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장흥은 의병의 고장- '의향(義鄕) 장흥' '의병의 고장 장흥'
특집2-장흥은 의병의 고장- '의향(義鄕) 장흥' '의병의 고장 장흥'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0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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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칭정稱定의 의의를 중심으로

의향(義鄕) 장흥

신계우(申季雨)/승주군수(전 장흥군수)

왜 장흥이 의향인가

의향(意鄕)이란 옥편이나 사전 등 그 어디에도 없었던 새로된 합성어로 , 1982년 5월에 필자가 장흥군수로 있을 때 처음으로 직접 지어낸 장흥군의 군호(郡號)이자 대명사이다.

…(중략)…

의향(意鄕)이란 의로운 고을 또는 의로운 고장을 일컫는다.

장흥군이 지니는 의향의 의미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적 의미의 의향으로, 정의(正義)를 위하여 싸우는 병사를 의병(義兵)이라고 하는데, 장흥에는 예로부터 나라를 위하여 다른 고장보다 유난히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절의(節義)를 지켜온 고장으로, 특히 조선왕조 시대의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정유재란과 선조 29년 충청도

이몽학난(李夢鶴亂), 인종 초 때 이괄의 난,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영조 4년 이인좌난(李麟佐亂), 철종 때 삼정문란(三政紊亂), 고종 때 병인양요(丙寅洋擾)·갑오 왜구(甲午倭寇)와 동학혁명(東學革命)·을미사변(乙未事變)·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일본의 경술(庚戌) 국권박탈 둥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군민이 일어나 이를 평정했던 역사적 위업(偉業)의 전통을 선양(宣揚)하는 뜻이다.

장흥-전남 남부권 요충지 되다

…(중략)…

고려시대 장흥의 지명은 995년인 성종 14년 9월에 정안현(定安縣)이라고 했고, 연대는 미상이지만 정주(定州)라고도 하였고, 관산(冠山)이라고도 바꾸어 불렀다. 해양도(海陽道) 안남(安南)도호부(都護府)가 영암에 있어서 영암군에 속했었다.

17대왕인 인종(1123-1146) 조에는 임원후(任元厚)의 딸이 인종비(仁宗妃)인 공예태후가 되어 18대 의종(毅宗), 19대 명종(明宗), 20대 신종(神宗) 등 3왕을 낳으므로 임씨의 덕을 흠모하여 그 고향을 ‘장흥(長興)’이라고 부르고 현(縣)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1265년 24대 원종 6년에는 ‘회주(懷州)’로 개칭되고 목(牧)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왜구침입에 대바하여 성(城)을 쌓기도 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관산읍 방촌리 일대에서 천관산 중턱까지 축성돤 회주고성(懷州古城)이 아닌가 싶다.

그 후 1310년 26대 충선왕 2년에는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쳐졌고 치소(治所)는 천관산 밑에 두었다고 하며, 마읍권성(馬邑圈城)이던 수령현(遂寧縣-치소는 대동여지도상으로는 현 장흥읍 동동리 그보다 서편쪽으로 보여짐)과 계수(季水)지역(유치·장평·장동면)이던 장택현(長澤縣) 그리고 보성군으로 변경된 회령현(會寧縣) 등 4개현을 거느렸다.

고려 말엽인 1350년 충선앙 2년 이래 왜구 침입이 극심하여 부민(府民)들이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자 1379년인 우왕 5년(己未)에 치소를 철치현(鐵治懸-지금의 화순군 능주)로 옮기면서 백성들도 소개 시켰고, 1389년인 33대 창왕 원년에 보성군에 소속시킨 때도 있었는데, 골의 부노(父老)들이, ‘장흥부(長興府)는 은띠(정正 3품∼종從 6품 벼슬아치가 허리에 띄는 예복 장식) 이상의 관원(官員)이 다스렸는데, 지현(支懸)의 관리에게 기탁하게 되었으니 마치 머리가 아래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황보덕(皇甫德) 부사(府使)가 부임하자 이를 진정하여, 안렴사(按廉使) 이원(李原)의 찬동으로 이웃고을 장정까지 모아 중령산(中寧山-현 장흥읍 건산리) 동쪽 5 里(東國輿地勝覽)에, “장흥부(현 장흥읍) 30里(文獻備考)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청구도(靑丘圖)에 표시된 황보성(皇甫城)은 장흥읍 경역(境域)을 훨씬 벗어난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용산면 계산리 뒤에 있는 학성(鶴城)이 옛 황보성(皇甫城)으로 여겨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1392년인 태조 원년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그리고 동년에 그곳에 고읍성(古邑城)을 쌓은 것(文獻備考)으로 되어 있고 …(중략)…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상으로는 수령현(遂寧縣) 치소는 탐진강 서편에, 중령산은 대동여지도상 용두산(龍頭山)의 산줄기로 현 장흥읍 건산리에 원도리 지대의 연곡리에 치소를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1413년 3대 태종 13년에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장흥 도호부(都護府)’도 되었으며 중령산성(中寧山城)이 좁다하여 수령현이 치소로 옮겼다.

장령성(長寜城)을 장흥읍성이라고 하는데, 연대는 미상이지만, 이는 장흥부(長興府)의 장(長)과 수령현의 령(寜)을 따서 장령(長寜)이라고 했다. 이는 왜구로부터 시달림을 받기 때문에 길이길이 편안하기를 원하는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조 초에, 전라도의 행정구역은 4개로 나누어 관할되었다. 즉 전주도(全州道), 나주도(羅州道), 남원도(南原道)와 장흥도(長興道)에 계수관(界首官)이 있었다. 이는 도(道)와 군현(郡縣)사이의 중간적 존재로서 도(道)의 지시를 소령(所領)의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 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전라도 장흥도 계수관에 속한 군현은 장흥·담양·순천 도호부와 무진(茂珍)·보성·낙안군과 능성(綾城)·평창현과 화순·동복(同福)·옥과(玉果)·진원(珍原) 현(감監·지헌사支懸事)이 모두 이에 속했던 것이다.

1459년인 7대 단종 5년 7월에 충청 경상과 전라 연변에 진(鎭)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장흥에 진을 두고 진도군, 강진현, 해남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1599년인 14대 선조 32년에 병영(兵營)을 강진현에서 장흥부로 이관시켜 장흥부사가 영장(營將)을 겸임하게 하였다. 1604년에 장흥부에 전영(前營)을 설치하기도 했다.

1652년 17대 효종(孝宗) 3년에 현(懸)으로 강등되었다가 1659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다. 1668년 의종 7년에는 장흥부사가 강진전영장(康津前營將)을 겸임했다가 1668년 전영(前營)을 별도로 설치했으며, …중략… 1895년 26대 고종 32년에 지방관제 개정 때 장흥부가 장흥군이 되면서 전통과 자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부(府)가 있던 고을인 장흥에 법원과 검찰청을 두게 되면서 장흥군이 근래까지 전남 남부 6개 군의 사법 중심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하 하략)….

-1984년 2. <장흥문화> 제6호에서 빌췌

정리/ 김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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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장흥의병

趙援來/ 순천대 교수

관군 협조자도 장흥이 고흥 다음이었다

<호남의절록>에 둥재된 관군 협조자 총수는 469명(출신읍 불명자 2명) 였다.

…중략…(‘전라도 15읍 관군 협조자 도표 2’ 생략)

▸흥양(興陽-고흥)/83명 ▸장흥45명 ▸나주 40명 ▸순천 28명▸…무안 27명 ▸함평 22명 ▸보성 20명…

여기서 말해주듯, 15개(開) 읍에서 참전한 관군 협조자의 총수는 전체의 384명 중 82%에 이르는 469명 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더욱 두드러진 지역별 집중 현상은 전라도 해안지대의 군현(郡縣), 특히 남해안의 가까운 고을에서 많은 숫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 휘하의 해전에서 크게 활동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흥양(고흥)에서 압도다수인 83명을 차지하는 것은 무과 출신자(42명. 장흥은 11영, 나주는 24명, 순천은 21명... 그 이하 읍은 10영 이하) 역시 압도적인 숫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읍세에 있어서 10위권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장흥이 흥양 다음으로 많은 관군 협조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인구 수 흥양 41,996명, 장흥 22,117명)

<표1,2>에서 보듯이, 양쪽(의병 출신 지도자, 관군 협조자)에서 모두 5위권 안에 속한 고을은 나주와 장흥뿐이다. 그러나 읍세에 있어서는 나주는 세 가지 통계(호구 수, 인구 수, 토지 량)에서 모두 장흥의 읍세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대 호구 수, 인구 수, 토지 량)을 비교해볼 때 의병출신 지도자와 관군협조자는 장흥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다).

장흥출신 관군 협조자의 그 소속을 보면, 권율(權慄) 휘하 9명,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휘하 2명, 어가호종(御駕扈從) 8명, 나머지 26명은 모두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장흥출신으로 이순신 휘하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위방(魏방)은 약 100여 명을 이끌고 한산도해전에 참여, 역전(力戰) 끝에 전사했다. 김세(金世浩)는 조선(造船)을 맡아 친히 대함 8척을 건조하여 명량해전서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마하수, 정명세, 문영개, 변홍선 등은 민간의 향선 10여척을 동원하어 장흥의 회진포에서 인순신과 합세한 뒤 명량해전에서 대공을 세움으로써 소위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가능케 했다.

장흥의 관군 협조자 중 유일하게 문과급제자인 정경달(丁景達)은 임란 초전의 선산부사로 있으면서 금오산전투에서 승리하고 다시 죽령(竹嶺)에 6진을 설치하여 요격전을 펼쳐 전승을 거두었다. 그는 뒷날 이순신의 추전에 의해 그의 종사관으로서 활동 또한 현저하였으니, 이에 <이순신충무공 전서>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아우 정경수(丁景壽)와 아들 정명세(丁景說) 역시 육전, 혹은 해전에 참가하여 쌓은 공이 적지 않다.

장흥을 의향(義鄕)이라 지칭할 수도 있는 특별한 사유가 있다.

장흥의 의병정신을 가장 크게 떨친 초계변씨(草溪卞氏) 일문의 12 의열(義烈)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포(唐浦), 지포(芝浦), 남해 등지의 해전에서 거의 전사하였으나 왜적들간에 ‘흑면비장(黑面飛將)’으로 알려졌다.

…중략…

첫째 전라도 53개읍 가운데 읍세상 장흥이 차지하는 위치는 10위권을 밑돌고 있었지만,

의병활동에 있어서는 대체로 3위권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타 읍에 비교될 수 있을만큼 활발한 의병활동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장흥의병은 지도자 인사들이 주로 전라좌의병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향토방위성을 띤 의병이라기 보다 국난위기 자체를 지향한 의병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아울러. 남해안에 위치한 고을의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였다고 생각하지만, 관군을 협조한 장흥의병의 주력은 명량해전 등 조선 수군의 대첩을 뒷받침한 원동력이 되기에 중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생각해보면, 임란시 장흥의병의 활동은 질, 양적인 면에서 두드러진 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 2. <장흥문화> 제8에서 발췌 정리

/김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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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고장 장흥

박영석/국사편찬위원회 위원정

…(상략…

임진왜란 때 우리 장흥지역은 타지방보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향토애와 애국심을 발휘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받쳐 일어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관군의 전투력은 보잘 것 없이 약했다.

고경명(高敬命)은 장흥지방에서 모병하여 담양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휘하 의병은 6,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적과 금산전투에서 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전사되고 그 뒤를 이은 큰 아들 종후(從厚)도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고경명 휘하에는 김응생, 김헌 등 많은 장흥출신의병들이 활약하였다.

한편, 위대기는 김표, 김여중, 노홍, 위공달 등과 의병을 일으켜 웅치전투 등에서 많은 왜적을 참살하였으며, 위대경은 전라병마절도사 황진을 따라 웅치․상주․이현전투에서 전승하였다.

그리고 장수․개령․행주․이치․금산전투에서 장흥출신 의병 문위세,문홍개,백민수,정견용,위덕원,오대무,양간 등이 활약하였다.

1593년 진주전투에서 장흥출신 노언향은 병사(兵使) 최경회 휘하에서 수문장(守門將)으로 싸우다가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였고, 정명세도 진주전투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아우 명원, 명립, 명홍, 명진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명량해전에서 활약한 장흥의병은 충무공 이순신과 관계가 깊다.

백의종군하게 된 충무공은 장흥회진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12척과 120명 군사를 얻어 전열을 정비할 때 변홍건은 두 동생 외에 문영개, 백진남 등과 더불어 전선 수척을 인솔하고 충무공 막하에 나아가 회진앞바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3형제와 함께 장렬히 전몰하였다.

그밖에 회령포의 지포․당포․명량대첩․노량해전 등에서도 장흥출신 의병들은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종전된 뒤에도 계속 국란을 당하여 이몽진의 난,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의병활동은 그치지 않았으며, 한말 일제식민지시대까지도 계속되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단행 때에도 장흥에서 이규호가 의병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금가에 이르러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알고 자결로 순국하였다.

1905년 을사오적에 의해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외교권이 박탈당할 때 장흥의병들은 일본경찰관서를 습격하여 20여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이교민이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며, 장흥 수인산성에서 항일 전투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미7조약과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할 때까지 장흥의병 활동은 계속되었고 국권강탈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장흥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장흥군은 의향(義鄕)이며 충절(忠節)의 고장이라고 한다.

장흥에는 산과 들이 유달리 빼어나 루와 정자가 아주 많다.

뜻있는 선비들은 여유로움을 갖고 세상을 관망하면서 분수에 넘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선비가 되도록 행동했다. 학문은 단순히 지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성까지를 포함한다며 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문병길 정리

<장흥문화> 제8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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