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역사인물(6)/天放 劉好仁 천방(天放)의 삶과 그리고 학문‧시문학(1)
■장흥의 역사인물(6)/天放 劉好仁 천방(天放)의 삶과 그리고 학문‧시문학(1)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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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석학 조식-“천방은 내게 넘치는 벗”이라며 교유(交遊)
성리학 최고봉 이황(李滉)-“천방은 호남 제일의 선비”라고 인정
율곡(栗谷) 문인 돼-천방 귀향 때, “내 道가 남으로 간다” 탄식

 

천방 선생의 묘소(중앙)-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천방 선생의 묘소(중앙)-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1)천방 선생의 생애를 고찰한다

장흥 출신 성리학자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1502∼1584). 그의 자(字)는 극기(克己)이고 임금으로 받은 사호(賜號)는 천방(天放)이고, 우호(又號)가 산당(山堂)이다.

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 보자,

*1502년 장흥읍 건산리에서 태어나다

*1534년(32세) 진사에 급제하다.

그러나 선생은 과업을 포기하고 처사(處士)로서 삶을 고수하다. 성리학(性理學)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찾아가 그들과 교유(交遊)하며 학문에서 전념하다.

*1552년경(50여세) 고향으로 돌아와 장동 연하동(煙霞洞) 선영 곁에 초가를 짓고 은거하다

*1570∼1573년(68-71세) 선생이 70여세일 때 34세나 연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찾아가 사승(師承) 관계를 맺다.

*1574년(72세) 가뭄으로 기우제를 명받고 섶단에 올라가,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르려는 정성으로 기도하여 비를 얻었다. 이러한 선생에 대해 임금은 ‘하늘에서 그를 죽음에서 석방했다’고 하여 선생에게 ‘천방(천天放)’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당시 장흥부사는 통정무(通政武) 송중기(宋重器, 재임 1574.4∼1574.11)였으며, 선생의 실록은 조선왕실의 계보를 적어 놓은 전적인 ‘선원보감(璿源寶鑑)’에 게재되어 있다.

*1582년(80세) 부인 오성(筽城:영광의 옛지명) 정씨(丁氏)가 향년 82세로 별세하다. 묘는 선생과 합장하다.

*1584년(82세) 2월 28일 별세. 향년 82세이다. 장지는 연하동 선산이다.

이상은 천방 선생의 간단한 생애의 이력이다.

선생의 생애 이력이 이처럼 간단한 것은, 32세 때 진사에 급제한 것 외에 평생을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고 재야의 선비로, 재야의 학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또 호방하고 초탈한 성정으로 명리(名利)를 탐하거나 하지 않았던 선생으로서 문장을 짓고 작시(作詩)는 했지만 일지(日誌) 등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李滉) 등 중앙의 거물급 석학들과 교유(交遊)하며 학문 탐구에 전념했고, 나중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 되어 공부하며 당대 재야의 성리학자로 입지하였던 인물이었다,

귀향 후 연하동에 은거하며 수많은 후학(인근 향리에서 수백인의 배우러 오는 자가 무려 수백인었다. ‘遠近鄕隣來者 無慮數百人’-정경달)을 양성하고 학문을 전수하면서 평생을 통해 일군 학문적 세계를 비롯하여 시인(詩人) 또는 문인(文人)으로서 문학의 세계가 비범하여 생전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후에도 선생의 평가는 당당하여 당대 장흥 고을의 대표적인 제1의 사표(師表)로 공인되었으며 그가 일군 학문 및 시적(詩的) 세계가 비범했던 것으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처사(處士)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일군 학문적·시문(詩文)에서 위업이나 평생토록 쌓은 덕행과 덕망으로 인해, 그는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을 비롯하여 장성의 송계사(松溪祠), 순천시 월계사(月溪祠) 등 3곳의 사당에서 그를 배향할 정도의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제, 선생의 유고집의 서문, 행장, 묘갈명 등 여러 후록, 주변인의 증언록 등의 내용을 통하여 선생의 생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천방, 효동(孝童)으로 이름 떨쳐

선생은 자(字)는 극기(克己)요,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인 유선보(劉善寶)요, 어머니는 낙안(樂安) 김씨(金氏)였다.

선생은 1502년 3월 3일 생으로, 성장하면서 천품(天稟)이 순수하고 용모(容貌)가 출중하여 대인(大人)의 풍채를 지녔다. 사서(四書-論語, 孟子, 中庸, 大學)와 오경(五經-易經, 書經, 詩 經, 禮記, 春秋) 그리고 사기(史記-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史書, 史乘, 史籍, 史冊)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辭)가 잘 다듬어져 화려하되 사치하지 아니하고 소박하고 순진하되 속(俗)되지 않았다(‘천방선생문집’, 행장–정경달)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한 효동((孝童)이었다.

하여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가 이러한 선생의 소년기를 평하기를, “선생은 어려서부터 ‘베게머리에서 부모님께 부채를 부쳐드리고 귤을 품어 부모님을 봉양한 지극한 효심’, 즉 하늘이 낸 천품으로 인근 향리 등에서 효동으로 불리었다(在髫齡扇枕懷橘之誠 出 於天性 鄕隣稱以孝童)”고 적었다(‘천방선생문집’, 추록2)고 적었다.

여기서 베게머리에서 부채질하고 귤을 품어 부모님께 드린다는 지극한 효심(在髫齡扇枕懷橘之誠)은 중국의 유명한 고사에 나온 말이다. 즉 중국 후한 때 황향(黃香)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고 간절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고생을 낙으로 삼아 부지런히 일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셨는데 여름날 아버지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먼저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드렸다고 한다. 이 고사가 ‘황향 선침(黃香扇枕)’ 고사이다.

또 육적(陸績)은 중국 후한 말의 관료이자 대학자로, 그가 소년이었을 때, 원술이라는 사람이 귤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귤을 받아든 육적이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품에 간직하려다가 떨구었고, 귤을 품속에 넣은 이유를 묻자, ‘저의 어머니가 귤을 좋아하여 어머니께 드리고자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여 육적은 이후 효(孝)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회귤’의 유래이다.

그러므로 존재 선생은, 천방의 지극한 효심을 ‘황향선침’ 및 ‘회귤’ 유래와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선생은 또 15세 때는 작은 일 등에 걸림이 없이 호방(豪放)하고 호협(豪俠)한 기상이 있어 활쏘기와 칼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 ‘고문(古文) 과독’(課讀-10세 이상은 매일 과제로 공부하게 하고 30세 이상은 매월 과제를 주어 학문하게 하는 교육법이었다)에서는 경서 등의 뜻을 깊이 이해하려고 하였고, 한 번 보면 바로 외웠을 뿐만 아니라 외운 내용을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말을 하면 언변이 논리가 있어 문장을 이루어 사람들을 자칫 놀라게 하였다(‘천방선생문집’ 묘갈명 병서1, 宋哲憲, 위백규)

20세에 이르러 전의(專意-오로지 한 가지로)로 독서에 전념하여 사람이 지켜야 도리인 의리(義理)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당시 풍조이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글을 짓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선생의 ‘지극한 자존감’을 이해하게 된다

20세 무렵의 나이에도, 용모가 뛰어난 용맹스러운 자태였고 몸매가 장대하고 키도 훤칠하였으며 언행이 바르고 몸단속을 엄밀하게 하였기에, 비록 선생보다 나이가 많아 어른의 서열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모두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벗(畏友)으로 인정할 정도였다고 한다(‘천방선생문집’, 序-朴景來, 위백규)

선생의 풍모에 대한 증언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친(반곡 정경달)을 따라 연하동으로 가서 유 선생을 뵌즉, 신장이 8∼9척이고 수염이 2척 여가 되어 보였다. 의젓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데 음성과 용모가 어질고 사나이다웠다” (余於童穉時 隨父親往煙霞洞 見劉先生 則身長八九尺 髥長二尺餘 儼然端坐 音容宣郞-‘천방선생문집’, 후록-丁鳴說)

진사 이후 과업 폐기, 학문에만 정진

32세 때 선생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지만, 과업(科業)을 버리고 과거의 뜻도 과감히 잊은 채 실학(實學)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였으며(‘潛心實學’ 위백규), 성현의 중요한 말들을 탐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여 식사하는 것도 잊고 지낼 정도였다(‘探究聖賢旨訣 樂而亡食’-宋哲憲)

선생은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보는 것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면서 장구(章句)는 물론 주해(註解)까지 놓치지 않았고, 비록 한 글자의 작은 의문이나 막힘이 있으면 이불 속에서도 깊이 생각에 잠기다 갑자기 깨달아지면 이를 기뻐하고 기록해두었다(宋哲憲).

삼벽(三僻) 넘어서-조식(曹植)‧이황 등과 교유(交遊)

선생은 사마시 급제 후, 더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홀로 실학(實學), 경사(經史) 연구에만 몰두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지만, 항상 사우(師友)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한탄했다.(‘恨無師友之力’-宋哲憲).

그러던 중 당대 퇴계 이황과 비견되는 성리학의 거두였던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선생의 학풍과 사표로서 위명을 전해 듣고, 먼 길을 걸어 남명(南冥) 조식을 찾아가 그와 교유(交遊)하게 된다.

남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동시대인인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어,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위 학자요 선비였다.

그러한 남명 선생이 천방 선생과 대면하고는 구면처럼 대해 주었고, 당시 남명과 교우(交友)가 깊었던 당대의 대학자였던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1504∼1559)에게 말하길 “유모((劉某)는 나에게 넘치는 벗이다(吾益友也)”고 할 정도였다.

또 선생은 남명에서 그치지 않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찾아간다. 천방을 만난 퇴계는 천방을 만나고 “호남 제일의 선비(湖南第一士)”고 했다.

선생이 70여세일 때 노구를 이끌고 선생보다 34세나 연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찾아가 율곡과 사승(師承) 관계를 맺었다. 당시 율곡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 경기도 파주 율곡촌(栗谷村)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율곡은 선생을 ‘대가(大家)’라고 칭찬했으며, 선생이 귀향할 때 “탄식하며 내 도가 남쪽으로 내려간다(歎吳道之南)‘”고 했다.

천방의 수제자였던 반곡 정결달의 ‘연기(年記)’에는 “천방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배워 성리학을 깨우쳤다”(劉先生學於南冥曺先生 〔諱植, 字 建中〕 之門, 得性理學-‘반곡정경달 시문집1’, 336면)”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반곡집> 여러 곳에, 반곡의 스승이었던 천방과 관련해서 남명 조식이 언급될 정도여서, 천방 선생과 남명 선생의 교우(交友)는 매우 깊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남명 조식에 대해서 차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이처럼 천방은 소위 ‘삼벽(三僻 : 존재 선생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한탄하며 토로했다는 말. 곧 지벽地僻, 인벽人僻, 성벽姓僻)’의 고을 장흥 땅’을 벗어난 중앙 무대에서도 당대 대석학들과 교유(交遊)하였고, 특히 남명과 퇴계로부터 학문과 사람됨을 인정받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천방 선생은 많은 학자들과 교우지계(交友之係) 맺고 학문을 강론하곤 했다. 대독 성운, 삼족당 김대유, 황강 이희운,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구봉 송익필, 북창 정렴, 지산 조호익, 월정 윤근 수 등 강호 제현들과 막역간의 교우가 되었다.(自此與成大谷運 金三足大有 李黃江 諸賢爲莫逆之交-위백규, ‘천방선생 문집’-유사 유전하여 오는 사적)등이 천방과 교유한 학자들이었다.
천방이 교유(交遊)했던 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성운은 16세기 당대 속리산 일대를 학문의 무대로 삼으며 재야 선비로 살았던, 전형적인 ‘처사형 사림(士林)’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남명 조식과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의 학풍과 사상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높은 평가가 있었다. ‘대곡집(大谷集)’을 남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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