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차 문화와 다인(茶人)들 [ 8 ]
조선후기 차 문화와 다인(茶人)들 [ 8 ]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7.0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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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전 국가중요농업유산등재 1주년 특집

이 정 호(야천서예연구원장)

■ 녹색향기와 초의선사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차의 쇠퇴 원인으로 담배(煙茶)의 보급과 술(穀茶) 음주문화 확대, 그리고 유교정책에 의한 불교탄압 등의 사회적인 제약원인으로 조선사회에서의 차 문화가 대중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조선중반까지 지속되어 오다 사찰중심으로 차맥이 이어져 초의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이 전파되면서 서서히 녹색향기가 대중 속에 퍼져 나가기 시작 했다.

우리 차의 기록과 관련 자료들은 조선 후기 들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차를 심고 마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제다법에 관한 기록은 귀하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차의 기록서로 알려진 책이 1610년대의『동의보감 東醫寶鑑』과 1750년에 쓰여 진『부풍향다보 扶風香茶譜』가 있다. 그 이전의 다서로 한재 이목의 『다부茶賦』가 있으나 제다 등 실제 부분은 제외하고 정신적 사상적인 면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동의보감 기록의 대강은 이렇다

“고차(작설차) 성질은 약간 차며 서늘하다(冷)고도 한다. 맛은 달고(甘) 쓰며(苦) 독이 없다. 기를 내리고 오랜 식체를 삭이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한다. 소갈증을 낫게 하고 잠을 덜 자게 한다. 또한 굽거나 볶아서 먹고 생긴 독을 푼다. 옛사람들은 차의 싹을 작설(雀舌), 맥과(麥顆)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어린잎을 말한 것이다. 즉 납다(臘茶)라는 것이 이것이다. 어린잎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든다. 어느 것이나 좋은 불을 거쳐야 한다. 엽차는 천이라고도 하는데 잎이 센 것을 말한다. 수족궐음경에 들어가는데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식혀서 마시면 담이 몰린다. 오랫동안 먹으면 기름이 빠져서 여위게 된다.”

또한 부풍향다보 자료를 보면, “고차(苦茶) 즉 쓴 차는 일명 작설(雀舌)이라고 한다. 조금 찬 성질이 있지만 독성은 없다. 나무가 작아 치자(梔子)와 비슷하다.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따는 것을 ‘차(茶)’라 하고, 늦게 따는 것은 ‘명(茗)’이 된다. 차(茶)와 가(檟), 설(蔎)과 명(茗)과 천(荈) 등은 채취 시기가 빠르고 늦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납차(臘茶) 즉 섣달차는 맥과차(麥顆茶)라 한다. 여린 싹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굽는다. 잎이 쇤 것은 천(荈)이라 한다.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차가우면 가래가 끓는다. 오래 먹으면 사람의 기름기를 없애 사람을 마르게 한다.”

『부풍향다보』가 140여 년 전의 자료인 『동의보감』을 원용하고 있으며, 내용으로 보면 제다법이나 음다법이 차이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자료가 발견됨에 따라 조선 중기의 차 문화를 엿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이후 1785년 이덕리의 동다기, 1837년 초의의 동다송의 저술이 있기 까지 약 220여년의 공백 기간은 우리차문화의 암흑기로 남아 있다.

이처럼 긴 시간을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산과 초의의 만남으로 촉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의에게는 다(茶)와 선(禪)은 같음이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4)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 잔의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초의가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것도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차의 성품을 삿됨 없이 어떠한 욕심(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때 묻지 않는 본래의 원천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密)”이라 하였다.

그는 도(道)란 먼 곳에 있지 않고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일상에 있고, 선(禪)이란 것도 일상적인 주변에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다선(茶禪)은 둘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1830년,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등초한『만보전서』의 <다경채요> 부분을 등초하여 이듬해 2월에 『다신전』을 완성하고서 그해 겨울에 상경한 초의는 두해 동안을 한양에서 지내면서 수종사와 다산 집, 홍현주의 청량산방 그리고 신위의 북선원, 금선암을 오가며 홍현주의 지인들, 신위, 정학연형제 등과 시유회를 거듭거듭 가지면서 그가 갈고닦은 선시의 시경(詩境)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1830년 겨울에 채화정에서 시유회를 할 적에 매화시의 말 구절에 “국수나 육류로 선복(산채만 먹는 스님의 배를 비유함)을 가득 채웠으니, 아예 이 자리엔 만두 따위는 내놓지 마시오” 하고 썼다.

또한 1831년 8월에 어산장에 머물다 돌아오면서 “산객인 나는 옛날 공융(孔融)이 나그네 접대를 후하게 하였듯이 정겨운 주인 접대를 받았으며, 또 장사하는 이들은 초왕(楚王)의 평(萍)과 같은 진귀한 물건을 가져와 산객인 나를 더욱 후히 대접하도록 해 주었다” 이처럼 사대부 신분들의 귀한 접대에는 초의의 뛰어난 선시와 함께 선다가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을 것이다. 초의는 만나는 다인들에게 동다의 효능이 중국산(월산)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고, 우리의 자연천수도 동다의 효능을 제고시켜 주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때 초의가 가져간 차(보림사 죽로차로 만든 보림백모차)는 이들에게 새로운 차의 경지를 경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는 박영보의 <남다병서 南茶幷序>에 나타난다.

또한 박영보는 자신의 스승인 신위에게 초의가 준 차를 정성껏 다려 바친다. 이때 신위는 박영보의 다시에 화운하여 <남다시병서 南茶詩幷序>를 지어 초의의 차에 대한 품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에서 신위는 초의에게 ‘전다박사’란 칭호를 이 무렵부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의 다시에서는 초의차를 “頭鋼과 같은 둥근 차를 가지고 왔네(頭綱美製玉團圜)”하여 당시 차가 중국의 두강차처럼 둥근모양의 떡차 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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