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연하동의 성리학자 천방(天放) 공을 재조명한다
■사설-연하동의 성리학자 천방(天放) 공을 재조명한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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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天放)은 조선조 장흥에서 유일한 학맥學脈을 일구었던 인물이었다

1502년에 태어나 32세가 되던 1534년에 진사에 급제한 후, 재야의 학자‧선비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 양성에 전심으로 기울이다 1584년 82세로 별세하였던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선생.

그는 조선조 장흥의 인물사에서 거봉(巨峯)의 한 사람으로 우뚝 솟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관직에 나아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수많은 저서를 남긴 것도 아닌 그가, 왜 장흥 인물사에서 거봉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로 입지하는 것인가?

첫째, 그는 당시 최 변방이나 다름없던 장흥 출신의 인물로, 당대 성리학을 풍미했던 최고의 학자들인 남명(南溟) 조식(曹植),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을 비롯하여 중앙의 수많은 최고위급 석학들과 막역지교(莫逆之交)로 교유(交遊)하며 함께 강론하기도 하며 자기 학문세계를 일구었으며, 나중에는 그도 부족하다 여겨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이 되어 학문을 지속적으로 탐구하였던, 모범적인 재야의 대학자였으며 대선비였다.

둘째, 그는 당시 최 변방인 장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맥을 이룬 대학자였다.

그는 1대인 자신의 학문세계를 2대인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을 비롯하여, 청계(聽溪) 위덕의(魏德毅, 1540-1613), 용호(龍湖) 문희개(文希凱, 1550~1610), 앙지(昻之) 김지주((金砥柱), 증집의(贈執義) 이섭(李暹) 등을 문인으로 거둬 자신의 학맥을 이었으며, 3대라 할 수 있는 반곡의 손(孫) 유덕명(劉德明)을 위시하여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 1646-1704)도 그의 학통을 이을 수 있게 하였던, 소위 장흥에서 3대에 걸쳐 학맥(學脈)을 이루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셋째, 천방 선생은 어릴 때부터 효동(孝童)으로 불리울 만큼 효성이 대단하였고, 평생을 검약정신을 실천하였으며, 기우제 봉행 시 자신을 분신(焚身)하려는 의지를 가졌을 만큼 이웃과 민족에 대한 열정적인 인애(仁愛) 정신의 본을 보이고 덕행을 보여준 당대의 대표적인 사표(師表)로서 그리고 인격자로서 모범을 보여준 선비였다.

넷째, 수백여 편의 시(詩) 중 전란 때 거의 유실되어 100여 편만 남긴 그의 유작 시(詩-漢詩)들은 그가 한시(漢詩)의 거봉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방의 시에 대해 현대 문학의 거봉으로 소설가며 시인인 한승원은 “천방은 나그네 시인도 아니고, 자연 풍광을 상대로 음풍농월만 일삼는 시인도 아니고, 임금에게 벼슬을 달라고 아부아첨하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베개의 눈물 적시는’ 따위의 시를 쓰는 시인도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소박한 유학자로서 서민들과 함께 살면서 사물을 통해 인간사를 비유하고 풍자하여 독자를 깨닫게 하는, 깨어있는 세상 정화의 시인이다’고 평했다.

선생은 평생을 처사(處士)로 살았지만 이처럼 선생이 일군 학문과 시인으로서 생애, 유학자의 표본인 선비로서 실천적 삶을 보여준 덕행‧덕망으로, 그는 사후에 더욱 존중받았으며, 후인들의 선생에 대한 이러한 흠모와 존중은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을 비롯하여 장성의 송계사(松溪祠), 순천의 월계사(月溪寺) 등 3곳 서원에서 선생을 향사해 올 수 있게 하는 진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천방 선생.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가장 이상적인 선비로서 삶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명리(名利)을 쫓거나 탐하지도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식량을 계속 잇지 못하는 등 빈궁한 삶이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였고, 서가에 서책을 가득 쌓아두고 독서를 즐기며 근심을 잊었으며,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에 2회나 제수되기도 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도백이나 수령들이 선생을 방문하면 그들이 머무는 동안 학문만 강론할 뿐이며, 단지 종이나 붓 등의 예물은 거두었으나 감히 쌀이나 포(布)등 예물은 취하지 않았다. 혹 재화를 두고 간 자가 있으면 바로 불러서 돌려보내곤 하였다. 도(道)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던 선생의 지조(志操)를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호방하였고, 담대하였으되 풍류도 즐겼다. 그는 참으로 자유인이었다. 선생의 풍류적인 삶, 호방한 선비로서 삶이 잘 드러난 것으로, 국담(菊潭) 임희중((任希重)의 천방에 대해 쓴 시가 있다.

“아침에 집나가 놀면 정(鄭) 나라 기동(奇童) 풍류요(鄭나라 풍류=음탕한 음악)/저물어 건산(巾山-지금의 장흥읍 건산리)에 돌아와 자면 유처사(劉處士)라네(朝遊門外奇童鄭/暮宿巾山處士劉)”

그러면서 선생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이던 성리학에 심취하여 학문 탐구에 간단없이 매달렸다. 평생을 걸쳐 학구열(學究熱)에 넘쳐났던 천방이 70여 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학문에 한계를 느끼고 당대 최고의 학자였지만 자신보다 34세나 어렸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찾아가 율곡과 사승관계를 맺고 율곡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했던 데서 우리는 선생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불치하문(不恥下問)‘과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선비의 표상이던 ’강학논도(講學論道) 정신‘에 투철했던, 사림(士林)의 진정한 선비요 학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선생은 이처럼 조선조 장흥이 낳은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장흥인의 진정한 사표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제라도 천방 공에 대한 조명사업을 추진하려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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