무계 고택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무계 선생은 장흥이 낳은 독립투사이자 정치가이며 독지가이자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이기도 했다. 그는 이 시대 드물게 보는, 곧고 옳은 정치, 소신의 정치를 펼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무계 선생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는 정치를 하였지만 이재(理財)에 밝은 작금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판에서 그 흔한 권모술수 같은 것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는 분이었다. 아마 수차의 정치 도전에도 번번이 실패한 데는, 너무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 신념의 정치를 추구하고 이를 실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고 술회한다.

강수의(姜守義)전 문화원장(제3대~제6대장흥문화원장)은 생전에 무계 선생에 대해 “언제인가 장흥을 위해 좋은 사진 많이 찍으라며, 카메라 구입용으로 2만원(현시가 2백만원)을 준 일이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가끔 찾아갈 때마다, 홀로 술을 드시거나 백광훈(白光勳, 기봉 백광홍의 弟. 조선중기의 유명한 시인)의 한시집이며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즐겨 읽곤 했다. …그분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고직하고 고매한 선비였다. 큰 이익을 남기는 일이라도 옳지 않는 일이라면 절대 야합하지도 않았던 강직하고 진정한 의인(義人)이었으며, 장흥중학교 부지며 공적 사업에 많이 기부하기도 했던, 독지가요 덕인(德人)이고 학자였다”고 강수의 씨는 술회했다.

장흥중- 설립 유공자로 공적비 세워

2007년 5월 11일, 장흥중학교 교정에서 장흥중학교 설립 유공자인 고 국오현, 고영완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가족을 비롯 재경·재광·재장 중고동문회원 등 1백 명이 참석하여 고인들의 업적을 기렸다. 공적비는 학교 교문 바로 좌측에 세워졌으며, 높이 4m, 넓이 7m, 폭 2.4m의 석비로 조성되었다.

장흥중학교는 1946년 10월 9일 장흥공립중학교(3년)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고, 1949년 6월 13일 현 교사(건산리 506번지)로 준공 이전했다.

이때 부지 희사 등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지방민들의 노력의 결과로 설립된 장흥중학교는 이후 장흥군의 중등교육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고연완 선생과 국오현 선생은 답 100두락씩 희사했다.

장흥농업기술고등학교도 설립

▲고영완 장남 고병선
▲고영완 장남 고병선
​▲고영완 3남 고병돈▲고영완 3남 고병돈​
​▲고영완 3남 고병돈​

장흥중학교 설립에 기여했던 무계의 고향의 교육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이후 1953년 당시 한국의 농촌은 피폐화가 극심했다. 대부분 농촌의 가정에서 자녀를 중고등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마을에 한두 곳에 불과했다.

이러한 농촌의 실상을 목격한 무계가 농촌 청소년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해 설립한 학교가 장흥농업기술고등학교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낙선한 무계는 자기 소유의 우목리(우산리) 농장의 임야와 전답 3만 평을 실습용으로 내놓았고 구 군청터(동헌 터)를 임차하여 장흥농업기술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개교 당시 학생 수가 500여 명에 이르렀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은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았고, 후에 학교법인 인가를 받을 경우 자신 소유 재산을 학교법인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그 학교를 장흥읍 교회로 위탁 운영하도록 하였지만, 결국 학교 법인 인가도 받지 못한 채 재정난까지 심해지면서 1975년 개교 20년 만에 폐교하게 되었다.

무계는 또 농촌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600만원 상당의 전답을 마을에 희사하기도 했다. 당시 공화당 정부의 취락개선 사업을 적극 지지했던 무계는 막내아들(병학)를 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한 어려움 속에서도 장흥읍 내평마을에 600만원 상당의 전답을 희사한 것. 이에 대해 당시 언론은 “...2대 국회의원 때 야당의원을 지낸 고영완씨(72)는 고향인 장흥군 장흥읍 내평마을에 600만원 상당의 전답을 희사했다. 국회의원 재직 때 자유중국을 시찰하면서 잘사는 농촌을 보고 왔다는 고씨는 “우리 농촌도 이제는 잘 살 수 있을 때가 왔다.” 면서 매일 마을에 나가 집짓는 일을 돌봐주고 있다(경향신문. 1978년 7월 26일) 고 보도하기도 했다.

평화리- 군정앞 도로도 희사

이 뿐이 아니었다, 무계는 평화리에 지금의 장흥군청 앞까지의 도로를 희사하는 것을 비롯하여 지역사회단체 부흥을 위해 수차 희사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선도적으로 기부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정계를 떠난 뒤 무계는 장흥의 고택에서 조용한 야인으로 묻혀 살았다. 장흥읍 평화리에 있는 고영완의 가옥은 88년 3월16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무계의 증조부 고언주가 1852년에 건립하고 조부 고재극이 증축한 이 고택은 본래 정화사淨化寺라는 암자가 자리해 있었다고 한다. 이 고택은 一자형 겹집으로 남부지방에 흔한 목조 기와집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퇴를 둔 목조 기와 팔작지붕집이다.)

무계의 고택 앞에는 장흥군 수목군락지로 지정된 고영완 소유의 원림이 있다. 원림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는 섬이 있으며 둘레에는 소나무·느티나무·배롱나무·대나무 등이 숲을 이뤄 장흥 일대의 대지주였던 가세를 짐작케 하고 있다.

▲무계의 훈장들
▲무계의 훈장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투사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무계의 말년은 매우 고독했다.

뜻을 이해해 줄만한 지기(知己)가 없었으며 대화를 나눌만한 벗도 없었다. 하여 소주를 됫병 채 모아두고 마시며 오로지 서예와 당시(唐詩)를 즐겨 음미했던 무계는 1991년 8월 6일 고향인 장흥읍 평화리에서 77세의 일기로 타계했으며 평화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고영완 프로필>

⦁1914년 2월 11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89번지에서 출생(부친 고동석高東錫과 모친 백종규白鍾圭 장남)

⦁1925년 서석초등학교/1931년 중앙고보 졸업

⦁1932년 3월 김복현(金福賢)과 결혼

⦁1936년 일본센슈(專修)대학 수료

⦁1939년 12월 조선학생동지회 결성, 전라도 총책으로 여동생 고영남(고완남)과 함께 활동

⦁1941년 조선학생동지회 사건으로 여동생 고영남(인촌의 자부, 고완남)과 함께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1년 징역형 선고

⦁1944년 3월 함흥형무소 출옥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장흥지부장

⦁1945년 미군정하의 초대 장흥군수

⦁1946년 장흥중학교 설립시 답(沓) 100두락 희사

⦁1946년 11월 조선민족청년단 청년간부 훈련

⦁1947년 독촉국민회 및 민족청년단 장흥군 지부장

⦁1948년 5월 10일 제1대 민의원(국회의원)선거 낙선(전남 장흥군, 한민당)

⦁1948년 11월 5일 초대감찰위원회(감사원 전신)정보관 발령

⦁1949년 7월 위원장 정인보와 함께 사퇴

⦁1950년 5월 31일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선거 당선(전남 장흥군, 민주국민당)

⦁1954년 5월 2일 제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낙선(전남 장흥군, 민주국민당)

⦁1954년 장흥농업기술학교 설립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 중앙상무위원 및 조직부 차장 선임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낙선(전남 장흥군, 민주당)

⦁1960년 7월 31일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당선(전남 장흥군, 민주당)

⦁1960년 10월 25일 민주당 구파, 신민당 창당했으나 민주당 잔류

⦁1961년 2월 3일 민주당 내 신민당과 합당과 써클, 정안회(政安會)활동

⦁1961년 5월 16일 5,16군사정변으로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1963년 5월 9일 정치활동 해금,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1963년 8월 1일 범야정당(민주당 불참) 기타 자격으로 국민의당 발기인 참여

⦁1971년 5월 26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전남 장흥군, 신민당)

⦁1973년 1월 17일 신민당 지도위원 선임

⦁1982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1986년 6월 12일 국가유공자 대통령 표창

⦁1991년 8월 6일 소천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