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역사유산(3)-장흥도호부(하)
■장흥의 역사유산(3)-장흥도호부(하)
  • 김선욱
  • 승인 2019.05.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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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고려 인종∼조선 말, 전남 서남부의 유일한 부사고을(하)
 ▲고려사 지리지의 장흥부의 수령현 기록(위 오른쪽 가운데서 장흥도호부,
끝줄에 수령현, 아래 오른족에부터 화령현(전 보성군 회천면 일원),
장택현(현장평면 일원), 탐진현(현 강진 일부) 기록이 보인다
▲1872년도 장흥부 지도

 

<<본지 제40호(2019년 4월10일자)의 장흥의 역사 유산<2>-장흥도호부(상)에서 계속된 장흥도호부의 기록이다-편집자 주>>

ㅇ 고려사 지리지의 장흥부와 수령현 기록(위 오른쪽 가운데에 장흥도호부, 끝줄에 수령현, 아래 오른쪽부터 회령현(현 보성 회천면 일원), 장택현(현 장흥 장평면, 장동면 일원), 탐진현(현 강진 남부) 기록이 보인다.
조희문의 뒤를 이어 유충정이 장흥부사가 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도 있다. 『미암일기』의 장흥부 관련 기록을 발췌한다.

‘미암일기’ 일부 발췌

- 1567년(선조 즉위녀 정묘) 11월 29일 : ○ 장흥부사 조희문(趙希文)이 사람을 시켜 백미 열 말, 콩 닷 말, 낙지 두 속, 소금 친 전복 50개, 참깨 너 말을 보내왔다.(장소 담양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초3일 : ○ 장흥부사 조희문이 사람을 시켜 문안을 왔다.(장소 : 영암군)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초6일 : ○ 장흥부사 조희문의 먹을거리와 술과 안주를 들고 왔다. 김성주와 셋이 앉아서 마셨다.(장소 : 해남현, 12월 4일 해남 도착)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초7일 : ○ 장흥부사 조희문이 새참에 성주와 함께 와서 모여 술을 마셨다. 수사 박해와 강진현감 김응식(金應軾)도 와서 참여를 했다. 장흥
부사가 준 것이 쌀 두 섬, 콩 한 섬이요, 또 어육 등 모든 반찬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날이 저물도록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진현감 김응식이 준 것
은 중미와 콩 각 한 섬, 상품의 술 한 동이, 중품의 술 한 동이, 생전복 70개, 생꿩 다섯마리, 산물고기 일곱 마리, 감태 20동, 전복 한 접이었다.(장소 : 해남현)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18일 : ○ 경염((柳景濂, 1539~1603, 유희춘 아들)이 장흥부사 조희문의 부름을 받고, 그 부(府)로 갔다.(장소 : 장흥부)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23일 : ○ 해가 기울 무렵에 장흥에 들어가니 부사 조희문이 예를 극진히 했다. 경염이는 며칠 전부터 와 있으면서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다
고 한다. 장흥부의 사람 이의(李義), 그리고 부사의 조카 조윤(趙倫)은 장흥의 훈도이고, 남원의 선운사 유생은 부사의 오촌 조카인데 와서 보았다. 강진의 오팔원(吳八元)도
왔다.(장소 장흥부) ○ 해남의 첩이 머슴을 보내 편지를 가지고 왔다. ○ 김인후(金麟厚)가 나에게 준 두 시(詩)를 그 문집 교정(校正)한 곳으로 써서 보냈다. ○ 이의가 다시 왔다. ○ 부사 조희문이 경염을 후하게 생각해주어 은의(恩意)가 지극히후했다. ○부사가 관세목(館細木, 館用 가는 무명베) 다섯 필을 주니, 내가 옥당선생(玉堂, 홍문관)
선생이라해서 그런 것이다.
- 1567년(선조 즉위년, 정묘) 12월 24일 : ○ 오경(五更, 오전 3시~5시)에 변소에 갔다. 어제 찬 생석화(굴)를 먹었기 때문이다. ○ 감귤 20개와 껍질 있는 전복 20개를 장성의
며느리에게 보냈다. ○ 들으니 명나라 사신이 이번 달 10일에 북경을 떠났는데, 먼저 알리러온 통사가 이미 서울에 이르렀다고 한다. ○ 들으니, 장흥부사 조희문의 선조는
고려 말에 문관으로 부여현감을 지냈는데 장차 역성(易姓, 국왕의 성이 바뀜)이 될 것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하나의 기(記)를 지었다 한다. 우·창(禑·昌) 두 왕이
공민왕(恭愍王)의 자손인데 정도전(鄭道傳)이 신돈의 간음을 무함한 것이라고 통변(痛辯)을 했으며, 자손들에게 열어보지 말라고 경계를 했는데, 그 뒤에 자손이 함양에 살면
서 열어보고 후환을 염려하여 태워 버렸다고 한다. ○ 아침에 세 번이나 변소에 갔다. 호초탕(胡椒湯)을 마셔 속을 덥게 했다. 새참에 아헌(衙軒, 관아 안집)에 나아가 부사의
대부인 앞에 이름을 들여보냈더니 부사 조희문이 내당(內堂)으로 맞아들였다. 대부인은 나이가 78세인데 말소리가 낭랑하였고 조희문의 아내도 나와서 봤다. 서로 말을 주고받
았는데 그녀는 바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 1560)의 딸이다. 내가 일찍이 조희문에게 장례(葬禮) 때 석회(石灰)를 부조해준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승당(升堂(당에
올라 拜親을 함)의 약속을 이루었으니 기쁘다. 조희문이 「논어(論語)」 일곱 권을 주었다. 추위를 무릅쓰고 갔는데, 이날의 추위는 물이 얼 정도였다. 25리를 가서 만숙원(晩
宿院)에 이르렀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신사년(辛巳年, 1521) 가을 9월에 선친을 모시고 순천으로부터 여기에 이르러 만숙원의 이름을 풀이하기를 ‘만인(萬人)이 모두 와서
잔다 해서 만숙원(萬宿院)’이라고 했더니 선친이 칭찬하고 감탄하셨었다. ○ 날이 저물려고 할 때에 보성에 도착하였다. 군수 정인관(鄭仁寬)이 나와서 영접을 하므로 나는
들어가라 하고, 내가 동헌에 이르러 서로 보기를 청했다. 생원 조서(曹澨)도 참석을 했고, 저녁참에 율목경차관(栗木敬差官) 봉상봉사(奉常奉事) 겸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인 나주의 이유근이 낙안(樂安)에서 왔다. 셋이 앉아 대화를 했는데 자(字)를 물어보니 택가(擇可)라 하고, 나이를 물어보니 계미생(癸未生, 1523)이다. 또 들으니 신숙주(申叔
舟) 상공(相公)의 외손이라고 하니 우리 족(族, 같은 외손이라는 말)이요, 또 그 아내는 곽한(郭翰)의 딸이라고 하니, 나에게 구촌(九寸) 조카사위가 된다. ○ 오늘 만숙원(晩宿
院)에 도착하여 또 설사를 했다. 어제 석화회를 먹은 것이 후회스럽다. ○ 들으니 이관(李瓘)의 할아버지의 비명(碑銘)이 우리 외할아버지 최부(崔溥, 1454~1504) 어른께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땅히 찾아서 문집에 넣어야겠다. ○ 이날 아침에 장흥에 있는데 부사 조희문이 자리 열 닢과 빗첩 하나와 꿀 한 말과 멥쌀 한 말을 나의 첩 집에 보내주
었다. ○ 전 남원부사 안축(安舳)의 집에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았다. 정자 임백균(任百鈞)의 집이 길가에 있어 쉬어 갈 만하다. 임 군도 몹시 바라고 있다고 한다. ○ 장흥부사
가 나의 청으로 첨사 문량(文亮)의 처 윤씨와 임정해(林正海)의 처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또 이의(李義)의 집에서 사위를 맞기 때문에 부조로 참깨 두 말을 주었다. ○ 보성군
수 정인관이 「춘추春秋」한 벌과 흰 사슴가죽 신 한 켤레를 노자로 주었다.
- 1568년(선조 1, 무진) 정월 초9일 : ○ 장흥부사의 답장이 왔다. ○ 정읍(井邑)에 있을 때에 조장흥(趙長興)의 편지를 보았다. 초9일에 비로소 감사監(司)의 관문(關文)을 보
았는데 집안에 전염병이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장소 : 정읍)
- 1568년(선조 1, 무진) 정월 25일 : ○ 장흥부사 조희문(趙希文)에게서 편지와 깨서 말·생전복 50개가 왔다. 이는 작년 10월에 보낸 것이다.(장소 한양)
- 1568년(선조 1, 무진) 2월 15일 : ○ 공조좌랑(工曹佐郞) 김경헌(金景憲)이 찾아와 하는 말이 모친의 병환이 위급하여, 내일 장흥(長興)으로 간다고 했다. ○ 장흥부사長興
府使 조희문(趙希文)이 백지 열 권과 부채·빗 등의 물건을 보내왔다.
- 1568년(선조 1, 무진) 2월 27일 : ○ 장흥부사 조희문이 별선(別扇) 한 자루와 상선(常扇, 보통 부채) 두 자루를 보내왔다.
- 1568년(선조 1, 무진) 2월 10일 : ○ 전라감사全羅監司가 편지를 올리기를,“도내의 등용되지 못한 선비를 천거하라시는 공문이 이르렀기에 수령들에게 통지를 하여 알아보
라고 했더니, 나주목사羅州牧使 한복(韓輹)이 보내온 편지에,‘생원 나사침은 .... 생원 김응기(金應期)는 .... 그리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조희문(趙希文)의 첩牒(공문서의 하나)에
는 말하기를, ‘진사進士 유호인(劉好仁)은 성격이 본시 순수하고 진실하며 신중하고 말이 적고, 식견이 올바르고 의론이 명백하여 몸가짐과 남을 대함이 모두 법도가 있고, 중
년 이후로는 과거에 뜻이 없어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지만 태연하게 처하여 걱정을 아니하고, 고을에서도 처신을 함이 남보다 심히 다르게 하지도 않
지만 또한 구차하게 합하지도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성부(城府)에 이르지 아니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인재를 양성하기도 많이 했고, 용모와 말이
남에게 추양을 받을만하여 그의 겉만 보아도 속을 짐작할 수 있다합니다. 또 유학(幼學) 김윤(金胤)은 성격은 본시 청렴 고상하고 소탈하여 자신을 굽히지 아니하고 시詩 읊기
만을 좋아하며, 모습이 호방하고 과문(科文)의 법규를 닦지 아니하므로, 여러 번 낙방하였지만 시속을 따르거나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두어 칸의 초가집에서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어 남들은 그런 고통을 참지 못하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찍 모친상을 당했는데, 죽을 마시며 시묘를 살고 한번도 집에 가지를 않았
고 이제는 부친상을 당했는데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더욱 애통해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교하시기를,“나사침 등의 행실이 지극히 가상하니 포장(襃獎)할 일을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대신들과 논의케 하라”라고 하셨다.
- 1568년(선조 1, 무진) 2월 8일 : ○ 장흥부사 조희문이 새로 인출한「하서자집(河西子集)」일곱 권을 보내왔다. 지극한 보배를 얻은 것처럼 기쁨을 말할 수가 없다.
- 1568년(선조 1, 무진) 2월 23일 : ○ 전라어사(全羅御史) 구봉령(具鳳齡)의 장계를 보니 “도내 수령들의 치적을 들어보니 무안현감 송정순(宋庭筍)이 ... 장흥부사 조희문은
모든 조치를 알맞게 잘하여 백성이 매우 편하게 여긴답니다. 해남의 백성들은 현감 이사영이 .... ”했다.
- 1569년(선조 2, 기사) 12월 18일 : ○ 장흥부사 유충정(柳忠貞)의 사통문(私通文)이 왔다.
- 1569년(선조 2, 기사) 12월 19일 : ○ 장흥부사가 보낸 것이 정미 두 섬, 새콩 두 섬, 청주 두 동이, 참기름 한 말, 들깨기름 한 말, 꿀 다섯 되, 생노루 한 마리, 말린 숭어 열 마
리, 소금친 은어 50마리, 생전복 40개, 생꿩 세 마리, 생낙지 네 속, 누룩 세 동, 백지 열권이었다. ○ 새참에 장흥부사 유충정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술대접을 했다. 그리고
생원 임집이 그 부(府)의 촌가(村家)에 머물고 있는데, 먹을거리를 도와줄 것을 청하고 또 달리기를 잘 하는 자를 시켜 강진으로 서신을 보내줄 것도 청했다.
- 1569년(선조 2, 기사) 12월 21일 : ○ 아침에 장흥부사 유충정 공이 「예기천견(禮記淺見)」 11권과 「하서집(河西集)」 □권과 소금에 절인 은어 40마리를 보내왔다.날이 저물
어 나도 잠시 답례를 하고 객들이 모두 갔다.
- 1570년(선조 3, 경오) 11월 19일 : ○ 장흥부사 유충정의 집을 보살펴달라고 부탁을 하고, 또 이중열의 종 억이(億伊)와 막동(莫同)의 완문(完文)도 만들었다.
- 1570년(선조 3, 경오) 12월 27일 : ○ 장흥부사 유충정(柳忠貞)이 전복 60개를 보내왔다.
- 1571년(선조 4, 신미) 정월 9일. : ○ 강진 지령리(至寧里)에 사는 사노(私奴) 손석(孫石)은 윤사민(尹師閔)의 종이다. 와서 말하기를 “장흥 지령리(至寧里)에 수원(水源)이
있는 묵은 땅이 있어 논을 칠만하므로 이미 윤관중(尹寬中)의 말을 듣고 장흥부에서 입안(立案)을 받아놨습니다”하며 그 주인 사민이 진주의 금곡(金谷)에 살고 있어서 이를
살 수 있으니 개간하면 자기가 농장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내가 천천히 사람을 보내 형편을 알아보고 명년에나 해볼까한다
- 1571(선조 4, 신미) 정월 19日 : ○ 장흥부사 유충정(柳忠貞)이 식물(食物)과 집 짓는 것을 도와주는 물건을 보내왔는데 쌀, 콩이 각 2석, 대해의(大海衣) 3첩(貼), 중해의(中
海依) 20첩, 분곽(粉藿) 3동(同), 감곽(甘藿) 10동, 밴대기 젓갈 2두, 백하(白蝦) 1두, 건잡어(雜乾魚) 10속(束), 참기름 1두 약청 5승(升)이다. ○ 쌀 1석, 해의(海衣) 2첩, 청 2
승, 기름 2승을 오자(吳姉)에게 드렸다.
- 1571년(선조 4, 신미) 정월 초3일 : ○ 이날 장흥부사 유충정이 나의 비밀 시달로 인하여 일을 잘 조치하고 해남에서 간부(奸夫)로서 남편을 죽인 적을 잡아왔으니 아주 통쾌
한 일이다. 간부는 바로 남편 거역(去逆)을 죽인자다.
- 1571년(선조 4, 신미) 7월 23일. : ○ 조보(朝報)를 보니 이달 16일의 정(政)으로 장흥부사 만(望)에 윤복(尹復), 신련(辛璉), 정인관(鄭仁寬)이 들어 정이 점을 받았다. 유충
정이 헌부(憲府)의 논계(論啓)를 당해 파직되었다고도 했다.
- 1573년(선조 6, 계유) 2월 23日. 개임. ○ 장흥부사 정인관이 전복 1첩, 저포 4첩, 감태 15주지, 해의 3첩, 백지 5권을 보내왔다. 일찍이 소가의 어려움을 구해줬단 말도 들었
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대동지지(大東地志)』,『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왕조실록사전』, 『미암일기』(국역, 담양군),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김정호, 1988.), 『장흥군지』(장흥군지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지』(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1993.),『대한민국 행정지명1-전남·광주편』(윤여정,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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