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반곡 정경달(5)-반곡 정경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학(4)
●역사인물-반곡 정경달(5)-반곡 정경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학(4)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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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 정경달, 조남명 문인 천방 유호인에게 학문‧作詩 익혀
반곡, 행장서 ‘일자지은 무비공지덕야一字之恩 無非公之德也’
“한 글자라도 알게 된 것은 모두 천방의 은덕이 아닐 수 없다”

반곡 정경달과 찬방 유호인

반곡 정경달 선생에게 아주 큰 스승이 있었으니, 바로 천방(天放) 유호인(俞好仁, 1502∼1584) 선생이었다.

반곡은 1542년 생으로 천방과는 40세 차이가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반곡은 16세 때 천방의 제자가 되어 성인이 되어 과거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천방의 문인으로 수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천방 선생의 자(子)는 극기 (克己)요, 자호(自號)는 산당(山堂)이며, 임금에게 받은 사호(賜號)가 천방(천(天)放) 이다. 천방은 일찍이 진사에 등제한 후 누차 징사(徵士)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영남의 남명 조식(南冥 曺植), 퇴계 이황(李滉) 선생을 찾아 수학과 강론만을 거듭하다 낙향하였다. 만년이던 68세 때 고향인 장동면 연하동(煙霞洞) 선영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며 후학 양성에만 진력하였다.

선생의 문하에서는, 문과 급제 후 목사(牧使)에 이른 반곡 정경달을 비롯하여 생원으로 참의(叅議)에 이른 청계 위덕의(聽溪 魏德毅), 진사로 현감에 이른 용호 문희개(龍湖 文希凱), 생원과 동당시 대과에 입격한 만수재 이민기(晩守齋 李敏琦) 등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천방 선생은 당대 장흥의 최고의 사표(師表)였으며 대학자였던 것이다.

반곡 선생의 ‘후록’ 등에도 천방이 반곡의 스승이었음을 나태내고 있다.

반곡집 후록들-반곡의 사승관계 적시

“천방 유호인에게서 수학하였다(受業于千放好仁-<반곡시문집>2, 묘갈문)” “천방 유호인과 도의로 사귀었다(우(又與柳千放, 爲道義交-<반곡시문집>2, 정씨 삼대 起義詩 幷序)” “어려서 향리의 선생인 유호인(劉好仁)에게 배웠는데, 유호인은 남명 조식의 집우(執友-뜻을 같이하는 벗, 여기서는 반곡의 벗을 가르킨다)이다. 그 사우(師友)의 연원을 진실로 볼 수 있으니, 평소 감화되고 절차탁마하여 그 덕을 이룬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少從鄕先生劉千放好仁學, 劉公卽曺南冥執友也, 其師友淵源, 固自可見, 而平日所以濡染切磨 -<반곡시문집>2, 정인하 ‘실기’ 347면)”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정인하의 ‘실기’에서는 반곡의 스승 천방 유호인이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덕이 그만큼 높았을 것이므로,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 반곡 또한 위대한 덕을 이룬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반곡의 행상(行狀)에서는 천방과 반곡의 사승관계가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동향 사람 유호인 선생이 조남명(曺南溟)의 문하에서 득도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 공(반곡)이 가서 배알하고 학문을 청하자 유공이 말하기를 ‘성리(性理)의 학문이 있고, 과시(科試)의 학문이 있는데 배우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하니 공(반곡)이 말하기를 ‘과거는 우연히 찾아오는 물건이니, 청컨대 성리(性理)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유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서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대학(大學)을 배울 나이다’ 라고 하고서 대학을 전수하였다. 공은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장에 이르러 침잠하고 완미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있는데, 학문을 시작한 날에 학질이 나았다. 이로부터 학문이 나날이 점점 전진하고 견식이 더욱 넓어졌으며, 마침내 사문(斯文-유학자)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반곡시문집>2, 행상(行狀) 일부, 313쪽)

반곡의 年記-더 구체적 묘사

<반곡집>의 ‘연기(年記)’에서는 반곡이 천방 문하에 들어가 공부한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16세. 정사(丁巳, 1557). 처음 천방 유 선생(유호인)에게 나아가 모시(毛詩-시경詩經)를 배웠다. (시경은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았다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이다. 본래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하며,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다. 시경에는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은데,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평가도 높으며, 상고의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 원래는 사가소전(四家所傳)의 것이 있었으나 정현(鄭玄)이 주해를 붙인 후부터 ‘모전(毛傳)’만이 남았으며, 그때부터 시경을 ‘모시(毛詩)’로도 불렀다)

유 선생은 남명 조 선생(휘는 植이고 자는 건중建仲이다)의 문하에서 배워 성리학을 깨우치고서 후배들을 가르쳐 온 고을의 사표가 되었다. 공이 가서 배우기를 청하자 선생이 ‘성리 공부가 있고 과거 공부가 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어떤 공부인가?’고 물었다. 공이 ‘과거는 제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성리를 배우길 청합니다.’ 라고 말하자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안우(安宇)와 함께 모시(毛詩, 시경)를 배웠는데, ‘북산지십(北山之什)’에 이르러서는 안공이 따라오지 못하였다.(시경 305편은 풍風, 아雅, 송頌 등 셋으로 크게 분류되고 다시 아雅가 대아大雅, 소아小雅로 나뉘는데 ‘북산지십’은 시경 중 ‘아-소아’ 부분의 시다)

공이 모시를 마친 뒤에는, 또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었다.

사장(詞章-시가와 문장)이 날로 발전하자 하루는 큰형 백씨(伯氏-남의 맏형)와 인중(仁仲)과 더불어 목면화(木綿花) 시를 처음으로 지으니, 그 이연(二聯)에서 “매화와 국화가 곱디고우나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니 어이하리오. 치의(緇衣)와 백의(白衣)는 해지면 고쳐 입으니 부유한 이 비단 옷을 어찌 부러워하리((梅花菊花雖嬋娟 不衣不食當如何 緇衣白衣弊又改 何羨富人爲綺羅)”라고 하였다.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앞으로 공부를 크게 이룩하여 여러 사람들의 으뜸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다.

공이 또 사산부(獅山賦)를 지었는데 “용이 일어나서 일천 봉우리요, 봉황이 날개짓하니 일만 고개로다(龍起立兮千峰 鳳翶翔兮萬嶺)” 하였고, 또 “새는 봄 숲에서 지저귀고 스님은 바위언덕에 또 둥지를 트네(鳥有聲於春林 僧亦巢於巖阿)” 라고 하였더니 선생이 역시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공은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니 선생이 걱정하였다. 12월에 과연 큰 병을 얻어 한 달간 앓았는데, 공은 오히려 부모가 근심할까 걱정되어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반곡 정경달 시문집1>, 345∼346면)

<반곡집>의 ‘연기’에 의하면, 선생은 천방 문하에서 유학과 성리학이며 특히 작시(作詩)를 제대로 수학하게 된다.

18세 되던 해(1559년)의 ‘연기’에 의하면 “매일 시를 지을 때마다 항상 3수를 지어 그 중 잘된 것을 가려 쓰니, 유 선생이 그가 그런 뜻에 기뻐하였다(每日, 作詩常作三首, 擇其善者而, 劉先生喜其有志)”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반곡선생이 그토록 많은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천방 문하에서 제대로 작시 공부를 하였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

반곡, 천방의 ‘행장(行狀)’ 쓰다

생전에 행장(行狀) 등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던 반곡 선생이, 유독 천방 유호인 선생에 대한 행장을 남긴 것은, 그만큼 사제지간의 정이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유추하게 된다.

천방 행장을 통해 우리는 반곡의 천방 공에 대한 생각과 그 깊이를 가늠하게 된다.(<천방선생문집>)

“나는 유년부터 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업을 성취하고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한 글자라도 알게 된 은혜는 모두 공의 덕이 아닐 수 없다. 공께서 만년에는 나를 제자로 대하지 않고 벗으로 대해 매양 찾아뵐 때마다 난의(難疑)한 학문의 문답으로 날이 저문 줄 몰랐고, 때로는 밤도 새웠다. 이렇게 왕래를 계속하는데, 어쩌다 여러 날 왕래를 끊으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 불러서 강론(講論)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벼슬살이에 스승님을 오래도록 못 뵈었는데, 계미년(1583년)에 이르러 평양부윤에 부임하니 또 천리나 멀어졌다(이봉준 국역).(自髫年受學於門下 學業成就 早忝科第 一字之恩 無非公之德也 晩年不以門弟待我 而與之爲友 每進見之際 難疑答問 不知日暮 或至夜分而罷 是以往來不絶 曠日不去 則必送 人招之講論不懈焉 一自宦遊 久違函丈 逮至癸未 尹于箕都 又隔千里矣)”

여기서 우리는 반곡이 어렸을 때 학업 외에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천방과 깊은 유대로서 교유해왔음을 알게 된다.

또, 행장의 말미에서, 반곡은 천방 선생의 시편 100여 수를 수습하여, 이를 필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밝히고 있어, 두 분의 진한 우의와 친밀도를 가늠하게 된다.

“사위들은 학식이 부족하고 외손들은 모두 어리니 선생의 저술들이 어찌 남았겠는가. 그 상황에 어찌 전수되기를 바라리오. 내가 소장한 약간편도 병란 중에 유실되고 행구(行具)에서 찾아낸 것이 소시(小詩) 백여 수뿐이나, 공의 사업이 장차 행적도 없이 무전(無傳)될까 싶어 서사(書寫)하여 제가(諸家)에 나누어주고 대학도(大學圖) 일질(一帙)은 내가 비록 윤색(潤色)하였으나 그 근원은 공이 가르친 것이다. 그것도 아울러 붙였으니, 바라건대 후학들에게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이봉준 역)(諸壻無學識 外孫皆幼 無有藏其著述者 則況望基傳受乎 余所藏略干篇 亦失兵火中 搜見行橐 則只小詩百餘首 公之事業 將泯滅無傳 故 書以付諸家 大學圖一帙 雖余潤色 而其源出於公之指南 故並附之 庶幾爲後學之一助)”

이 대목에서는 반곡이 소장하고 있던 시 1백여 편을 직접 수습하고 필사하여 제가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훗날 천방의 유고가 남아지고 천방공 문집이 발간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반곡의 천방 선생에 대한 관심도가 어떠하였는지는, 반곡의 아들 정명열(丁鳴說, 1566∼1627, 반곡의 아들. 일찍이 부친 반곡 공에게 견지堅志하여 학문을 닦으니 그 학문은 우수하였다. 1606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인조반정 때 북향北向 정제正齊하고, 이괄란 때 창의倡義하였다. 경상도사에 특제特除되었으나 사직하고 후학교육에 진력했다. 1774년 반계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제암집霽岩集이 있다)이 천방 유고에 ‘추록(追錄)’을 남긴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천방공문집>231면∼236면)

반곡의 아들, 정명렬도 천방 ‘추록’ 써

정명렬은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천방공을 뵌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신장이 8∼9척이 수염이 2척 여가 되었다. 엄연히 단정하게 앉아 계시는데, 음성과 용모가 선랑(仙郞-용모가 수려한 자, 신라 화랑에서 유래된 표현)하였다. 책상 위에는 다른 책은 없었고 ‘사서혹문’(四書或問-송나라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저서로, 유학의 사서를 연구한 장구章句나 집주集註 등과 같이 학문적으로 의문이 있을 수 있는 경우를 가정하여 문답식으로 지은 책), ‘중용中庸’ ‘대학大學’ ‘소학小學’ 등 수십여 권이 놓여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어 그는 “나의 부친은 공에게 수학한 은혜를 잊지 못하고 항상 그때 배워 얻는 바를 생각하여 불초인 나에게 가르쳐 주며 그 학업이 무전(無傳) 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연하동(煙霞洞- 천방의 거처지)에 고을을 대표할 만한 큰 서당을 지어 모든 선비들이 선생을 경모하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만들려 한다’고 하였으나 벼슬살이가 길어지고 병란이 계속되니 종내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년에는 선생의 출처(出處)를 약술하고 끝에 선생의 소시(小詩) 백수와 대학도 1권을 붙여서 불초인 나에게 이르길 ‘대학도는 비록 내가 소장하지만 그 근원은 유(劉) 선생에게 나온 것이라 같이 붙이니 너는 그 점을 잊지 말고 식자(識者)를 만나거든 보이도록 하라’고 하였다.(<천방공문집>231면∼236면)”

이밖에도 그의 추록에는, 천방 선생을 배향한 예양서원(설립 당시는 사우당祠宇當)을 조성하게 된 동기며, 그 자신이 사우당의 초대 원장이 된 내력도 적혀 있다.

또 반곡이 1600년에 천방에 대한 행장을 지어 그 행장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가, 여러 우생들이 천방의 행장 없음을 한탄할 때, 부친이 쓴 천방의 행장을 선사(膳賜)하였다는 사실도 명기해 놓았다.

이처럼 천방선생은 반곡은 물론 반곡의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던 당대 장흥 고을의 큰 사표였던 것이다./김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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