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장흥은 의병의 고장- 남도의병 역사공원- ‘의향 장흥’으로
특집-장흥은 의병의 고장- 남도의병 역사공원- ‘의향 장흥’으로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0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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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前부산면장

시작하는 글

필자는 27년 전 1993년 장흥군청에 근무할 때 전남 신도청 입지 당위성을 주창하여 전남신도청 최적 후보지가 장흥이라고 언론보도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현재 위치로 확정되었다. 전남도가 추진하는 ‘남도의병 역사공원’ 조성을 놓고 도내 지자체들의 경쟁이 치열하여 전남신도청 이전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전남도가 추진하는 ‘남도의병 역사공원’ 사업대상지 선정 평가기준은 사업추진 여건, 입지여건, 균형발전, 역사성 등 개관적인 지표를 통해 사업대상지를 선정한다고 한다.

훗날 의병들의 구국충혼을 기리고 의병역사를 바르게 정립해 정의로운 역사를 일궈온 전남도민들의 영예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남도 의병 역사공원’조성이 되기를 기대한다.

장흥은 ’부사고을’이었다

우리 군은 1149년 장흥부사(종3품직)가 현재 장흥, 보성, 강진, 영암, 완도, 고흥일부를 관장하였다. 그 당시 장흥부사가 관할하는 지역은 정안현(현 장흥남부 읍면, 완도군 금일읍, 금당면, 생일면), 수령현(현 장흥읍, 부산면, 유치면 일부), 장택현(현 장평면, 장동면, 유치면 일부), 회령현(현 안양면 일부, 보성군 회천면, 웅치면), 탐진현(현 강진군 대구면, 마량면, 칠량면, 완도군 고금면, 신지면, 약산면, 청산면), 두원현(현 고흥군 두원면, 포두면, 점암면)이었으며 1895년 지방관제 개정되기 전까지 장흥부(府)는 전라도 서남부권 중심행정을 수행하였다.

‘의향(義鄕)’ 이란 장흥에서 만들어 낸 단어

신계우 장흥군수가 직접 만들어 낸 ‘의향(義鄕)’의 ‘의(義)’자 뜻은 “옳은”것으로 인(仁)과 의(義)와의 관계를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인(仁)을 마땅히 행하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그래서 의(義)는 의로움 또는 의로운 행위를 뜻하며 향(鄕)은 시골 또는 고향을 의미하고 있어 의(義)와 향(鄕)을 합하여「의향(義鄕)」이 된다고 말했다.

의향(義鄕)이란, 의로운 고을 또는 의로운 고장이라고 일컬으면서 장흥에는 예로부터 나라를 위하여 다른 고장보다 유난히 많은 의병이 있었으므로 역사적 위업의 전통을 선양하는 뜻이라 했다.

충무공 이순신과 장흥 의병

장흥출신으로 이순신휘하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위방은 의병 100명을 이끌고 한산도 해전에 참전하여 역전 끝에 전사하였다.

원균의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후 경사우수사 배설이가 이끌고 온 전선 가운데 부서진 8척을 장흥출신 김세호 가 장흥 의인 300여명과 함께 고쳤으며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마하수, 정명렬, 문영개, 변홍선 등은 민간의 향선 10여척을 동원하여 장흥의 회령포에서 이순신과 합세한 뒤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소위 이순신의 명량 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장흥의 관군 협찬자 가운데 유일하게 문과 급제자 정경달(鄭景達)은 임진왜란 때 선사부사(현 구미시)로 있으면서 금오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다시 죽령(竹領)에 6진을 설치하여 요격전능 펴 전승을 거두었다.

그는 뒷날 이순신의 추천에 의해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 또한 현저하였으니 이에 대하여는 <이충무공 전서>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장흥을 ‘의향’이라 지칭 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사례가 또 하나 있었다.

장흥의 의병정신을 가장 크게 떨친 초계변씨 일문(一門) 12의열(義㤠)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포, 지포, 남해 등지 해전에서 거의 전몰하였으니 왜적들 간에 흑면장군(黑面飛將)으로 알려진 홍달과 그 형제 홍건, 홍적, 홍주의 아들 덕황과 홍건의 아들 덕장 그리고 홍적의 재종질 연수와 홍주의 아들 홍립이다.

정유재란과 농재 문기방

풍암 문위세의 재종질(7촌) 문기방(紀房:1547~1597)은 1579년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병마절도사영 병마우후(兵馬虞候:종3품)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종재 명회(明會)와 더불어 의거(義擧)할 것을 계략하고 여섯 아들과 4명 사위에게 명령하여 열흘 안에 200여명 의병을 모아 고경명, 권율막하에서 활동하였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매우 위급하여 잘 훈련된 군사와 고향 장흥에서 데려온 가노(家奴) 수백 명과 함께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의 부사령관으로서 남원성 북문을 지켰는데, 일본군들한테 여러 겹으로 포위되어 입고 있던 적삼소매에 혈세를 쓴 뒤 갑옷을 벗어 하인 조감쇠에게 넘겨주고 육박전으로 싸워 장렬하게 순절하여 남원수호공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 유적으로 의마총(義馬塚)과 의열사(義烈祀)가 있다.

한말 이후 장흥의병

김영엽, 박중일, 백경인, 이남재, 위계용, 오일록 등은 을사조약으로 인한 의병활동에 참가하였고 위석규, 박호암, 최종오, 문병전, 김용관 등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김범식, 김두환, 길인주, 고서동, 위종관, 유재성, 문병곤 등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야학을 실시하여 민족사관 확립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비밀 결사 조직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한 농민조직 확대와 소작쟁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학생동지회 책임자로 활동한 고영완은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고 독립운동을 한 김정상, 그리고 천도교 중앙 경리부장을 지내던 김재계를 비롯한 천도교도 김재반, 황생주 등은 각 읍면 별로 책임자를 지정하는 등 왜적의 침입에 항거했다. (출처:文林고을 장흥, 장흥문화원, 2010년)

전라좌의병 풍암 문위세 학술대회 개최

장흥지역 의병 관련 현황은 1998년에 장흥문화원에서 발간된 <장흥지방의 국란 극복사>에 게재되어 있다.

2013년 7월 17일 장흥군민회관에서 전국 350여명 퇴계선생 제자 후손들이 모여서 운영하고 있는 도운회(陶雲회) 모임에서 <전라좌의병 문위세 절의와 그 일문 (一門) 의병운동> 학술강연회를 개최했다.

경북대학교 김시황 교수는 ‘전라좌의병은 고경명의병장의 제1차 금산 전투 패배와 관계없이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전라좌도 남부지역 동인 계열 사림이 주축이 되고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였던 문위세가 매형 박광전(광해군의 사부)과 협의하여 1592년 7월 20일 군사를 모아 낙안, 순천, 구례, 남원에 이르기까지 전라좌도를 돌며 군세를 강화하고 무주, 진안, 장수,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워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도산서원에서 동문수학했던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 의 구원 요청을 받아 영남지역 성주, 개령지역 수복전투에 참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1600년에 공적을 인정받아 선조임금으로 부터 종3품직 파주목사 임명장이 내려졌다.

임진왜란 때 장흥지역 남평문 씨 의병활동은 전형적인 一門 창의 관점에서 주목 된다. 문위세 아들과 사위였던 문영개, 문홍개, 백민수 등이 선무원종 공신록에 3등 공신, 문기방과 문명회가 2등 공신으로 등재된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장흥부(府)는 군사시설 요충지였다

고려 992년(성종11)에 역제정비시 부터 1895년 갑오개혁 때까지 벽사역(현 장흥읍 원도리) 찰방(察訪): 종6품직, 현 정보기관)이 있어 현재 고흥군, 보성군, 순천시(승주군), 강진군, 해남군까지 9개역을 관리하여 그 당시 관할 고을의 정보와 통신을 맡아 통치해왔다.

조선시대 1430년(세종12)에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되면서 장흥부사가 전라도 계수관(界首官)을 옮겨 당시 2도호부(담양․ 순천), 3군(광주․ 보성․ 낙안), 7현(고흥․능주․ 화순․ 동복․ 옥과․ 장성․ 창평)을 관장하였다. 계수관(界首官) 군기(軍器)의 제조, 군장비의 점검, 군사의 훈련, 우수인재 중앙추전, 노비의 소송을 결정하는 등 관할 12개 고을을 다스렸다.

1457년(세조3) 왜군을 소탕하는 군제(軍制)를 정비하면서 장흥부(府)에 수군진(鎭)을 설치해 장흥부사가 회령포(현 장흥군 회진면) 만호(萬戶:종4품직)외에 해남 3개소, 완도 2개소, 강진 1개소, 고흥 3개소를 관장하였다.

1466년(세조12)부터 1683년(숙종15)까지 장흥부사가 수군 첨절제사를 겸임하여 현재 진도군, 해남군, 강진군, 완도군을 관할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을 맞이하여 한온 장흥부사는 백세례, 안방언 등 장흥부 수백명 의인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고 조정에서는 ‘비변사’라는 변방수비를 담당하는 새로운 관청을 설치했다.

1597년 8월 17일부터 8월 20일까지 장흥도호부 백성들은 회령진성에서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전열을 정비하고 3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게 했으며 부서진 전선(판옥선) 8척을 적극적인 협조로 고쳐서 전선12척으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정유재란이후 1599년(선조32) 전라병마절도사영을 장흥부사(종3품직)가 관할했다가 1604년(선조37)에는 원위치(도강현: 현 강진군 병영면)로 옮겨 국난극복의 군사행정을 맡았다.

■ 맺는 글

우리 장흥은 의향이라는 자랑스러운 전통이 있다.

국가와 사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장흥인들은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규합하는데 앞장섰다. 그 사례로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외침에 맞서 싸운 114명 충의 열사가 충의사록에 등제 되어있어 장흥의병들은 다른 지방과 달리 차별화된 평가를 받고 있다.

장흥을 의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흥사람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선비정신의 행동을 실천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최후격전지로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였다.

장흥부(府) 영속의 만호(종4품)가 관장했던 해군기지 회령진성, 정유재란 이후 일정한 시기까지 장흥부사(종3품)가 관장했던 육군관할 병마절도사영, 국가정보기관의 벽사역(종6품), 서남부권을 관장했던 장흥부사(종3품)등 관리들이 많았다.

‘남도의병 역사공원’은 사업비 480억원으로 33만㎡(10만평) 부지에 건물 연면적 1만6천㎡을 조성하여 누구나 찾아와 보고, 듣고, 체험하며 쉴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지리적 위치는 지역의 성장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국가나 지역사회의 기능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전남도에서는 부지확보 가능성, 사업추진 용이성, 규모 적절성, 지역주민 협력의지와 접근성, 주변 역사, 문화, 예술자원과 연계성, 지역낙후, 상생발전의 지역균형해소 등 대상지 선정 평가 자료가 1993년 전남 신도청 이전과 비숫하다.

장흥읍은 전남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각 시군소재지와 승용차로 1시간 이내의 거리이다. 겨레를 지켜온 남도의병의 충혼을 기리고 도민이 편리하게 역사의 장으로 적극 활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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