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1 -숲의 회랑 앞에 선 서승탑 보현암
■장흥한담 21 -숲의 회랑 앞에 선 서승탑 보현암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2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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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바람이 한 걸음 앞서 휘돌아가는 자리에 노란 마타리꽃과 하얀 참취꽃, 큰까치수염꽃이 뙤약볕 한 짐을 짊어지고 가을의 감성을 토닥이고 있고, 계곡을 끼고 돌아가는 한적한 길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면 자주빛 하고초와 계요등꽃이 참된 지혜의 향기를 토해내는 이곳은 죽은자의 공간에 산자가 들어와 있다. 동거가 부자유한 자리에 절은 탑을 보듬었고 탑은 절의 일부가 된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서승탑(보물 제156호)가는 강마을을 지나자 먼저 온 맑은 풍경소리가 서승탑으로 마중한다.

세상은 변화 속에서 그 어떤 영원불변한 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왜 변하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허덕거리는가. 집착과 고통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일심은 무엇이고 여래는 무엇인가. 오래전 입적한 수행자가 오늘을 깨우는 서승탑에서 혐오와 집착의 독을 제거할 참 나의 행복을 묻고 있을 때 숲의 회랑은 바람 한 줌 붙들었고, 반야의 숲길은 햇살 한 줌 움켜쥐고서 오직 깨달음만을 갈구하는 가난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서승탑 보현암에서 때 묻은 나를 다독이고 있다.

찾아오는 동안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법당에 대웅전 현판 하나 걸지 못한 법신의 자리이지만 지혜의 불꽃은 시들지 않고 오롯이 태워,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전하는 지완스님. 찻물을 따를 때마다 처마 끝 풍경은 요익중생饒益衆生과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붙들라는 날 선 죽비 소리되어 흐르고, 세상의 모든 것은 고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며 삼독(탐진치貪瞋癡) 을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음을 들추고 있을 즈음, 보림사 계곡 사이로 찻물 따르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릴 뿐 어디에서도 고달픈 삶의 마디는 드러나지 않았다.

무상의 진리를 틀어 줜 부처 앞에 나를 내려놓고 있다.

오늘도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허우적거렸지만 결국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따라오는 욕망의 굴레가 나를 겁박해 올 때,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숨터로 찾아와 어그러지고 틀어진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욕심이 지배하는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싶기에 오늘도 비우지 못한 아둔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도량 어디에도 잡초 하나 없이 양명하다.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수행자의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는 스님의 옹골찬 모습을 보면서 무슨 화두를 붙들었기에 세속의 삶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흩트려짐 없는 도량에서 조금은 낯설어하는 자잘한 삶의 파편들을 털어내고서야 차 한 잔을 들이켜며 스님의 삶을 엿듣고 있다. 30대 초반에 보림사에 들어와 천일기도로 시작된 수행자의 삶은 고단했다. 23년을 일종식(하루 한 끼 공양)하면서 수행 정진하였으나 보현암을 창건하고 도량을 가꾸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이종식을 하고 있다는 스님의 선농일치禪農一致 삶이 얼마나 고달픈가를 온몸이 말하고 있다.

무엇이 삿됨이고 무엇이 깨달음인가를 자문해 본다.

자질구레한 아픔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승탑 위탑은 상처로 말하고 있다. 스님도 마을주민들에게 들었다며 ‘빨치산 토벌 작전 때 탑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져 빨치산 몇 명이 사살된 자리’라며 그때 서승탑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오늘을 전하고 있다고 하니 언제쯤 평안하고 청정한 세상이 도래되어 상처 난 모든 것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서두름 없이 화두 하나 붙들고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낙樂의 세상을 꿈꾸고 있는 작은 암자. 호미를 거두고 하루를 쉬고 싶어도 내 안에 돋아나는 삿됨과 수행자의 본 모습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스님. 아침나절 대빗자루로 쓸어낸 자리에 선잠 든 여름 볕이 깨어날까 조심스럽게 붙들고 있는 화두는 수행자의 곧은 심지이리라.

뜨거운 태양이 뒷산으로 내려와 문필봉이 암자를 뒤덮은 여름 한 날.

목련존자가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했다는 우란분회 백중이 지나서일까. 뭉게구름 사이로 돋아난 푸른 하늘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을 때 하심합장下心合掌하며 돌아서다 문득 떠오르는 글귀 하나를 붙들었다.

”비움은 참 좋은 것이다. 비움은 곧 아름다운 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봐라. 그 간격은 나무가 스스로를 비운 자리다. 그 간격이 있어 나무는 함께 성장하고 숲을 이룬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날 숲들의 합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은 비우지를 못해 늘 부딪치는 파열음이 넘친다. 내가 나를 비우지 못하므로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간격이 없다. 밀치고 밀며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자리에서 발전과 공생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익산 사자암 주지 향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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