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5) -햇살도 숨어들어야 하는 수인산성
■장흥한담(5) -햇살도 숨어들어야 하는 수인산성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25 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유용수/시인, 수필가

마음의 자리가 흔들릴 때, 그리고 집착의 어리석음이 조여 올 때,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의 풍경은 오래전 가난한 사람들의 소망을 털어내지 못한 채, 비바람에 씻기어 허물어져 있고, 꿋꿋하게 서 있는 늙은 소나무와 푸른 이끼를 눌러쓴 바위마저도 살다간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바람이 헤집고 흐르는 산길에는 잎이 무성한 사조화(四照花 산딸나무)가 하늘을 향해 발가벗은 순백의 속살로 산을 밝히고, 하지가 지나면 말라 죽는다는 하고초(夏枯草 꿀풀)와 산길을 마중하는 인동초, 큰까치수염이 만삭의 몸을 풀어 향기를 뿜어내는 호젓한 산길에 교교한 보랏빛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엉겅퀴 몇 송이가 잡목이 무성한 빈 집터에서 앙칼지게 가시 잎을 세우고, 오래전에 살다간 주인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허물어진 흙 담장에도 고단한 삶의 옹이가 박혀있다.

마음의 짐을 덜어 놓고 가만히 맑아지기를 소망하며 무심한 세월의 시간만이 쌓인 도린곁 산길로 몸을 밀어 넣는 이곳은 산세로 말미암아 덕을 닦는다는 수덕인산세(修德因山勢) 수인산이다.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561m의 산에 1377년경(고려말 축조) 돌을 쌓아 산마루를 이어 조선시대까지는 왜구를 피하기 위한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고, 동학농민운동 때는 장흥 석대들에서 패퇴한 동학군이 들어왔고, 일본강점기 때는 항일 운동가들이 몸을 피한 곳이고 해방이후에는 빨치산 거점지역으로 활용되는 등 살고자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온하게 품어주었던 수인산성(전라남도 기념물 제59호)이다.

밟고 지나온 산길에는 장흥. 강진. 영암 사람들이 곳곳마다에 살고자하는 흔적을 남겼고, 정상에는 봉수지와 수인사지, 창고터 등 많은 건물의 흔적과 유구를 남겼다. 산성을 쌓아놓은 반듯한 돌무더기 틈바구니에 처연하게 피어난 찔레꽃이 마음을 헤집고 있을 때, ‘구구구 푸드덕’ 회를 치며 산성을 넘어가는 산비둘기는 새끼를 부화하고자 온몸으로 낯선 자의 무례함을 경계하며 산벚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는걸 보니 인적 없는 산속에도 성글게 여름이 자리 잡았다.

구름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고 햇살마저도 숨어들어야 한다는 수인산성. 오랜 계율에 익숙해진 산성의 법칙을 깨트리며 내 안에 묻은 잡사(雜事)를 털어 내고자 등선을 오르다가 바위틈에 피어난 키 작은 골무꽃과 눈 맞춤하며 자리 잡는다.

풍경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풍경뿐이었더라면 조금은 허전했을 산길에서 산자락을 타고 넘는 뻐꾸기 소리가 고목을 흔들어 내게 청량함을 주는걸 보니 자연은 한없는 자비를 베풀고, 산 아래에는 산줄기가 마을마다 뻗쳐 소박하고 평화롭게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저 멀리 봉긋한 산이 부용산이고, 암봉 하나가 산을 아우르는 저 산은 제암산이고, 바다와 경계를 이루며 뽀쪽한 암봉이 보일 듯 말듯한 저 산은 천관보살이 상주한다는 천관산이다. 눈앞에 보이는 득량만 옥색바다의 출렁거림을 내려다보며, 집착과 갈등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아늑한 자리에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전하는 바람을 마주하고서야 어리석고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오만하게 살아온 삶의 궤적을 뒤척거려본다.

오늘의 치열함이 있기에 내일은 반짝거림이 있을 거라는 곡진(曲盡)한 몸부림에 영혼은 때 묻고 삶은 얽히고설키어 버렸다. 스치고 지나간 인연마다 소소한 행복도 있지만, 울렁거리는 아픈 날들을 보듬고 뒹굴며 서럽게 눈물 흘리던 꽃 물든 자리를 진한 눈 맞춤으로 뒤돌아보며 이제는 변해가는 삶의 가치관을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젊은 날, 남보다 더 많이 성취하거나 소유할 때 오는 행복보다는 이제는 버리고, 내려놓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단순한 것에 행복을 느끼고 싶다. 법정스님은 “소유하려고 할 때 고통이 온다. 소유하려고 하면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다.”고 했다.

달궈진 여름햇살이 지친 어깨를 감싸며 다독여 줄 때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밟으며 마지막을 오른다. 병풍처럼 펼쳐진 암봉, 벼랑가의 산성을 지나 노적봉을 오르고자 된비알 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받은 기침 토해내다 어느새 천연의 요새로 들어와 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오묘한 바위와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문득, 비우면 편하고, 버리면 개운하다는 평범한 일상의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비루한 삶을 떠 올리다가 때 묻은 몸과 마음을 털어놓고 슬며시 내려온다.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