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19 - 동강(桐江)에 떠있는 부춘정
■장흥한담 19 - 동강(桐江)에 떠있는 부춘정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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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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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에 오월 그늘이 잠겨있다.

부산 뜰 황금 밀밭이 말간 바람 따라 어슷거리고, 도롯가에 흐드러진 노란 금계국은 여름날을 반기는 듯 꽃대를 흔들며 뜨거움을 기다리고 있다.

오월의 탐진강에서 수런거리는 소리는 강자갈을 헤집고 흐르는 물소리이고 강둑이 화려한 것은 잔인한 사월을 기억하는 붉은 장미가 꽃잎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있어서이다. 며칠 전, 청보리를 베어내고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풍겨오는 흙냄새를 따라 홀쭉한 에움길로 들어가면 마을 언덕배기에 바람을 보듬고 물소리를 들으며 곱상하게 늙어가는 소담한 정자 한 채가 있다. 이 정자는 순박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내는 해원(解冤)의 공간이고 무거운 삶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기도 한, 광주·전남 8대 정자 중 하나인 전라남도 기념물 제67호 부춘정이다.

마을을 품고 내려온 산자락 끝에 잔잔한 강가가 명징하다.

짙어진 풀등에는 무성한 호두나무와 억센 갈대를 키워 숲을 이루었고, 돌보에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와 알을 품은 버들치 몇 마리가 강물을 휘젓고 있다. 유적 하게 날던 백로는 노송이 숲을 이루던 강가를 기억할까. 오래전 사라진 노송 강변을 배회하던 백로 한 마리가 먼 산 소나무밭에 앉아 포근해진 오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초록 바람이 심란한 마음을 씻겨주며 발길을 붙잡는다.

탐진강을 중국의 동강(桐江탐진강의 이명)과 동일시했던 조선 최고의 명필이자 문장가인 옥봉 백광훈(1537-1582)이 정자의 주인인 문희개(1550∼1610)의 인품과 충절을 찬양하여 써서 새겼다는 문희개의 호 용호(龍湖)라는 두 글자와 동강이라는 글자가 강물에 떠 있다.

‘한가로운 두 마리의 용이 호수 속에 잠겨 있다’는 호를 가진 임란 공신 문희개는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晩年)을 보내면서 청영정을 지었고, 1838년(헌종4) 청풍김씨 김기성이 사들여 부춘정으로 불리지는 정자 앞마당에는 어린 주목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지난겨울 주목은 척박한 땅에서 매운 강바람을 무던히도 견디었으리라, 그리하여 오월 쪼개진 햇살 사이로 지금 그 자리가 가장 좋은 듯 미동도 없이 더디지만 올곧게 속살을 찌우고 있고, 주변은 키 큰 은행나무와 이파리가 짙어진 동백, 오래된 팽나무가 일찍 찾아온 여름날을 싱그럽게 맞이하고 있다.

부드러운 처마 선으로 금줄을 그어 놓은 부춘정. 텅 빈 정자에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걸까. 가만히 마룻장에 걸터앉아 데워진 마음을 식히고 있을 때, 정자 뒤편 산길에서 노랑나비 몇 마리가 다 털어내지 못한 하얀 찔레꽃 향기를 탐하고 있고,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물 냄새, 멍석 냄새와 정자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다가만 옹색한 그을음 냄새가 부드럽다. 산에는 동백꽃 속에서 울다간 동박새 울음소리와 봄밤을 소복소복 적시던 봄비 소리가 스며있을 것 같고, 강에는 며칠 전, 동강에 뛰어든 별과 조각난 구름을 남몰래 쌓아 놓았을 것만 같다.

오늘은 텅 빈 마음으로 마룻장에 걸터앉아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바람 지나가는 소리, 강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울퉁불퉁한 삶 속에 덧난 상처들을 위로받고 싶다. 쫓기듯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을 벋어나 살갑게 다가온 지금의 여유를 만끽하며 향기 잃은 고고한 지식보다 물푸레나무를 흔드는 풋풋한 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낯익은 감성으로 비워야 채워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우고 싶다.

맑은 바람 맞으며 여유롭게 유려한 현판을 올려다본다.

주자가 백이숙제를 사모하여 수양산 이제묘(夷齊廟)에다 길이 남을 맑은 기상을 뜻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를 썼다는 현판 하나가 압도한다. 자유인의 공간인 정자에서조차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채워지는 욕심과 세속의 더럽혀짐을 맑은 바람으로 털어내고자 했던 곧은 사람들. 이 고즈넉한 정자에서 홀로 자유를 느끼면서도 경외심으로 수신에 정성을 다하고자 했던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 중에 1844년(갑진년) 늦여름 절도사 조우석이 부춘정을 노래했던 현판을 더듬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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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이 명승지에 멋진 정자를 세우니(古人名物以名亭)/이처럼 아름다운 모습 갖춘 곳은 없으리라(未有如斯盡善形)/동강에 흐르는 물은 긴 긴 세월 흘러내리고(水落桐江流萬古)/사람들 돌아가고 불빛은 별처럼 흩어지네(人歸夜火散千星)/풍류와 옛 자취는 청산에 남아 있어(風流往跡靑山在)/멋진 시를 지으려다 취한 술만 깨는구나(浩蕩新詩白酒醒)/이 부춘산 사들여서 노년을 보내는데(卽此買山堪送老)/긴 세월 아름다운 장소에서 신령을 보호하네(百年樂土護神靈)

바람으로 씻겨낸 마음이 가볍다.

아직 털어내지 못한 찌꺼기로 인해 한쪽 삶이 힘들 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찾아와 성글게 가로막은 돌보를 바라보고 싶다. 삶은 비워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채울 수 있기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불어오는 강바람에 헝클어진 가슴을 슬며시 풀어놓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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