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옛터 산책(5) - 선비가 숲을 이룬 고을 “장흥”(하)
■장흥의 옛터 산책(5) - 선비가 숲을 이룬 고을 “장흥”(하)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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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梁 基 洙/장흥향토사연구회장

<지난 제6호에 이어 계속>

■장흥의 위대한 선비들

선비들의 활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면 그 기개(氣槪)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장흥 선현들의 활동사항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위제(文緯世)는 그의 네 아들 원개(元凱) 영개(英凱) 형개(亨凱) 홍개(弘凱)와 사위 백민수(白民秀) 조카 희개(希凱) 등에게 의병을 모집하여 참여케 하고, 자신은 군량을 조달하여 전라좌의병군(全羅左義兵軍)이 성주성(星州城) 수복전(收復戰)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다.

당포(唐浦) 지포(芝浦) 남해(南海) 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변홍달(卞弘達) 홍건(弘建) 홍적(弘迪) 홍선(弘渲) 형제들과 종형제간인 홍원(弘源) 홍주(弘州) 홍제(弘濟) 홍량(弘亮) 홍주의 아들 덕황(德璜)과 홍건의 아들 덕장(德章).

그리고 홍적의 제종질인 연수(延壽)와 그 아들들은 초계변씨(草溪 卞氏) 일문으로 12의열(義烈)을 낳았다.

또한 위방(魏魴)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한산도 해전에서, 김세호(金世浩)는 대함 8척을 건조하여 명량(鳴梁)해전에서 역전 끝에 전사했다.

특히 우리 고을 회진(會鎭)에서 출전한 충무공 이순신과 마하수(馬河秀) 마성룡(馬成龍) 마위룡(馬爲龍) 백진남(白振南) 정명열(丁鳴說) 문영개(文英凱) 등을 비롯한 장흥의 선비들은 물론 상민들까지 의병으로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명랑대첩(鳴梁大捷)을 승리로 이끌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문과 급제자로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였던 정경달(丁景達)은 금오산(金烏山)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죽령(竹嶺)에 6진(鎭)을 설치하여 요격전을 펴 승리를 거두었다. 뒷날 정경달은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의 활동 또한 훌륭하였다.

▲고려시대 이전의 장흥지역
▲고려시대 이전의 장흥지역

이토록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일어선 선현들의 거룩한 넋은 한말이후 일제의 침탈 과정 중에도 국권(國權)을 되찾기 위한 애국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영엽(金永燁), 박중일(朴重一), 백경인(白景寅), 이남재(李南載), 위계룡(魏啓龍), 오일록(吳日祿) 등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 乙巳條約, 乙巳勒約)이 있자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운암 정두흠(雲巖 鄭斗欽)은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자(庚戌國恥) “나라가 망하여 죄가 많은데 죄를 받을 나라가 없으니, 선현을 따라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도다 (國破難容無救罪 莫如身死逐先賢)” 하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 부인 한씨(韓氏) 또한 “나라가 망하여 지아비가 세상을 버렸는데 나 혼자 살아 무엇 하리오.(國破夫死 吾何獨生)”하면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위석규(魏錫奎), 박호암(朴虎岩), 최종오(崔種五), 문병전(文秉詮), 김용관(金容寬) 등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가 하면, 김범식(金凡植), 김두환(金斗煥), 길인주(吉寅柱), 고서동(高瑞東), 위종관(魏鍾官), 유재성(劉載星), 문병곤(文秉坤) 등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야학을 실시하여 민족사관 확립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비밀결사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한 길양수(吉梁洙), 정진수(丁瑨壽), 정종배(丁鍾蓓) 등은 농민조직 확대와 소작쟁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학생동지회 책임자로 활동한 고영완(高永完)은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는 등의 간접적인 독립운동을 한 김정상(金正祥). 그리고 천도교 중앙경리부장을 지내던 김재계(金在桂)를 비롯한 천도교도 김재반(金在班), 황생주(黃生周) 등은 각 읍면별로 책임자를 지정 기미년(己未) 3월15일 만세운동을 하는 등 외적의 침입에 항거했던 선현들의 끊임없이 노력하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였다.

■ 유고집·문집 115권- 타군과 절대적 우위

▲고려시대의 장흥부
▲고려시대의 장흥부

이와 같이 장흥의 선비들은 어느 고을의 선비들 보다 사회의 양심이자로서 또한 지성인으로서 인격을 갖추어 각 시대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로서 또한 지성인으로서 책임을 감당해왔었다.

그런가 하면, 장흥은 지형적으로 산과 강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산물이 풍부한 관계로 타 지역에 비해 선비들이 문·사·철(文·史·哲)중에 문(文)에 치중하여 철(哲)과 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타 지역 선비들의 사조(思潮)와는 비교가 된다.

특히 영남지역(嶺南地域)의 선비들은 철(哲)과 사(史)는 지배 이데오르기에 입각하여 이성적 측면에서 인간의 성정(性情)과 생활규범을 탐색하려는 것이었다면, 장흥의 선비들은 문(文)에 비중을 두어 보다 감성적 측면에서 인간의 성정과 자연을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형상화 하는 경향이 무엇보다 강했다.

이러한 파악은 지난 90년대 초 전라남도내 각 고을에서 선현들이 남긴 유고집(遺稿集)과 문집(文集)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흥관내 선현들의 유고집과 문집이 인근 고을에서 조사된 문집보다 2∼3배가 많은 수량인 115권여가 조사되어 이를 반증하였다.

세속에 명리를 좆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올바른 도(道)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 곧 선비이다.

사회의 근본을 지탱하는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시대에 우리가 당면한 현세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명쾌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참된 선비가 누구인가?

인간의 정신활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새로움과 진보적 가능성은 그 집단 운명의 고전적 전통에서 출발했을 때에만이 보장 받을 수 있다.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부족과 민족의 정신사에 대한 홀대가 그 문화를 병들게 하거나 외국문화를 수입한 것으로 끝내거나 이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문화에 얼이 빠지게 하는 경우를 우리 종종 보아왔다.

■예부터 선비고을로 서남해지역 선도

우리 장흥은 예부터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어우어진 살기 좋은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또한 한반도 서남해 중심에 위치하여 서남해지역의 행정을 선도하는 선비의 고을이었다. 이즈음에서 장흥인들은 이를 다시 한 번 상기하여야 할 때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동시지방선거에 지역의 발전을 위해 주민을 대표하여 서로 일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옛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처사(處士)라도 선비로서의 기개(氣槪)를 잃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며 사회의 공론(公論)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보여 왔던 것처럼 우리 장흥인 모두는 선비의 후예로서 지역의 발전을 위해 공론을 모을 것이다.

당선된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또한 행정운영의 감시자인 의원으로써 제발 그 본분을 잊지 말고 모아진 군민의 공론(公論)이 무엇인가를 수시로 파악하여 공론(空論)이 되지 않도록 이를 겸허하게 받아드려 주민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朝天♣

▲고려시대 이전의 장흥지역

▲고려시대의 장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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