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역사인물/천방(天放) 유호인(7) - 천방 유호인의 시 세계를 고찰한다(2)
■장흥의 역사인물/천방(天放) 유호인(7) - 천방 유호인의 시 세계를 고찰한다(2)
  • 김선욱
  • 승인 2019.07.1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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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도덕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대표적인 장흥 성리학자’
‘천방은 이황, 이이, 조식이 인정한 최고의 성리학자로 위명’
格物致知 사상, 觀照의 미학, 正道的 선비의 삶-모든 詩에 투영

<지난호에 이어>

천방의 ‘영소(詠梳-여기서는 ‘소梳:빗’)눈 천방의 다른 시들인 ‘관대冠帶’ ‘검儉’ ‘편鞭:째찍’ 등과 함께 <대동시선大東詩選>(張志淵 編.1-2 /大正7,1918년)에 실리기도 했다.

(劉好仁冠 字克己 賜號天放 江陵人 宣祖甲年進士 // 冠帶-正冠垂帶儼威儀 要在中心敬自持 堪笑世人無人內守 沐貅輕躁更倡技 //梳-<箕雅此詩誤載無名氏> 木梳梳了竹梳梳/亂髮初分虱自除/安得大梳千萬尺/盡梳黔首無餘 //儉-我有龍泉一長劍 寒光直射斗牛間 河當一獻丹墀下 斬斷鯨鯢四ㅒ海安 // 鞭-枯藤爲柄革爲垂 一着能令馬自馳 祗解策他迷策己 前修正軌孰能追)

<대동시선>은 고조선에서부터 한말까지 2,000여 시인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하여 만든 것으로, 한시선집 중 가장 방대힌 시선집이다.

이 <대동시선>은 “<동문선> <청구풍아靑丘風雅> <기아箕雅> <동시선東詩選>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삼선風謠續三選> <대동명시선大東名詩選> 등 역대의 대표적인 시선집을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하고 속보(續補)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대동시선>이라 한다”고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시(漢詩)의 전통이 사실상 종장에 이른 당시 현실에서 <대동시선>의 편찬은 편자 개인의 단순한 선시(選詩)의 작업에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한국사 전체의 한시 유산을 총정리하였다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선집에서 천방의 시 4편이 게재된 것은 그만큼 천방 한시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천방의 ‘빗을 읊은 시(詠梳詩)’는 당대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우의시(寓意詩)로 당시 시인 묵객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시였다.

하여 유정양(柳鼎養)은 ‘시서2(시(詩序二)’에서 영소시를 평하기를 “…(당시에는)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어둡고 횡포한 풍속이 관리들에게는 만연되었다 것이다. 아, 이제 누가 빗(梳)으로서 그런 자들을 빗긴다는 것인가 처사 (천방)의 시에는 그런 감정이 넘치고 있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천방은 당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야인, 즉 처사로서 삶을 유지했지만, 성리학자로서 당대 인륜(人倫)과 천륜(天倫)에 어그러져 있는 세태, 사리사욕에 물든 위정자(爲政者)들의 행태 등을 시로써 비판하고 풍자하며 고발하는 이른바 현실 참여주의의 시를 썼던 것이다.

당시 겉만 치장하는 벼슬아치들에 대해 비판하는 시로서 ‘관대공복(冠帶公服)’-‘겉만 꾸미는 자들(外蝕自衆)’이란 시도 이와 다름이 없다.

正冠垂帶儼威儀 관(冠)은 바르고 띠(帶)를 두른 위엄한 것이지만

要在中心敬自持 요컨대 중심에 스스로 공경함을 지켜야 하네

堪笑世無人內守 속을 안 지킨다면 세인들 웃음을 사리

沐貅輕躁更倡技 짐승의 머리나 방정맞은 창기와 무엇이 다르랴

보통 우리가 시(詩), 특히 한시(漢詩)를 생각할 때 공자(孔子)의 시(詩)에 대한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시(詩)에 대한 정의에서, ‘시로서 흥기한다(興於詩-논어 泰伯篇‘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로서 흥기하고, 예에서 서며, 음악에서 이룬다)’고 했다.

공자는 또 <시경詩經>에 나오는 시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고 했다. 한 마디로 시는 ‘감흥을 일으키고, 삿됨이 없다’는 의미이다.

천방의 시 세계는 선비로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의 공부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사상과 관조의 미학을 잘 드러낸 천부적 시인으로서 면모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의 시 소재나 제재가 대부분 사소한 기물이거나 용기거나 짐승이거나 벌레들이었지만, 그러한 시를 읽다 보면 절로 감흥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시들의 주제는 전혀 삿됨이 없다. 인간의 삿됨을 경계하고 인간의 바른 본성을 지향하는 도학적인 가치관을 충언하는 의미가 담긴 시들뿐이기 때문이다.

조식(曺植)-성리학 연구보다 도덕 실천 강조

천방-조식학풍 수용, 시(詩)에서 반영

천방은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인간이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은 것으로 인식했으며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그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窮究),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원리를 온전히 인지하고 온전히 체득(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했다. 즉 자연세계와 사물 등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만개한 16세기, 조선의 3대 성리학자는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 조식(曺植, 1501~1572)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황과 이이가 성리학의 연구와 이론에 치중했다면, 조식은 연구보다 도덕 실천을 중시했다.

조식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문제들이나 이론적 탐구는 제대로 해명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도덕 실천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하는 학풍을 수립했던 성리학자였다.

조식의 이러한 성리학풍을 이어받았던 학자요 대쪽 선비였던 천방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도덕적인 정도(正道)를 걷는 길을 몸소 실천하였던 성리학자였다,

천방은 시들이, 그러한 곧은 선비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가치, 즉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 윤리적 가치에 대해 훈계하거나 선비로서 정도(正道)를 가도록 충언하는 시들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상

천방-거의 모든 시에 반영

특히 천방이 성리학의 격물치지의 공부를 자신이 쓴 거의 모든 시들에서 투영시켰다는 것은 이채롭다.

그는 114편의 시를 남겼다. 300여 편를 작시(作詩)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들 대부분이 임진란등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그 일부인 100여 편만 반곡 정경달에 의해 수습되었던 것인데, 이는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이들 시 90%가 화초나 수목 등 자연세계(연꽃, 해바라기, 동백, 국화, 복숭아, 목화, 버들개지, 파초, 살구꽃, 귤, 대추나무, 밤, 배, 곶감, 산포도, 소나무, 매화, 버들 뽕나무, 대나무, 달 등) 그리고 복장(의상, 관대, 모시옷 등), 기물(器物-검, 활, 지팡이, 짚신, 벼루, 먹, 붓, 종이, 병풍, 책상, 활, 갑옷, 투구, 항아리, 뒤주, 병, 부채, 등불 등), 식재료(마늘, 상추, 표주박 등), 가축(말, 개, 고양이, 닭 등), 짐승(호랑이, 쥐, 매, 까마귀, 까치, 꾀꼬리, 제비, 백로, 솔개, 뱁새, 굴뚝새), 벌레(나무좀, 누에, 귀뚜라미, 여왕벌, 매비, 파리, 모기, 벼룩, 거미, 개똥벌레. 나비, 개구리 등)를 소재나 제재로 한 시들이다.

즉 천방이 모든 동식물과 자연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소한 사물들을 소재나 제재로 선정하여 시를 썼다는 것은, 바로 사물의 궁구(窮究)를 추구하던 격물치지의 사상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역대 한시인들 중에 이처럼 철저하게 격물치지의 사상을 시를 통해 구현했던 시인은 천방이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천방의 이러한 시들은 성리학자들의 수행 방법이었던 바로 격물치지의 의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던 관조(觀照)의 수행을 통해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시들이 나름대로 그 사물들의 고유적이고 개별적이며 특특한 의미를 담고 있고 이러한 의미 규정은 관조나 통찰력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와 관조(觀照)의 삶

시 작품에 투영하다

성리학자들에게 관조는 매우 중요한 공부 방법이었다.

이미 천지만물에는 이치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에 정신을 집중한 채 보고 있으면 사물의 이치가 그대로 나에게 이르러 오며 그걸 통해 활연관통(豁然貫通-불교의 해탈의 경지 같은 의미)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연을 관조하려고 노력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핍진하게 담아내는 시들이 늘어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년∼1805년)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에 대해 남긴 기록인 <과정록>에서 관조하려 노력하였던 박지원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연암협에 살 때 아버지는 당을 내려오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관심이 있는 외물을 만나면 아무런 말도 없이 느긋이 내려다보며 “비록 외물의 지극히 은미한 것, 예를 들면 풀과 짐승과 벌레들은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만들어진 자연스런 오묘함을 볼 수가 있다(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고 말해 준다. 사물 안에 이미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조선조에서 특히 초야에 묻혀 살았던 처사(處士)들은 집이나 거주지에 대나무 소나무 등 온갖 수목이나 온갖 화초 등을 심고, 자연과 책을 벗 삼아 소요(逍遙)하며 자적(自適)하기 일쑤였다. 그 속에서 학문연구와 도학적인 사유에 잠겨 우러나오는 관조의 미학을 시로 읊어대곤 하였다. 그러한 시들이 앞에서 열거한 모든 사물과 자연에 대한 시였던 것이다.

처사였으며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천방이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선비요 시인이었던 것이다.

천방의 거주 연하동-

‘유유자적‧관조했던 삶터’

존재 위백규는 천방이 살던 곳을 ‘도학을 강론하거나 연마하던 곳’(先生卜居是洞 以爲道學講 磨之所)이라고 하였다.

반곡 정경달은 “(선생이 거주하던 곳의)…獅子山(제암산)이 명승(名僧)이다. 뫼와 바위, 샘물과 돌들이 골골마다 모두 절승(絶勝)이니, 이 연하동에 홀로 유거(幽居-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 곳에 묻혀 삶)하지 않으랴. 선영(先塋)이 있으니 곁을 지키고, 조석으로 무덤가의 나무도 가꾸며 몸소 쓸고 살피는 것을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권면함이라

…그 마을은 연하(煙霞-고요한 산수의 경치)라 부르고 편액(扁額)은 정정(定靜)이며 연못은 완묘(玩妙)이고 정자 이름은 양호(養浩)라…대저 가벼운 서책을 들고 느릿느릿 무심히 오가니 심중으로 분별(分別)하여 마음을 정(定)하고 경계는 고요한 시기를 얻어 밝은 만상(萬狀)을 적시며 혼혼(混混)히 쉬지 않는 못이 완묘지(玩妙池)다. 눈을 높아 들어 장청을 보고 기상(氣像)이 시원스레 트인 정자가 양호정(養浩亭)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종년(終年)에는 수 권의 서책뿐이니, 선생이라 자처하지 않고, 오는 사람 가르치고, 술을 안마시나 남에게는 취하도록 권하였다. 조용히 다가가면 잠긴 낯빛으로 대상(臺上)에 기대어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쓸쓸하게 자거나 그러다 깨어나면 신선옹(神仙翁) 이라는 고목같이 자신을 잊은 듯 돌아오고, 세상에도 무심하고 사람들에게도 무정함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학문의 공력(功力)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곳이라, 알려고 해도 얻어질 수 없는 곳이다.“ (‘천방선생 문집’ 번곡의 ‘정정당기’에서)

여기서 우리는 연하동에 거주하였던, 자유로운, 그러나 여유로운,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한 고고한 처사요 고독한 선비의 삶을 능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니 그의 관조의 삶과 관조의 미학이 담긴 시들의 배경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율곡은 연하동을 방문해 시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호연정에서 달을 보다(浩然亭見月)’라는 시에서,

千放空疎客 천방은 소원(疏遠)하고 공허(空虛)한 나그네

逍遙江上山 강위의 산을 할 일 없이 거니네

登臨夕陽盡 높은 곳에 올라 저녁노을이 지면

月出海雲間 구름바다 사이로 뜨는 달을 보네

라고 읊었다.

이 시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치열하게 관조의 삶을 살았을 한 위대한 선비요 시인의 모습이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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