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0 - 천관산의 꽃불 천관사
■장흥한담 20 - 천관산의 꽃불 천관사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6.1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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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등 굽은 산길로 바람이 흐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산 다랑이 밭에는 늙은 어미가 심어놓은 풋고추가 메마른 여름날 한줄기 소낙비라도 기다리는 걸까. 갈증을 느낀 고춧잎이 축 늘어져 있는 밭둑에 붉은 오디가 검게 익어가고, 감나무에는 어느 봄날, 그 많은 감꽃을 털어내고 나서야 야무진 땡감을 키우고 있다. 자박거리며 오르는 산길 수풀 속에는 붉은 산딸기가 붉어지며 침샘을 자극하고 바람은 응달진 곳에서 비릿한 밤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치열함이 오가는 일상에서 들뜨고 산만해진 마음 다잡을 밤꽃 향기다. 비릿한 향기가 흐르는 곳에는 늙은 밤나무가 꽃을 피웠고, 풀밭에는 송충이 몇 마리가 달갑지 않은 느낌을 느꼈을까. 솜털을 곧추세우고 엉금엉금 돌진하는 걸 보며 가만히 일어날 때, 천관산의 몽근 햇살이 늙은 소나무 가지에서 영롱하게 비추며 오래전 묻어둔 생명 하나를 들쑤시며 잉태시킨다. 자연은 서로를 의지하고 탐하지 않으며 주어진 곳에서 자기들만의 삶의 향기를 쏟아내고 숲은 바람이 들쑤시는 풋풋한 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가 다감하게 다가와 오감을 일깨우고 있다.

푸른 청미래덩굴이 여름을 붙들고 있는 산길에서 오래 묶은 감정 하나가 깨어난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편견과 어리석은 집착들이 어깃장처럼 빛나고 있다. 바람을 등지고 헝클어진 칡넝쿨을 바라보며 내면에 흐르는 편견과 욕심을 걷어내고자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롭다는 유구개고(有求皆苦)가 어쩌면 비움의 진리가 아닐까. 뒤틀어진 마음을 자연이 주는 너그러움과 맑은 향기로 풀어야 할 것 같다. 머리에 가두어둔 나만의 계산법과 잣대로 살아온 삶을 털어내고자 길 끝에 자리 잡은 가난한 천년 사찰을 더듬고 있는지 모른다.

헐거운 민낯으로 다가오는 천관사.

천관산 끝자락인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에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며 바람과 구름이 머물다 가는 자리에 천관사가 있다. 신라 진흥왕(540-576) 때 통령화상이 89 암자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산사의 가지런한 돌계단을 올라와 가만히 고개 숙인다. 신라 말 김우징(신라 제45대 신무왕)이 권력에 밀려 해상왕 장보고와 천관사 홍진대사에게 몸을 의탁했던 곳.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와 일본을 거점으로 해상 무역할 때 천관보살이 상주하는 이곳 천관사에서 무사 안위를 기원하던 곳이 아닌가. 법당 앞마당에는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839-857)과 이복동생 헌안왕이 불사를 일으켜 조성했다는 보물 제795호 3층 석탑과 석등만이 영화로 왔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고, 세계 3대 거사로 일컬어지는 부설 거사(당나라 방 거사, 인도 유마거사)가 송홧가루와 연꽃 열매만 먹으며 5년을 두문불출 수행했다는 범접할 수 없는 수행도량임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다만, 오늘도 천 년 전 밝혔던 올곧은 등불 하나가 허름해진 법당 처마 끝으로 흐르며 땡그랑거릴 뿐이다.

법계와 속계를 가르는 그 흔한 일주문 하나 없다.

변변한 루(樓)하나 없는 돌계단을 올라 향불 하나 피워놓고 내 안에 숨어있는 어리석은 편견과 초라한 분노,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자 긴 시간 엎드려 있지만 끝내 붙들고 있는 실 날 같은 욕심 하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법당에 흐르는 부처의 가피는 초발심 그대로이지만 욕심 하나를 붙들어야 하는 나의 삶이 부끄러울 뿐이다.

텅 빈 고로산방(古爐山房)에서 곤하고 지친 몸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

소담한 요사채 마룻장에서 독서삼매에 든 스님의 오붓한 시간을 빼앗는다.

텅 빈 산방에서 커피를 갈고 더운물을 부어가며 커피 한 모금을 내리는 스님의 진지함을 보면서 열린 창문을 바라본다. 천관산 환희대와 구룡봉이 산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맑은 바람과 푸른 산, 굳센 환희대의 기암들이 공배공손(恭拜恭遜)하며 들어와 고단한 수행자의 가난함을 채우고 있고, 절제된 언행과 흐트러짐이 없는 지행(志行)스님의 포근한 모습을 보면서 곤하고 지친 몸 편하게 쉬고 싶다.

천관산의 꽃불 천관사.

자동차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산사에 허리 굽은 불자 몇 사람이 택시를 타고 와 가느다란 지팡이를 붙들고 법당에 든다. 협소한 법당에 무릎 꿇고 앉아 부처의 위대한 가피를 바라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간절함이다. 저 늙은 어미가 바라는 간절함은 무엇일까. 눈을 뜨면 뜬구름과 부처밖에 볼 수 없다는 천관사로 늙은 어미를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남해를 바라보며 지혜의 꽃불을 밝히고 있는 지행스님과 긴 이야기를 나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물질의 부족함에 허덕거리는 나의 내면을 돌아보며 가난하지만 충만한 수행자의 참모습 앞에 속되고 때 묻은 잡사 한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돌아 나온다. 스님의 엷은 미소가 스친다. 스님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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