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산책 23-장흥의 육상교통과 운수산업의 발전(2)
■역사의 산책 23-장흥의 육상교통과 운수산업의 발전(2)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6.0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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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 본지 논설위원, 시인, 장흥향토사연구회장

장흥군내 육상교통수단의 보급

장흥군에 대중 교통수단인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자동차가 들어 온 정확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구전에 의하면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자동차가 거의 동시대로 1915∼1920년 이후에 들어오지 않았나 여겨진다.

장흥에 자전거를 맨 처음 구입하여 이용한 사람은 일본인 의사 ‘미야다(宮田)’가 왕진용으로 처음 들여왔다 전하며, 이후 장흥읍내 상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이용하였다 한다.

자전거가 대중교통수단으로 급속하게 발전하고 대중화 된 대에는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에서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판매상의 점원으로 일하던 엄복동(嚴福童. 1892-1951)이 1913년 4월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와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918년 당시 장충단공원 경기에서 엄복동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 대중들에게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져 엄복동은 스타가 되었고, 자전거 대회마다 초청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무엇보다도 1922년 5월 31일부터 2일간 평양윤업회(輪業會) 주최로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 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들의 불공정한 판정에도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엄복동이 우승하여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하자 자전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컷던 것으로 여겨진다.

짐발이 자전거

엄복동은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당시 나이 36세에 참여하여 우승을 차지한 후 은퇴를 앞두고 전국 순회를 하면서 기념퍼레이드를 하며 장흥군을 통과하자 장흥군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열렬이 환영한 후, 이에 착안한 당시 장흥공립보통학교(현 장흥초등학교)에서는 1936년까지 읍면대항 자전거대회를 개최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장흥군에도 1920년 이후 일반인들의 승용자전거가 보급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1938년도에 제작한 장흥읍지(戊寅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자전거가 1,615대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참고로 엄복동의 나이 41세 나이인 1932년 4월, 참가자가 주로 20대인 선수들과 함께 전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는 등, 당시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그의 우승으로 인한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은 대단하여 국민적 영웅이라는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사이클연맹’에서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준 그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1977년 이후 엄복동배쟁탈 1㎞ 도로대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한편 오토바이는 일본인 의사 ‘가도다(門田)’가 왕진을 위해 들여왔다 전하며, 당시는 오토바이라는 용어가 아닌 ‘자동자전차(自動自轉車)’라 하여 장흥읍지(戊寅誌)에 장흥군에 4대가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2017년도 말의 통계를 보면 장흥군내에 3,322대로 그중 48대가 관용이며 3,274대가 자가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동차는 장흥읍에 거주한 부호로 알려진 일본인 ‘마스다(松田)’가 짚형 승용차를 들인 것이 처음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들여온 정확한 날자와 차종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고. 다만 1915∼1920년경에 들어왔으며, 이는 인근 고장보다는 자동차가 일찍 들어왔다고 어른들은 전한다.

1960년대 장흥군내 자동차의 총수가 46대로 관용 5대, 자가용 14대, 영업용27대였던 차가 1970년에는 총 119대(관용 9, 자가용26, 영업용84)로 빠르게 증가하였으나 1988년에는 총 983대(관용 54, 자가용703, 영업용226), 1998년도는 8,636대(관용 111. 자가용7,990. 영업용 535)로 10년 사이에 연간 760여대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후 2008년도에는 13,944대(관용 123. 자가용13,360. 영업용461)로 연간 550여대가계속적으로 증가하는데 주로 자가용 자동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2018년도 통계연보에 의하면 2017년도 말 기준으로 장흥군내에는 총19,615대로 승용차가 11,862대 승합차와 버스가 775대, 화물차가 6,519대. 특수차가 59대이다. 그중 관용차가 178대이며 영업용이 439대, 나머지 18,998대가 자가용이다.

장흥군내 육상 운수사업의 등장과 운영

마산-진주간 최초여객 버스

 

사람이나 짐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발명하고 개발한 자동차를 가지고 전라남도에서 영업을 시작한 시기를 전라남도지(全羅南道誌. 1994년간)에는 1910년경에 일본인 ‘오하나(尾花)’가 일본에서 자동차를 들여와 광주∼송정리간 영업을 시작한 것이 처음이며, 1921년 1월에 목포에 ‘마루이치(丸一)자동차부’가 1925년 대의동에 ‘아사히(朝日)자동차부’가 생겨 두 회사가 상호 경쟁을 하였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흥군에서의 교통운수 업체는 일본인 ‘마스다(松田)’가 장흥경찰서 앞(남동리 42번지선)에서 운수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크게 성행하지 못하였고, 전남자동차주식회사(全南自動車株式會社)에서 운행하는 정기승합버스가 운영한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고 있다. 화물차로는 ‘마루보시(丸星)자동차부’라 하여 예양리 159-6번지(현 에덴광고사)에서 영업을 하였다 하나 이 또한 정확한 년대나 영업자와 운영상황 등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스다(松田)가 장흥에서 최초로 운수사업을 한 시기는 1915∼1920년간으로 여겨지고, 정기승합 버스의 운영과 마루보시(丸星)자동차부의 운영은 1920∼1935년 사이에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자동차의 영업이 일반화되어져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한 때는 1920년부터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자동차에 관련한 법적인 규정이 1915년 7월22일. 조선총독부령으로 “자동차취제규칙”이 제정되었다. 이 규칙은 자동차에 관한 최초의 종합적인 법령으로써 자동차의 안전운행, 자동차구조의 허가, 자동차의 검사, 자동차운전면허, 자동차영업에 관하여 규정하였고, 이후 일본의 자동차교통사업법(1931.4.제정)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도록 한 법령으로 “조선자동차교통사업령(1933.9.7)”이 제정되어 여객자동차운수사업, 화물자동차운수사업 및 자동차사업의 면허제가 실시되고, 이 사업령의 시행에 따라 ‘조선여객자동차운수사업기준규칙’ 등 많은 부속법령이 총독부령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흥군의 도로 개설은 지금의 국도 2호선에 해당하는 도로 개설이 1910년 2월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해 7월에 장흥군에서도 장흥∼해창간 도로 개설사업을 시행한다는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보도하고 있으며, 1926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안양면에서 부터 용산, 관산, 대덕에 이르는 현재 국도77호선이 최초로 개통되어 당시 이를 대덕선(大德線)이라 부르고 자동차를 운영을 하게 되어 장흥의 해태(海苔)가 사방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1920년 9월부터 길동식(吉東植)이라는 분이 장흥∼수문간 자동차 영업허가를 얻어 운영하며, 당시 운임이 1원40전이라는 매일신보(每日新報)의 보도와 장흥∼영산포간 직통로가 완성되어 장흥자동차부(長興自動車部)에서 직통 운행을 개시하였다는 동아일보 보도(1923.11.23)가 있을 뿐 아니라, 장흥읍지(戊寅誌. 1938년간)에 의하면 당시 장흥군에 승용차가 18대, 화물차가 7대가 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장흥군내 최초의 자동차 사고

이렇게 발전한 자동차와 운수사업이 점진적으로 확장되어지자 교통사고도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이당시 장흥에서의 교통사고로 신문기사화 된 내용을 보면, 1932년 4월17일 지금의 장흥읍 건산리에 사는 김00(23세)라는 사람이 길을 횡단하다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당시 중앙일보에 크게 보도되었고, 조선중앙일보 1936년 5월5일자 신문에는 장흥∼영암간 도로인 강진군 병영면 도룡리에 가설중인 5m 교량에서 자동차가 떨어져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대형 자동차 화재사건으로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당시 매일신보(1938.1.13)에 대서특필하고, 동아일보(1938.1.22)에 그 후문(後聞)이 또 기사화 되어 보도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원문을 보면 당시의 교통상황과 사회상 등을 살필 수 있어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성냥불 내버린 것이 大慘事의 原因!”長興 自動車 火災事件

칠거리를 떠나 동교다리를 건너는 전남여객

[光州] 지난 八일 오후 四시경에 전남자동차주식회사(全南自動車株式會社) 소유(所由) 정기승합차(定期乘合車) 百九호는 손님 十三 명을 태우고 장흥군 안양면(長興郡安良面)을 진행 중에 화재를 일으켜 승객 중 소사 六명, 중경상자 운전수까지 八명을 내었다는 전국적으로 희유한 대참사를 일으켰다 …중략…현장에 급행하여 조사한 결과 사항을 종합(綜合)하여 보건대 전기 자동차에는 동 읍에서 七명, 도중에서 六명 합 十三 명과 운전수 한 명과 전부 十四 명이 탔었다는데…동 차는 안양면 주재소(駐在所)를 조금 지나 수문포(水門浦)와 대덕면(大德面)으로 가는 분기점을 얼마 가지 않아서 승객 중의 최모(崔某. 四四)가 담배를 피우려고 하다가 운전수의 흡연금지 주의를 듣자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대로 불타는 성냥 끝을 방기하였다는데 성냥끝을 던지자마자 불이 차내에 확 일어나서 화세(火勢)가 충천(沖天)하여 흑연(黑煙)이 자욱하므로 운전수는 겁결에 어쩔 줄 모르고 자동차를 논구렁에다 꼬라박은 까닭에 전도되어 자동차 뒤에 있는 ‘깨솔린 탱크’의 ‘깨솔린’ 주입구로부터 흘러나오는 깨솔린이 자동차 뒤편에서 앞으로 흐르는 논물과 함께 자동차 속으로 유입하게 되어 전기와 같은 대화로 되었다는 바 …성냥불로 인하여 대화를 일으키게 된 원인은 전기 자동차가 장흥읍을 출발하기 전에 깨솔린 탱크에 주입하였다는데 그때에 차내에 다소간 흘린 것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물로 씻었다는 바 씻을 때 완전히 소제되지 않고 차내에 분산하여 남아 있다가 화기를 함으로 그대로 인화하여 그와 같은 대참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1938. 1. 13. 매일신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장흥군에서의 가장 큰 자동차 사고는 1985년 4월4일 11:50분경 장동면 만년리 만수마을과 장항마을 사이 국도상에서 광원여객 완행버스가 운전부주의로 차량이 전복되어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중경상을 당항 사고가 가장 큰 교통사고의 사례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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